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TOKYO 2020”로고를 그대로 사용했던 2021년의 도쿄올림픽도 막을 내렸다. 여러 악조건을 이겨내고 겨우 개최된 올림픽이었기에 여러 선수들의 스토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메달 색깔과 관계 없이 올림픽을 진정으로 즐기는 환한 미소의 젊은 선수들의 모습에는 존경과 감동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111년만의 폭염이라느니 혹은 에어컨 과사용에 따른 블랙아웃이 우려된다는 뉴스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또한, 그 와중에 코로나와 함께 두 번째 여름을 이겨내느라 매미들 소리가 잦아들고 있다는 사실도 어제서야 눈치챘다. 오늘 출근하는 길에는 머리카락 사이로 추석 전날에나 불어올 법한 바람을 느꼈다.
“오메, 가을이구나!!“
한여름에는 냉방병으로 인한 냉증 성향의 근육통을 호소하는 환자들이 많이 내원하지만 여름에서 가을로 이행하는 이 시기야말로 담결림성 통증 환자들이 급증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기온은 이미 가을인데 우리들의 몸과 습관은 아직 여름에 머물러 있는 바람에 에너지의 표리부동은 근육과 혈관에 단축과 긴장을 가져온다. 실내는 덥다며 아직 에어컨은 켜 놓은 상태이고, 아이스커피라는 습관도 한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고집을 피우고 싶은 취향일 것이다. 여름용 얇은 이불도 더 두꺼운 놈으로 바꾸기 귀찮아서 아직 덮고 지낼테니 환절기 건강 관리를 위해 몇 가지만 신경 쓰시라고 환자분들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많이 하고 있다. 얇은 수면양말 신기와 미지근한 물 자주 마시기 그리고 비염 환자들에게는 죽염수 코세척을, 잦은 설사와 소화불량 환자들에게는 복부돌뜸을 권해드렸다.
담결림 잦은 계절…부항에 대한 문의 많아져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결림으로 목이 잘 안 돌아간다는 환자들이 자주 출몰하고 있는데, 그 중 몇몇분은 비슷한 부탁 혹은 질문을 하곤 한다. “원장님, 피 좀 뺄 수 있어요?”, “담결린 데는 부항이 제일 빠르다던데, 맞아요?”, “집에서 부항을 좀 떴었는데 여기에서도 가능해요?”, “저희 남편이 어디서 사혈을 배워왔다고 저한테 어제 불법시술을 했는데 아파서 혼났어요. 저 완전, 어제 마루타였어요. 원장님이 좀 봐 주세요.” 멋쩍게 웃으며 조심스레 탈의를 한 환자들의 등판에는 데칼코마니와 쉐이딩 기법을 섞어놓은 듯한 부항 마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인턴시절 가장 하기 싫은 액팅이었다. 달그락거리는 유리부항들을 트레이에 가득 싣고 이 방, 저 방 입원실을 오가는 내 모습이 너무 처량했다. 내가 이러려고 한의사가 되었나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그러나 인턴은 그 당시 한방병원에서 병원 안을 어슬렁거리는 개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그 개보다도 못한 직급이었기 때문에 까라면 까야했고 하기 싫은 액팅이건 나발이건 윗 기수 선배들의 오더라면 반드시 해내야 했다. 그게 인턴이었다.
내가 인턴이었던 시절도 벌써 21년 전의 일이라 그 이후 최소한의 수면시간과 법정 근로시간을 준수하는 인권인턴의 시대를 지나 금쪽같이 귀하다고 해서 금턴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도 풍문으로 들었다. 밥만 많이 먹고 일은 못 해도 되니, 도망만 가지 않아도 그 인턴은 그 병원에서 병원장 다음으로 높은 대접을 받을 수도 있는 그런 인턴도 간혹 있다고 들었는데 요즘의 한방병원 인턴 사정은 잘 모르겠다. 지금도 개취급 받고 있을지도 모를, 혹시라도 내 글을 어디선가 읽고 피눈물 흘릴 인턴이 있다면 부디 용서를 바란다. 대학을 떠나 공무원 노릇 하느라 바깥 세상 물정에 어두운 어느 멀고먼 한의계 선배의 가벼운 농이니 제발 잊어버리시길!!
‘5리터의 피’, 사혈과 관련된 내용 포함돼 ‘관심’
최근 한겨레신문 토요판에서 『5리터의 피』(로즈 조지, 한빛비즈, 2021년 7월)라는 책의 서평을 읽게 되었다. 사혈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길래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주문을 했다. 완독하기에는 시간이 좀 필요해 보이는, 생각보다 묵직한 책이어서 관심 가는 챕터 위주로만 슬렁슬렁 읽어내려갔다.
사혈에 대한 가장 주요한 기술들은 다음과 같다.
