“우리 스스로가 대중에게 익숙한 표준 치료와 그 약물 체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
김은혜 가천대 한의과대학 조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만약 우리가 다시, 동네 방방곡곡 돌아다니며 집으로 찾아가 진료를 할 수 있다면 어떤 치료를 할 수 있을까. 병원에 갈 ‘여력이 없다’ 말하는 어르신들에게, 우리는 어떤 치료를 해드릴 수 있을까.
병원에 갈 만한 이렇다 할 이유는 없지만, 그럼에도 군데군데가 쑤시는 어르신들에게는 어떤 치료를 해드릴 수 있을까. 병원에 딱히 갈 이유는 없지만 보호자들이 옆에서 보기에 혼자 두기에는 불안 불안한 어르신들에게는, 우리가 무엇을 묻고 무엇을 치료해야 될까.
시범사업이기는 하나, 방문진료가 가능하게 된 지 수 년이 흘렀다. 방문진료라 함은, 말 그대로 환자가 계신 댁으로 한의사가 찾아가 진료를 하는 것을 말한다.
아무래도 이 진료의 특성상 건강하게 잘 걸어 다녀 대학병원부터 한의원까지 필요한 경우마다 딱딱 골라 다니는 남녀노소보다는, 주로 댁에 있으시며 꼭 약을 타 먹어야 하는 경우 말고는 병원에 가는 것을 크게 좋아하지 않는 어르신들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에는 병원에 갈 육체적, 감정적, 경제적 여력이 안 되는 분들 또한 포함될 것이다. 오히려 이런 분들께는 과거에 가방 하나 들고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왕진을 하는 의사들의 모습도 꽤 익숙하실 세대이기에, ‘방문진료’라는 단어를 의료진보다도 도리어 더 쉽게 받아들이시는 경향도 있는 듯하다.
”글쎄. 크게 불편한 곳은 없는데요?”
방문진료 사업 덕분인지 보건소나 지자체에서도 자체적으로 왕진(방문진료) 사업을 추진하는 추세이다. 덕분에 대학병원에 근무하고 있음에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시간 가량 차를 몰고 왕진을 나갔다.
어떤 물건이든 찾으면 다 구할 수 있는 병원을 벗어나서, 할 수 있는 치료의 종류와 범위 또한 제한되어 있을 게 분명한 누군가의 집에서 진료를 보는 장면들이 막연하게 상상만 되었다. 그럼에도, ‘그간의 경험’이 어떻게든 임기응변은 해주겠지라는 믿음으로 이런저런 도구들을 적절한 수준에서 챙겨갔다.
한의원에 걸어 들어오는 환자들은 니즈가 분명하다. ‘어디가 불편하세요?’라고 하면, 아픈 곳이 너무 많은 환자는 있어도 내가 여기를 왜 왔는지 잘 모르는 환자는 드물다.
한방병원에 들어오는 환자들은, 설사 본인이 잘 몰라도 우리가 찾아내면 된다. 한·양방 협진이 되는 구조니 일단 검사를 돌리면 그들도 잘 몰랐던 불편한 지점들을 우리가 찾아내서 환자를 끌고 갈 수 있다. 이게 내 ‘그간의 경험’이었다.
한 내외분이 계시는 자택으로 들어갔다. ‘아휴 선생님들 오셨네. 감사해요~ 여기 앉으세요’라고 말씀하시며 두 어르신이 바삐 움직이셨다. 가벼운 안부를 묻고, ‘아버님, 어디가 불편하세요?’라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글쎄. 크게 불편한 곳은 없는데요? 이미 병원도 다 다니고 있고, 약도 다 먹고 있는데 뭘...’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는 대답이었을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 걸어 들어와 주신 환자를 마주하는 것과, 내가 걸어 들어가서 마주한 환자를 대하는 것에 차이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다만, 어르신이라는 특성상 여기저기 삭신이 쑤시는 증상은 기본적으로 있을 것이며, 한의사를 보면 알아서 구구절절 말씀해주실 거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있었구나 싶었다.
