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태 부산대학교 한의전문대학원 교수
요즘 극장가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셨는지 모르겠다.
개봉 20여일 만에 6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올해 최고 흥행작으로 자리 잡은 이 영화는 계유정난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어린 단종과 그를 곁에서 지킨 촌장 엄흥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덕분에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淸泠浦)를 찾는 발길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한의사나 한의대생이라면 이 ‘청령포’라는 이름이 왠지 익숙하게 들릴 것 같다. 바로 수소양삼초경(手少陽三焦經)의 열한 번째 경혈, 청냉연(淸冷淵, TE11) 때문이다. 영월의 청령포와 경혈 청냉연, 이 둘은 단순히 발음이 비슷한 것이 아니라, 실은 같은 뿌리를 가진 이름이다.
그리고 그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 교과서에 실린 경혈 이름이 원래의 이름을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야기는 『장자(莊子)』 「양왕(讓王)」 편의 한 구절에서 시작된다.
순(舜) 임금이 벗인 북인무택(北人無擇)에게 천하를 물려주려 하자, 그는 “나는 당신을 만나는 것조차 부끄럽소이다”라며 스스로 ‘청령지연(淸泠之淵)’이라는 못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청령지연’은 맑고 서늘한 연못이라는 뜻의 고유명사로 장자 사고전서(四庫全書) 원본에는 분명히 淸泠之淵, 즉 청령지연으로 기재되어 있다. 경혈 청냉연(淸冷淵)의 이름이 바로 이 연못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지금의 교과서에는 ‘청냉연(淸冷淵)’이라고 쓰여 있는 것일까? 그 답은 한자 泠(령)과 冷(냉)의 관계에 있다. 두 글자는 ‘맑다, 차갑다, 서늘하다’는 뜻에서는 뜻이 통하며, 실제로 역대 문헌에서 서로 통용(通用)되어 왔다. 자료를 찾아보면 冷은 泠의 속자(俗字)로 통용되었다고 한다. 즉 원래는 淸泠淵이었으나, 泠 대신 속자인 冷이 쓰이면서 淸冷淵이라는 표기가 일부에서 사용되었던 것이다.
침구 고전 문헌을 살펴보아도 이 흐름이 잘 드러난다.
경혈이 처음 등장하는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에는 분명히 청령연(淸泠淵)으로 기재되어 있다. 이후 당(唐)나라 『비급천금요방(備急千金要方)』에서는 청령천(淸泠泉)으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당 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휘(避諱)하기 위해 淵 대신 泉을 쓴 것이다. 그러다 북송(北宋) 이후의 『동인수혈침구도경(銅人腧穴鍼灸圖經)』, 명(明)대의 『침구취영(鍼灸聚英)』과 『침구대성(鍼灸大成)』에 이르러 청냉연(淸冷淵)으로 정착되고 말았다. 원래의 이름인 청령연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금씩 변형되어 온 것이다.(정현종, 구성태. 청냉연(TE11) 혈명에 대한 고찰. Korean J Acu 2020;37(4):271-275)
흥미로운 것은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가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점이다. 국가지명유래집에 따르면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는 『해동지도(海東地圖)』, 『광여도(廣輿圖)』, 1872년 지방군현지도에는 淸泠浦로 기재되어 있으나, 『여지도(輿地圖)』와 『지승(地乘)』에는 淸冷浦로 기재되어 있다. 泠과 冷의 혼용이 지명에서도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유배지를 ‘청냉포’가 아닌 ‘청령포’라고 부른다. 이미 지명은 원래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경혈도 마찬가지다. 이미 중국 국가표준(GB/T 12346-2006)에서는 이 경혈의 이름을 청냉연(Qinglengyuan)에서 청령연(Qinglingyuan)으로 수정한 바 있다.
단종의 유배지 이름을 청령포로 바로잡은 것처럼, 임맥의 전중(膻中)을 단중으로 교정한 것처럼, 이제 수소양삼초경의 청냉연도 본래의 이름인 청령연(淸泠淵)으로 되돌려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단종이 유배되었던 그 맑고 서늘한 청령포(淸泠浦)의 이름처럼, 청령연(淸泠淵)이라는 올바른 이름이 교과서에 자리 잡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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