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물 의약품, 한약인가? 양약인가?

기사입력 2026.03.23 13:26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a ks url

    강민정.jpg


    강민정 약무/보험이사

    (대한한의사협회)



    천연물 의약품의 새로운 도약과 과제 


    지난해 12월17일 부산대 양산캠퍼스 첨단산학단지에 (재)천연물안전관리연구원의 준공식이 개최됐다. 이 기관은 식약처 산하 전문 연구기관으로 천연물 유래 의약품의 R&D, 품질검사, 위해물질 모니터링 등을 통해 품질과 안전성을 확보하고 전문인력 양성, 제품화 지원 컨설팅 등 천연물 의약품1)의 산업 경쟁력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됐다.  


    한편, 보건복지부는 천연물안전관리연구원 준공식 다음날인 12월18일 제4차 보건의료기술정책심의위원회을 열어 ’25년부터 ’29년까지 시행될 ‘제5차 천연물신약 연구개발 촉진계획’을 심의·확정하여 정책적으로 K-medi의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위해 천연물 의약품 개발 연구개발에 막대한 예산을 편성해 적극 지원할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적 지원 속에서 정작 한약재를 가장 많이 사용하는 한의사들은 불합리한 규제에 묶여 있다. 현행 한약(생약)제제 등의 품목허가·신고에 관한 규정에서의 ‘생약제제’ 정의가 모호하여, 한약재를 주원료로 한 (구)천연물신약을 한의사가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사법 하위고시에 불과한 한약(생약)제제 등의 품목허가·신고에 관한 규정에서 생약제제는 “서양의학적 입장에서 본 천연물 제제로서 한의학적 치료 목적으로는 사용되지 않는 제제”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서양의학적 입장’, ‘한의학적 치료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된 바가 없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한방 보험제제들도 현대 기술을 이용하여 배합·가공되어 복용 편의성이 증대된 다양한 제형(연조엑스·정제 등)으로 개발·사용되고 있는 만큼, 같은 천연물을 원료로 하여 현대 과학 기술로 개발된 생약제제 혹은 (구)천연물신약 등도 한방원리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통적인 뜸(직접구) 방식에서 전자식으로 개발된 뜸(간접기기구)도 한의학 원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하여 그 시술이 인정되고 있는 상황에서, 천연물이 현대적 기술로 제형과 제조 방식이 바뀌었다고 해서 한약제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생약제제 역시 한약제제와 별개인 것처럼 정의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시중에 유통되는 생약제제 대부분은 한의학적 원리에 기반한 처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천연물안전관리연구원 설립을 위한 약사법 법률개정안에서 연구원 명칭을 ‘생약안전연구원’으로 발의되었을 때 한의협에서는 해당 기관이 한약재 안전성을 관리하는 기관이므로 연구원 사업에 포함된 ‘생약’제제 정의의 불합리함과 현행 약사법 상의 정의 등을 근거로 ‘생약안전연구원’을 ‘한약안전연구원’으로 변경하고 사업 내용에서 생약제제에 대한 사항을 삭제 해줄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앞선 생약제제의 정의에 근거하면 ‘생약’이라는 용어 사용이 한의사의 천연물 사용에 대한 권리를 부당하게 제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천연물신약의 역사와 구성


    천연물은 인류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의약품의 형태로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일본 등에서 임상적으로 사용해 온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으며 이에 관련된 체계적인 기록과 전통적인 이론이 잘 정립된 만큼 경험적으로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되어 있다. 천연물인 한약의 다중성분이 약효의 상승효과 및 생체 내 상호작용을 일으켜 치료 효과를 강화하고 독성은 줄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순수 천연물신약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에는 특정 양약 성분에 한약 처방을 혼합한 형태의 의약품이 있었다. 두드러기약인 ‘알레스탑에스정’과 진해거담제인 ‘자모(연조엑스)’가 그 대표적인 제품으로 성분 구성은 다음과 같다.


    1.jpg


    국내에서는 천연물 성분을 이용한 신약 개발과 산업화를 촉진하기 위해 2000년 ‘천연물신약 연구개발 촉진법’을 제정하고, 2002년 식약처 허가 규정이 신설되면서 본격적인 천연물신약 개발이 이뤄졌다. 이 시기에는 자료제출의약품 수준의 허가로 기존 한약 서적(본초강목, 동의보감 등)에 기재된 처방이거나, 오랫동안 사용되어 식용이나 약용으로서의 안전성이 입증되었다고 판단되는 경우, 비임상 독성 시험 자료의 상당 부분이 면제되었고, 임상 1상 시험을 건너뛰고 바로 환자 대상의 2상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완화된 승인 과정은 국내 제약사의 빠른 신약 출시를 도왔다. 이 시기에 국내 승인 천연물신약의 종류는 아래 표와 같다. 표를 보면 대부분 한약재 혹은 한의처방을 이용해 만든 신약들이다.  