어느 설명에 따르면 사혈이란 “치료 목적으로 피를 뽑는 것”이다. 인류는 몇천 년 동안 두통부터 질식까지 다양한 질환을 치료하고자 피를 뽑았다. 사혈이 거의 모든 질환에 유용하다고 생각해, 심지어 심각한 출혈을 치료할 때마저 피를 뽑을 정도였다. 오늘날에는 건강을 위해 수혈을 하지만, 사실 인류의 대부분 역사에서 우리는 건강을 위해 몸에 피를 더 넣기보다 빼내는 쪽을 선호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도 피 뽑기의 힘을 워낙 굳게 믿은 나머지, 이를 뽑듯이 제 발로 사혈 기술자를 찾아가 피를 흘리곤 했다. 정맥 절개 사혈로 피를 뽑을 때는 의료용 칼과 세모날을 이용해 정맥을 절개했다. 이와 달리 거머리는 친절하게도 정맥이 아니라 모세혈관에서 피를 빠는 데다, 침에서 자연 마취제까지 내뿜었다. 20세기 들어 수술과 의약품이 발전하고 병이 세균 때문에 생긴다는 학설이 퍼지자, 정맥 절개 사혈과 거머리 사혈의 인기가 떨어졌다.
피 뽑기는 수천 년 동안 정설로 널리 퍼졌던 체액 의학과 잘 맞아떨어졌다. 체액 의학에 따르면 사람의 몸은 네 가지 체액으로 만들어진다. 의료사학자 헤르만 글라스샤이프는 이를 “네 가지 즙”이라 불렀다. 인간은 생명을 구성하는 노란 담즙, 검은 담즙, 하얀 점액, 붉은 피를 담는 용기일 뿐이었다. 글라스샤이프는 또한 “몸에는 해로운 물질을 배출할 수 있는 문이 세 개 있었다. 땀을 배출하는 살갖, 오줌을 배출하는 신장, 대변을 배출하는 창자, 하지만 생명의 즙이 네 가지이므로 출구도 네 곳이어야 했다. 그래서 의사들은 피뽑기라는 네 번째 문을 만들었다”라고 기록했다.
11세기 페르시아의 대학자 이븐 시나는 『의학 전범 Canon of Medicine』에서 피 뽑기에 꽤 많은 관심을 쏟았다. 그가 보기에 피 뽑기는 모든 질병에 유용한 보편적 배출방식으로 병을 예방할뿐더러 치료도 하는 의술이었다. 젊은이들은 피를 조금씩 추출하는 과정을 거쳐 성인 수준으로 사혈할 수 있는 내성을 기르는 것이 좋다고 봤다.
옛사람들은 피 뽑기를 오늘날 일회용 반창고만큼이나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사혈이 어떤 직업의 자격 요건일 때도 있었다. 이발사들의 정맥 절개 사혈은 외과의가 전문직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발사와 외과의 사이에 큰 다툼이 벌어지자 1745년 조지 2세가 나서 두 길드를 따로 세움으로써 마침내 경쟁 관계를 매듭지었다. 지난 2,500년 동안 인류가 겪은 어떤 질병이든 그 역사를 조금만 찾아봐도 사혈이 등장할 것이다.
부항과 거머리 사혈에 대한 기술에서는 미국 전반의 대체보완의학에 대한 조롱섞인 시선도 느낄 수 있다.
1960년대 슬로베니아 외과의 두 명이 의료용 거머리를 이용해 환자를 치료했지만 미국이나 영국의 수술실에서는 수십 년 동안 거머리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일반인들에게 거머리는 그저 역겨운 동물일 뿐이며 거머리 사혈을 중세 시대에나 있을 “사악한 돌팔이 수법”으로 여긴다.
2016년 올림픽 수영 선수 마이클 펠프스가 부항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수백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끈 이 요법은 부항단지 안에 불을 붙였다가 끈 뒤 살갗에 붙이는데 그러면 단지 안이 진공 상태가 되면서 세포 조직 안으로 피를 끌어들여 항염증 반응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부항의 목적은 피가 잘 순환하도록 돕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이클 펠프스의 몸에 난 검붉고 동그란 부항 자국을 비웃었다. 어느 과학 저술가는“다음은 뭐, 거머리인가?”라고 트윗을 날렸다. 어느 <뉴요커> 기고가는 어떤 정책이 의미 없다고 설명하면서 “머리에 난 상처에 거머리를 붙이는 것과 같다”라고 적었다.
역사적으로 사혈의 역사가 이렇게나 길었고 이발사들과 외과의들 사이에서 사혈이라는 전문 영역을 두고 왕이 나선 이후에야 겨우 경쟁 관계가 정리되었다고 하니 그 때나 지금이나 의료계는 출혈경쟁의 운명을 타고난 직군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외과의학의 수술력의 발전으로 최근에는 거머리를 요청하는 일이 확연히 줄어들었지만 불에 데인 외상, 사슬이나 벨트에 끼인 외상, 두피 손상의 경우에는 제한적으로나마 바이오팜의 거머리를 이용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고 한다.