“아휴,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꽤 흠칫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에 그간의 경험을 통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슨 약 드시고 계세요? 약 보면 어디가 불편하셨는지 알 수 있겠네.’라는 대답이었고, 그렇게 진료가 시작되었다.
막상 처방전들을 보니 수면제, 전립선약, 통증약, 고혈압약, 당뇨약 등 복용하고 계신 약들이 많은 편이었다. ‘수면제 드시네? 수면제 드시면 잠 좀 잘 주무세요? 언제부터 드셨어요?’라고 묻자, ‘먹은 지 꽤 됐는데, 효과가 없어. 어떻게 해야 돼요?’라는 대답이 왔다.
‘전립선약 드시고 계시네요? 밤에 소변은 어떠세요?’라고 묻자, ‘아, 이 약 먹어도 밤에 꼭 소변보려고 2~번씩 깬다.’라는 대답이 왔다. ‘요즘 혈압, 혈당은 잘 조절 되세요? 댁에서도 재시죠.’라고 묻자 ‘그건 괜찮은 것 같다. 근데 먹는 약이 너무 많다.’라는 대답이 왔다.
‘통증약은 왜 드세요. 어디 불편하세요.’라고 묻자 ‘좌골신경통 있다고 하던데? 그래서 거기서 약 받아왔다. 근데 밭일 하고 나면 아픈 건 똑같다’라는 마지막 대답이 돌아왔다. 이 대화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병원 안에서 이루어졌던 익숙한 진료 패턴과 주소증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진료는 약봉지 너머에 숨어있던 어르신의 진짜 증상들을 하나씩 짚어드리고서야 제대로 궤도에 올랐다. 병원 약을 먹어도 여전하다던 좌골신경통에는 침을 놓았고, 오랜 밭일로 굳어버린 등줄기를 따라 추나 치료를 정성껏 해드렸다. 처음엔 손사래를 치시던 어르신도 치료가 끝나자 “아휴,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며 환한 미소로 고마움을 전하셨다.
치료의 끝에는 현재 드시는 약들 중 개선이 필요한 부분은 무엇인지, 각기 다른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들임을 고려해 다음 진료 때 의사에게 어떤 불편함을 구체적으로 말해야 하는지도 꼼꼼히 일러드렸다.
다음 진료 전까지 댁에서 할 수 있는 관리법과 주의해야 할 증상까지 곁들였다. 옆에 딱 달라붙어 재잘재잘 설명해드리는 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얼굴을 마주하며, 나는 방문진료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다시금 확인했다.
한의계의 더 큰 기회이자 따뜻한 경쟁력
결국 방문진료 현장에서 한의사는 때로 ‘약물’을 기반으로 진료의 실마리를 풀어내야 한다. 침을 놓고 뜸을 뜨는 우리의 훌륭한 기술만큼이나, 어르신들의 약봉지 사이에서 증상의 원인과 미충족 수요를 읽어내는 역량이 중요해진 것이다.
소위 ‘다제약물 복용’ 상태인 어르신들에게 한의학적 치료가 가장 유의미한 대안이자 보완책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대중에게 익숙한 표준 치료와 그 약물 체계를 더 깊이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환자가 이미 복용 중인 약의 효능과 한계를 명확히 알 때, 비로소 우리가 무엇을 더해주고 무엇을 관리해드려야 할지 더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숙제가 아니라, 방문진료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한의사들이 함께 어깨를 맞대고 키워나가야 할 역량이다. 우리가 표준 치료의 흐름을 더 정교하게 읽어낼수록, 한의 치료라는 도구는 더 넓고 확실하게 쓰일 수 있다. 그렇게 적극적인 소통과 공부를 통해 우리만의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면, 방문진료는 한의계의 더 큰 기회이자 따뜻한 경쟁력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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