    2.jpg

    2008년 식약처 고시에서 천연물신약에 대한 범주가 확대되어 생약·한약제제의 자료제출의약품 중 일부가 천연물신약으로 규정되면서 한·양방의 갈등이 발생했다. 생약제제가 서양의학적 원리에 의한 약이라면 이에 합당한 의약품 허가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실제 의약품 허가 과정에서는 한약제제로 사용될 때 기성한약서를 근거로 의약품 허가 규정을 면제하는 것을 그대로 따르게 되다 보니 생약제제가 천연물신약으로 손쉽게 바뀔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스피린(버드나무껍질 속 살리신 성분), 탁솔(태평양 주목 나무껍질의 파클리탁셀 성분) 같은 천연물 유래 합성의약품 등이 천연물신약으로 생각되었던 것이, 한약 전체 추출물 등이 천연물신약이 되면서 한의서나 한의사 임상에 근거한 한약제제임에도 불구하고 생약제제나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되어 한의사의 처방권은 제한되었다. 


    이후 국내의 천연물신약 허가 기준이 낮아 미국 FDA나 유럽 EMA의 엄격한 승인 기준을 통과하기 어려웠고, 2015년 감사원 감사에서 “실제로는 자료제출의약품 수준인데 ‘신약’ 명칭을 부여하여 과도한 혜택을 주었다”는 지적을 받은 후, 2016년 식약처는 ‘천연물신약’이라는 별도 분류를 삭제하고, 천연물의약품의 품질 관리 수준을 높이며 안전성을 강화하기 위해 종전보다 엄격한 허가 요건을 도입했다. 이로 인해 천연물 의약품 개발이 주춤하게 되었다. 레일라정 이후 10년 만인 2022년에 육계(계피)를 주성분으로 한 위염 치료제인 ‘지텍정’이 허가되며 천연물의약품 시장에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이미 출시된 (구)천연물신약과 천연물의약품 등에 대한 한의사의 처방권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채, (구)천연물신약의 국내 시장은 주요 블록버스터 제품들의 안정적인 실적을 바탕으로 꾸준한 성장세를 보여 2025년에는 약 3000억원대 규모로 성장했다. 세계 천연물 의약품 시장은 약 300조 원(약 2300억 달러) 규모로 급성장하고 있으며, 이에 발맞춰 국내 기업들의 해외 진출 시도가 활발해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는 ‘제5차 천연물신약 연구개발 촉진계획’을 통해 국내 천연물 신약이 국제 표준에 부합하는 신약으로 인정받도록 표준화된 품질 관리 체계를 구축하고, 연구·개발부터 산업화까지 전주기 지원 시스템을 강화할 방침이다. 


    나아가야 할 방향


    천연물인 한약은 오랜 시간 동안 사용해 온 경험적인 검증을 통해 양약에 비해 부작용이 적고 안전하다고 여겨지고 있으며, 실제 한약-간독성 연구에서도 양약에 비해 현저히 낮다는 연구결과가 국내외에 존재한다. 물론 자연 유래 천연물이 무조건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약의 일부 성분도 간독성을 유발할 수 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한약을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전문가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한약 관련 사고의 대부분은 한의사의 처방과 지시 없이 민간에서 무분별하게 약초를 남용할 때 발생하는 것을 고려할 때, 한의사의 진단·처방·지시 하에 방제학적 원리에 따라 구성된 천연물을 사용하는 것이 안전성 확보에 필수적이다. 따라서 최근 개소된 ‘천연물안전관리연구원’과의 협력을 통해 한의사는 천연물 안전 관리 및 규제, R&D 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하여 신뢰성 있는 안전 관리 기반 마련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천연물에 대한 깊은 이해는 단순한 성분 분석이 아닌, 생태적 기원과 인체 반응에 대한 통합적 통찰에서 나온다. 한의사는 이러한 통찰력과 더불어 한약을 치료를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 온 경험과 전문지식을 보유하고 있어, 다중 성분의 복합 작용을 규명하고 현대 과학 기술과 접목하여 표준화된 천연물신약 후보 물질 발굴 및 효능 검증에 기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천연물 전문가인 한의사의 지도 감독 하에 축적된 한의계의 임상 데이터가 신약 개발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가져올 수도 있고, 신약의 적극적인 활용 및 사용 확대로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천연물의약품을 탄생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미 중국에서는 중의사들에 의해 다양한 한약제제들이 개발되고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중국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승인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예로 NeuroAiD란 상품명의 한약제제인 단기편탄교낭(황기, 단삼, 천궁 적작약, 수질, 토별충, 전갈, 원지, 석창포, 인공우황 등 14개 한약재)은 다국가 임상연구를 통해 뇌졸중 후유증 개선효과를 보여 전 세계적으로 판매·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한약제제가 다수 개발되는 상황에서 정작 한의사가 이를 사용하지 못하는 국내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를 종합하면, (구)천연물신약·천연물의약품은 전통 한의약 지식과 한의학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어 한약을 현대화시킨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볼 수 있다. 국내·외에서 다양하게 한약 유래 천연물의약품이 지속적으로 개발되는 현실에서, 한약 전문가인 한의사가 천연물 의약품 개발에 참여하고 실제 임상에서 반드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초음파, 뇌파계, X선 방식의 골밀도 측정기 등의 현대 진단기기도 한의사가 사용할 수 있는 만큼 법적·제도적 정비를 통해 ‘(구)천연물신약’과 ‘한약제제’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허물고, 직능 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천연물의 새로운 분류 체계가 필요하다. 나아가 의학-한의학-제약업계의 다학제적 협력을 통해 K-메디를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신약으로 키우기 위한 ‘통합적 거버넌스’ 구축 역시 이뤄져야 할 것이다.


     1) 천연물을 원료로 제조된 의약품을 말한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