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의학의 발전과 미래전망 下
10년 후의 한의학?
과학화의 그늘
그런데 한의계 내부와 외부의 여러 조건들은 이러한 성장전략이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을 지체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과학화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있다. 조제권 분쟁 이후 한의학의 과학화는 한의대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그 방식이 특별했다. 조제권 분쟁에서 약사(및 의사)들과 대립했고 그들의 개입을 차단했던 한의사들로서는 이들과 함께 과학화를 추진하는 것은 어려웠다.
따라서 한의사들이 취한 과학화의 방식은 의사나 약사를 배제하고 기초과학을 전공한 자연과학자들을 고용하여 한방의료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구체적으로 한방약의 치료효과를 실험실에서 입증하고 이를 논문으로 작성하여 국제학술지에 게재하는 방식이었다. 우수한 기초과학자들과 함께 이 작업이 진행되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린 것은 사실이다. 과학화를 선도하는 모 대학의 경우 지금도 매년 수십편 이상의 국제학술논문(SCI)이 발표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이 초래하는 내재적 어려움도 노출되고 있다. 원래 서양의학의 경우 실험실을 통하여 새로운 약재가 개발되면 그것은 임상에 보급되어 새로운 치료법으로서 기여하게 되고 또한 개발자들은 이를 상품화함으로써 큰 이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기초연구자-임상의사-제약회사가 서로 윈윈하는 공생구조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한의학의 경우에는 과학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약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임상에서 사용하던 약재의 효능을 재확인하는데 머물고 있다. 그것도 SCI 논문 형식에 맞게 진행되면서 제한적인 성능 입증이 되고 있다. 한약은 기본적으로 여러 약제를 혼합하여 탕제를 만들어 처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SCI 논문에서는 단일 성분 약제의 효과를 검증해야 하기 때문에 혼합처방이 아니라 그 중에서 대표적인 성분 하나를 선택하여 검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효능이 입증된다고 하여도 실제 한방 임상에서는 혼합처방의 관행 때문에 단일 성능 약제는 사용이 어렵게 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이 장기적으로 진행되어 서양의학의 의약품처럼 단일성분의 표준화된 약들이 공장생산되어 혼합처방하는 것이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상품화되기 어렵기 때문에 산업화의 전망은 밝지 않다.
이러한 방식의 과학화가 과연 한의학의 미래인가에 대한 한의계 내부의 여론과 합치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의사를 상대로 하여 한방약도 과학적임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 과학화의 결과로 임상처방의 관행이 의사처럼 변화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인 의미만을 갖는다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의학의 과학화는 한의계를 선도하는 일부 그룹에서는 열정을 갖고 매진하고 있는 과제이지만 전체 한의사들의 목전의 과제로 인식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 한의사들은 실험실의 과학화보다는 한의학에 대한 법적 제한을 벗어나는데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이들은 의사들처럼 진단방식을 과학화하는데 관심이 많은데 법적 제한 때문에 CT나 MRI 같은 진단기기들을 사용할 수 없고 의료기사를 지휘할 수 없는 점을 아쉬워 한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들의 한·양방 문제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점이다. 90년대만 해도 거의 모든 한의사들은 양방과 구분되는 한의학의 정체성에 헌신하였다. 한의사들은 양의학으로부터 한의학을 차별화시키고, 한의학의 우수성에 자부심을 갖고 의사 중심 의료체제에 과감하게 도전하였다. 의사들이 주장하던 ‘의료일원화’에 동조하는 한의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최근의 경향을 살펴보면 적지 않은 한의사들이 의료일원화에 동의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 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한의학의 효능과 치료효과를 높이려고 노력한 결과라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한의사도 임상가이고 임상적 치료효과를 높이려면 정확한 진단은 필수적이다. 