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약의 과학화, 더 이상 기전 설명에 머물러서는 안 돼
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한약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이 약은 항염작용이 있다”, “진통작용이 있다”, “면역을 증진시킨다”는 식의 설명은 이제 많은 한의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됐다.
논문에 소개된 약리 기전을 근거로 말하거나, 동물실험 결과를 인용하며 약재의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이며, 한약이 정성에서 정량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바로 “그 작용이 얼마나 강한가”라는 질문이다. 대부분의 설명은 약리 기전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그 효능의 강도, 즉 어느 정도의 치료 반응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항염작용이 있으니 염증에 쓸 수 있다”, “진통작용이 있으니 통증에 좋다”는 식의 단순한 연결로 처방이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과학화를 한다면서도 정작 과학적이어야 할 효능의 세기는 무시되거나 놓치는 것이다.
양방에서는 이 지점을 분명하게 짚고 간다. 바로 최고효능(Emax)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약물이 유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치료 효과를 의미한다.
어떤 약이 10mg에서 반응이 최고조에 도달하고, 그 이상 용량을 올려도 더 이상 효과가 늘지 않는다면, 그 시점이 바로 Emax다. 이후에는 부작용만 증가하게 된다. 양방에서는 이 개념을 기반으로 적절한 용량을 정하고, 병용 여부를 결정하고, 약물 설계와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한약에도 이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한약재가 동물실험에서 염증 지표를 15% 낮췄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약재는 급성기 염증을 강하게 억제하긴 어렵지만, 만성 염증 조절이나 예방적 관리에는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실험 수치는 언급하지 않고 “항염작용 있음”이라는 말만 반복하면, 그 약재의 임상적 쓰임새를 과대평가하거나, 반대로 저평가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필자의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있었다. 황련을 SHR 모델에 적용했을 때 혈압 강하 효과는 약 12~15% 수준이었다. 이는 양방의 일반적인 항고혈압제가 유도하는 30% 이상보다는 낮지만, 혈압이 소폭만 상승해도 두통이나 불면을 겪는 환자에게는 의미 있는 개선 효과가 될 수 있다.
희렴, 두충, 천마 등도 유사한 수준의 혈압 강하 효과를 보이는 약재들이다. 하지만 이런 약재들을 마치 혈압약처럼 단독 치료제로 사용할 경우, 환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이처럼 최고효능을 고려하지 않은 처방은 과학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략 없는 약물 선택에 그칠 위험이 크다. ‘작용 있음’은 출발일 뿐이지, 도착점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작용이 어디까지 도달하는가”, 다시 말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한의사가 최고효능을 고려한다는 것은 단지 수치를 말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수치를 통해 임상 전략을 세우고, 환자와의 소통을 정직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약은 항염작용이 있지만 20% 수준이므로, 급성기보다는 만성 관리에 적합합니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약을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쓰는 방식이다.
한약은 그 자체로 복합적이고 섬세하며, 수치로 단순화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 의학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용의 강약을 말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마황이나 대황처럼 단독으로 빠른 반응을 유도하는 약재도 있고, 감초나 인삼처럼 완만한 효능으로 보조적 역할을 하는 약재도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 체감의 차이를, 이제는 과학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한약의 과학화는 더 이상 기전 설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이 약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이 약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느냐”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약은 전략적인 임상 언어가 된다.
많이 본 뉴스
- 1 식약처, ‘2025 자주하는 질문집’ 발간
- 2 한의사 X-ray 사용…‘의료법 개정안’, 국회 검토 돌입
- 3 첩약건강보험 ‘조건에 따라 원점 재검토’ 찬성 ‘63.25%’
- 4 멸종위기 약초 생산체계의 지속가능성 ‘제시’
- 5 수원특례시한의사회, 강서원 신임 회장 선출
- 6 국가보훈부 “한의원, ‘보훈위탁병원’으로 지정한다”
- 7 “피부미용 전문가는 양방 일반의가 아닌 한의사!!”
- 8 “한의사 주치의제 도입 통해 일차의료 강화해야”
- 9 “한의약 육성발전 계획 핵심 키워드는 AI와 통합의료”
- 10 한의 레지스트리에서 침도·두개천골까지…인지장애 대응 기반 고도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