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학문의 승리나 정책적 명분이 아닌 ‘환자의 건강 증진’ 그 자체여야 한다”
김은혜 가천대 한의과대학 조교수
<선생님, 이제 그만 저 좀 포기해 주세요> 저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의사로서의 직분 수행과 더불어 한의약의 선한 영향력을 넓히고자 꾸준히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김은혜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지켜본 바에 의하면, 표준치료제라고 해서 모두 제도권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표준’과 ‘제도권’의 정의는 시대와 사회적 합의에 따라 변하며, 일괄적으로 확립된 절대적 기준이란 존재하기 어렵다. 특히 제도권에 든다는 것은 다양한 배경이 뒷받침되어야 하므로 당연한 현실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해서 모두 표준치료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도 마찬가지로 표준치료제가 되기 위한 ‘과학적 근거’의 수준과 그 근거가 끼치는 영향력을 평가하는 기준에 대한 일괄적 정의가 공표된 것이 없다.
특정 치료의 효과를 증명하는 논문이 수천 편이라 할지라도, 그 근거가 실제 임상 지침으로 변환되기까지는 복잡한 가치 평가의 과정을 거친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알기에 의료인으로서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
흑백논리로 나눌 수 없는 ‘과학적 근거’
역설적이게도 모든 표준치료제가 완벽한 과학적 근거 위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한 예로 암 치료 현장을 생각해보자. 만약 우리가 문서상으로 권고되는 제도권 내 표준치료제만을 고집했다면, 지금의 항암 기술은 이토록 눈부시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최선의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근거를 쌓아가는 과정 중에 있는 치료법들이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경우가 꽤 많다. 만약 ‘완벽한 근거가 아니면 모두 배제하라’는 논리가 지배했다면, 필자 또한 한 사람의 보호자이기에 그런 현실에서 때때로 절망감을 느꼈을 것 같다.
실제로 치료제의 과학적 근거는 ‘효과’와 ‘안전성’이라는 큰 범주로 구분되지만, 모든 표준치료제가 이 두 가지를 최고 수준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지난 2020년 전염병 대유행 시기, 긴급한 상황 속에서 ‘표준’과 ‘권고’의 장벽이 얼마나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목격했다. 이는 의료 기술의 발전과 국민 보건 증진이라는 대전제 아래 수용되는 현실적 타협이다.
위의 모든 현실적 한계와 정책적 판단의 어려움을 수긍하지 못하는 의료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적 근거가 분명히 존재하는 치료제를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명백히 틀린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학적 근거’는 결코 흑백논리로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에서 근거는 ‘있음’과 ‘없음’의 이분법이 아니라, 축적된 연구의 양과 질에 따른 ‘강함’과 ‘약함’의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
“마지막 희망의 통로를 차단해서는 안 돼”
이미 국내외에서 수많은 임상 연구와 관련 논문들이 발표되어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임상 현장에서는 수치로 증명되는 유의미한 결과들이 쌓여가고 있는 치료제들이 있다.
그 근거의 수준이 정책적 결단을 내리기에 충분한가에 대해서는 치열한 토론이 필요할 수 있으나, 존재하는 연구 데이터와 환자들의 호전 사례를 무화(無化)하며 ‘근거가 없다’고 공표하는 것은 학문적·현실적 사실과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의료계에서 가장 경계해야 되는 것 중 하나가 누군가의 단정적인 언어가 현장의 환자들에게 끼칠 심리적 낙인이다.
치열한 토론의 대상이 되는 질환과 치료제는, 일반적으로 단순히 신체적 질환을 넘어 한 가정이 감내해야 하는 깊은 심리적 고통과 간절함이 서린 영역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달되는 부정적인 한마디는,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희망의 통로를 차단하는 장벽이 될 수 있다.
더 정교한 과학적 검증 시스템 구축
의료 기술의 발전은 기존의 존재하는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근거를 보완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
만약 특정 분야의 근거가 정책적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없다’고 단정 짓고 배제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더 정교한 과학적 검증 시스템을 구축하여 국민 보건에 기여하게 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이 의료계 및 관련인들의 역할일 것이다.
의료인으로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가치는 명료하다. 특정 학문의 승리나 정책적 명분이 아니라, ‘환자의 건강 증진’ 그 자체여야 한다. 부디 일부의 논의가 소모적인 비방전으로만 흐르지 않았으면 한다.
대신, 어떻게 하면 가용한 모든 의료 자원을 과학적으로 더 고도화하고, 이를 통해 단 한 명의 환자라도 희망의 불씨를 줄 수 있을지 그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하는 생산적인 시작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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