이러한 문제에 더 열성을 보이고 고민하는 한의사일수록 법적 제한 문제를 넘어서서 한의학의 가능성을 확대해 보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들에게 의사와 한의사의 구분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고 의료일원화를 통해서라도 자신들의 열망을 이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이들의 숫자는 한의사들 전체에서 보면 상대적으로 소수일지는 모르지만 90년대와는 달리 이런 생각을 하는 한의사들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갖는 함의는 매우 크다. 즉, 한의사들은 이제 그들의 지식수준이나 지식추구의 경향, 그리고 이를 임상을 통해 적용하고 환자를 효과적으로 치료하려는 직업적 태도는 의사들과 거의 차이가 없다. 의사인지 한의사인지 구분이 쉽지 않을 정도로 해박한 생의학 지식으로 무장하고 정진하는 모습은 새로운 가치관을 갖춘 한의사의 등장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한의학계 내부의 이러한 변화는 한편으로는 한의학이 전문화·과학화·제도화되고 있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다. 그런데 동시에 이러한 변화가 초래할 내부적 갈등도 예상할 수 있다. 양·한방 문제에 대한 한의사회의 공식 입장이나 한의계의 주류적 관점은 ‘협진체제 구축’이다. 협진이란 의사와 한의사의 구분을 분명히 한 가운데 양자의 평등한 관계에서의 협력관계 조성을 의미한다. 과거에 한의계가 상대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을 때에는 이러한 협진체계 구축이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한의계의 세력이 만만치 않게 성장한 상황에서 협진체제 구축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예전 같지 않다. 많은 병원에서 협진이 시도되었지만 대개는 성과가 없이 종료되었다. 그 원인은 진단과 처방의 방식이 다른 두 의학이 만났을 때 ‘동시적으로’ 환자를 치료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사가 자기식으로 치료한 이후에 한의사가 독자적으로 치료하는 순차적 치료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건강보험에서 한약처방에 제대로 급여를 해주지 않거나 협진을 위한 제도적 지원이 미비한 점 등도 협진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변화는 이제 일군의 한의사들이 협진체제를 넘어서 의사의 자격을 얻어서라도 한·양방의 모든 진단과 치료를 동시에 시행하는 식의 새로운 치료전략을 선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새로운 조류가 현실에서 얼마나 가능할지는 현재로서는 분명하지 않다. 의료일원화 문제만 하더라도 과거에 한의사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의사들이 정치적 공세로 일원화를 주장하였지만 이제 한의계 내부의 견해가 변화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일원화를 주장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최근 몇 년간의 상황을 보면 한의사와 의사들의 갈등은 오히려 더 증폭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CT 사용 제소, IMS 문제, 한방감기약 문제 등등 거의 매년 양측은 갈등을 보이고 있다. 한의사의 성장이 부메랑이 되어 갈등을 빚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의사들은 서양의학 지식을 습득에 열심이지만 의사들은 한의학에 대하여 거의 무지한 현실에서 의사들이 통합을 수용하기는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정치적 상황 전개에 따라서는 통합에 찬성하는 한의사들을 선별적으로 수용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문제는 향후 한의계 내부에 상당한 분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한의학과 한의사의 정체성을 변화시키는 문제이기 때문에 ‘한의학의 정통’을 수호하고자 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게 있을 것이고 따라서 통합을 선호하는 한의사들과 ‘이론투쟁’을 전개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론과 담론
필자가 생각할 때 현재 한의학의 성장전략에는 거시적 차원에서의 담론이 부족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와 상황이 다르기는 하지만 일본의 경우에도 한방의 미래에 논의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이들은 생의학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이 좋을지를 두고 상당한 이론적 논쟁을 전개하였다. 이 논쟁과정에서 제시된 모형은 4가지이다. 첫째는 대항적 모델이다. 전통 한의학의 장점을 강조하고 이를 고수하려는 입장이다. 둘째는 초보적 모델로서 과학화가 가능한 요소들을 가려내어 서양의학에 편입하자는 입장이다. 셋째는 보완적 모델로서 서양의학과 한의학이 서로 보완하며 상생하자는 입장이다. 넷째는 통합모형으로서 두 의학이 발전적으로 통합하여 제3의 의학으로 만들자는 입장이다. 몇몇 학자의 관점을 살펴보자.