한의학과 민간요법에서의 ‘부항’은 반드시 구별돼야
생물을 이용하는 거머리사혈과는 다른 방식의 한의사들의 사혈요법은 지금 이 순간에도 꽤 다양한 케이스에 보편적인 치료방법 중 하나로 적용되고 있다. “백번침구약 불여일회습부항”이라 할 정도의 드라마틱한 치험례도 거의 매일 경험하는 임상 아닌가?! 펠프스나 드웨인 존슨의 부항자국이 그 동네에서는 비웃음이나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의료적 목적의 안전한 사혈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의료직군은 한의사들이 거의 유일하다.
『5리터의 피』에서 언급된 사혈의 역사와 관련된 11세기, 19세기, 1960년대 등의 숫자와 ‘사악한 돌팔이 수법’ 등의 표현을 감안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1년 임상 한의학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혈요법의 생명력은 참으로 가늘지만 끈질기다.
민간요법으로서의 자가치료 부항과 의료행위로서의 사혈 부항은 구별되도록 정확한 매뉴얼과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환자들의 궁금증과 의심과 걱정을 말끔히 해결해주는 것 역시 한의사들의 몫이라 생각된다.
최근 주식앱을 깔고 매수와 매도를 구별할 줄 알게 되면서 아직은 주린이 수준이지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출퇴근과 자전거를 타면서 자주 듣는 팟캐스트 취향이 온통 경제 분야로 부드럽게 이동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주식이란 게 공부를 한다고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파랗게 질려버린 요즘의 주식장을 들여다보며 매도의 타이밍을 꿈에서도 후회하고 있다. 이럴 때면, 나는 장기투자파라고 주장하며 20년 후에는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심정으로 행복회로를 돌려본다. 성장주, 가치주, 기대주 같은 단어들을 접하면서는 이 수많은 산업 안에 한의학은 어디에 있나? 어디로 가나? 싶다가도 성장이 더뎌도 보존 가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바이오 어느 끄트머리엔가는 잠재적인 기대주로서의 한의학이 죽지 않고 거머리처럼 꿈틀거리고 있을거야라며 혼자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지난 8월 19일 MBC라디오 『이진우의 손에 잡히는 경제』를 듣던 중 『신뢰이동』(레이첼 보츠먼, 흐름출판, 2019년 3월)이라는 책을 소개하던 기자가 당근마켓의 기업가치가 3조라는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최근 당근거래를 하며 소소한 재미를 체험 중인 터라 더 관심을 가지고 내용을 들어보니 기존의 다른 중고거래 사이트보다 당근마켓이 30〜40배 높게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가 다름 아닌 당근마켓 유저들의 신뢰 구축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즉, 당근마켓에서는 사기를 당할 가능성이 훨씬 적다는 것을 유저들끼리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이 거래의 활성화를 가져오고 그 거래의 활성화는 기업가치를 지속적으로 올려주고 있다는 사실!!
‘당근마켓’의 신뢰 구축 사례…한의계에 던지는 메시지 ‘분명’
『5리터의 피』에 거머리 사혈을 다룬 챕터 마지막 문단에는 거머리 연구자가 계속 늪을 탐사하는 까닭에 관한 인터뷰가 실려 있다. “스리슬쩍 구의학과 신의학에 걸쳐 있는 이 피 빠는 동물이,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밝혀낼 것이 무척 많기 때문입니다. 지난날 곰팡이에서 얻은 페니실린을 전염병에 적용했듯이, 피 빠는 동물이 내보내는 분비물을 심혈관 질환에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혈액 응고, 소화, 결합 조직, 질환, 통증, 효소 억제, 항염증. 그 밖에 무엇이든 거머리한테는 그런 능력이 있습니다.” 거머리 연구자의 인터뷰글을 한의학 연구자 아무개의 인터뷰로 패러프레이즈(paraphrase)해 보고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우리들이 계속 한의학에 종사하는 이유는 스리슬쩍 구의학과 신의학에 걸쳐 있는 이 한의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것들을 더 해낼 수 있을지 밝혀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의학에는 아직도 무궁무진한 분야가 있으니까요.”
기업가치 3조의 당근마켓의 가치는 다름 아닌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 신뢰가 돈이 되고 가치를 증강시키는 확고부동한 보증수표라면 오늘날의 한의계는 한의학의 유저들에게 어떤 믿음을 주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한의학에 대한 신뢰의 회복, 신뢰의 도약, 신뢰의 구축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한의학계에 몸담고 있는 우리들이 시도해야 할 많은 도전들을 떠올리며 오늘도 귀갓길에 “당근이세요?” 거래를 위한 접선을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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