坂井友實과 白石武昌 등은 침구가 無明症狀에 대한 치료에 효과적이고, 생체의 방어력이나 면역력 향상에 도움을 주며, 간편하고, 요통 같은 不定愁訴 증상에 효과적이며 비침습적임을 강조하면서 침구효능의 과학적 입증이 비교적 용이하고 난치병 치료에 응용될 수 있기 때문에 서양의학에 편입시켜 활용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반면 石田秀實은 침구학과 서양의학의 차이에 주목한다. 서양의학이 통증에 대한 대증요법만을 실시하지만 침구학은 대증요법과 함께 전체론적(holistic) 이론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전체론적 이론은 실증이 어렵다. 그렇지만 현대적 경향에서는 전체론과 같은 고전어와 함께 과학언어로 실증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서양의학처럼 침구의 생물학적 효과에만 주목하지 말고 환자의 만족에 의한 효과에도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그는 침구의학을 제3의 의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矢野忠은 전통침구에서는 4진법을 강조했지만 현대침구에서는 이를 물리치료의 일종으로 간주한다고 파악한다. 그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의 탈근대사회 이론을 받아들여 전통침구는 객관적 신체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탈근대사회에서의 침구는 객관적 신체와 함께 주관적·주체적 신체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체적 신체의 개념에 근거하여 전통 한의학적 개념인 未病을 현대적으로 이론화하여 적용할 것을 주장한다.
즉 여기서 實은 대사가 왕성하지만 자각증상 감도가 낮은 사람들의 특성이 되는데 이들은 당뇨같은 질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고, 생명예후가 짧고 발병은 급속히 진행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의료적 개입이 시급하게 된다. 반면 虛는 신진대사가 부진하고 자각증상 감도가 높은 사람들로서 腸症, 건강이상치 내성이 약하고, 예후가 길고 발병과정이 완만하기 때문에 개입이 불필요하게 된다. 이와 같이 허실의 이론을 주체적 신체관과 연결하여 건강장애진단법을 세련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
간략하게 소개한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전통 한의학이나 침구의학의 특성을 어떻게 현대화할지에 대한 고민이 깊고 그 과정에서 생의학과의 비교는 물론 더 나아가 현대의 사회이론과의 접목까지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접근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현대인에게 making sense하는 한의학을 만들려고 하고 동시에 과학적 근거와 함께 사회적 근거를 갖는 새로운 의학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과 비교했을 때 우리 한의계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 있다. 과학화의 경우만 하더라도 과학화가 반드시 RCT(randomized controlled trials)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특히 대체의학 영역의 경우에는 RCT 방식으로 효과를 입증할 수 있는 부분이 크지 않다. RCT는 질병이 단기간에 발생하고, single domain에 나타나며, 복합적인 confounding factor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 시간이 없을 때 적용할 수 있는 기법이다. 그런데 만성적 증상에 대한 전인적 치료에 치중하는 한방의 질병과 치료개념에 적합하지 않은 방법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안의 성격에 따라서 RCT 방법이 필요하겠지만 이것만으로 과학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다른 여러 방식이 추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RCT는 기본적으로 엄격한 인과관계를 추론하기 위한 검증법이다.
그런데 치료의 효과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역학적 방법이나 health services research 방법이나 비용효과분석 또는 질적 연구방법에 의해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한의계는 RCT 방법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후자의 방법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인식이 부진하다. 의학계의 경우에는 의대에서는 주로 RCT에 의한 방법을 실시하지만 보건대학원이나 약대 또는 다른 분과학문 영역에서 후자의 방법들을 연구하고 있고 이것이 전체적으로 의학의 효과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그러나 한의계의 경우에는 다른 학문분과와의 교류 협력이 매우 제한적이다. 특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과의 교류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외연 확대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한의학은 과거에 비하여 비약적으로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 왜소함’을 벗어나기 어렵다.
5. 맺는말
과거에 한의학은 의사와의 대결 속에서 위기도 겪었지만 또 내부적으로는 응집할 수 있었고 생존의 전략수립 또한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한의학은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단기적으로 보면 한의학의 위상도 높아졌고, 한의사제도 폐지 같은 시나리오는 더 이상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시술방식을 유지하면서 직업적 만족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의학은 과거의 한의학이 아니라 현대사회와 조화된 새로운 한의학으로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면 정치권력이 아닌 시장의 힘에 의하여 흔들릴 가능성이 다분히 있다.
물론 그동안 한의사들도 과학화를 통하여 한방의료의 질적 성장을 추구하여 왔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강조한 것처럼 무엇을 위한 과학화이고 궁극적으로 한의학을 어떤 모습으로 바꾸어갈지에 대한 담론이 빈약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원인이 다분히 다른 학문, 다른 의료인과의 교류에 상대적으로 소극적이고 현대사회 속의 한의학에 대한 성찰적인 자세가 부족한데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의학을 어떤 모습으로 발전시켜갈지의 여부는 이런 점들이 어떻게 개선될지에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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