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주 대한동서의학회 학술이사

기사입력 2008.10.2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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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학 과학화의 핵심인 ‘임상연구’, 그 어려움은 무엇인가

    일전에 이 지면을 통해 한의학에 어느 정도는 ‘현대 서양과학(의학)의 방법론을 수용’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 핵심내용에 대해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과학화’ 논의에 관한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온다고 생각됩니다.

    한약에 대해 氣味論이 아니라 화학적 방법으로 성분을 분석하고 효능을 찾아내며 유효성분만을 추출하여 신약을 개발하는 것은 많은 자연과학자의 꿈이고, ‘한의약 산업화’로 정부가 추진하는 내용이지만, 사회가 한의사에게 요구하는 핵심은 아닙니다. 인간의 오감을 대신할 수 있는 진단기기가 개발되고, 변증진단에 필요한 점수표가 정교하게 만들어진다고 해서 과학성을 인정받는 것도 아닙니다. 한약이나 침구치료의 치료기전을 서양과학의 용어로 정확히 밝혀내야만 과학화 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모두 필요한 일들이긴 하나, 이런 식으로만 과학화에 접근할 때 오히려 한의학의 정체성과 장점을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의학이 ‘치료의학’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히 ‘치료 효과의 증명’입니다. 현대 서양의학에서도 치료기전을 정확히 모르면서 사용되는 치료법들이 많습니다. 경험적인 치료 사례들에서 출발하여 임상연구 과정을 통해 ‘통계적으로’ 치료 효과가 인정되면 치료법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또 상당한 부작용이 있는 치료법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상쇄하는 치료 효과가 있다는 이유로 시술과 투약이 정당화 됩니다. 현재 한의학에 가장 절실하고 중요한 과학화는 바로 임상연구로 치료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고 그것은 다른 영역의 과학자들에게 부탁할 수도, 그들이 대신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존의 서양의학에서 확립된 임상연구 방법론을 그대로 한의학에 적용하는 데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근거중심의학에서 Gold Standard라고 인정되는 것은 무작위배정 이중맹검 임상연구(RCT : Randomized Clinical Trial)이지만, 한의학의 원리나 속성상 기계적으로 적용하기 힘든 부분이 많습니다.

    첫째, 플라세보 효과를 없애기 위해 대조군에게도 위약을 주고, 환자와 치료자 모두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모르게 하는 이중맹검을 시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탕약 형태로는 위약을 만들기 힘들기 때문에 제형 변화가 필요하나 약 용량이 지나치게 많아지고, 효과가 떨어질 가능성도 많습니다.

    침구치료의 임상연구에서는 어려움이 더 큽니다. 피부에 닿기만 하고 피부를 뚫지 않는 ‘거짓 침’ 도구도 개발되었지만, 침 치료 경험이 별로 없는 서구인에게나 통할 수 있지, 한의사의 침 실력을 평가할 정도의 한국 환자들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또 경혈이 아닌 곳에 자침하여 대조군을 삼기도 하지만, 361개의 정경혈 외에도 무수히 많은 경외기혈이나 신혈들이 있고, 락맥, 손락, 세락 등으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경락체계에서는 진정한(치료 효과를 전혀 기대할 수 없는) 대조군이라 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침치료가 효과는 있으나 거짓 치료군에 비해서 효과가 유의하게 높지 않다는 결론이 종종 나오게 됩니다.

    둘째,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한의학에서는 같은 병명이라도 같은 약처방, 침처방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개별화된 치료(individualized therapy)는 최신 서양의학에서도 강조되는 것이며, 한의학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환자군에는 모두 동일한 약을 주거나 시술해야 하는 RCT의 기본 방법론에서는 허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임상연구에서는 일종의 절충안으로 변증에 따라 실험군을 나누는 방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러나 크게 몇 개의 처방군으로 나누었다 해도, 개별 환자에게 꼭 맞는 처방이 되기 위한 가미, 가감이 허용되지 않는다면, 치료율은 조금이라도 떨어지게 되고, 환자의 이익에도 반하는 일이 됩니다. 연구자는 연구 윤리에도 어긋나게 된다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상황이지요.

    셋째, 치료 효과가 입증되더라도 표준적인 치료법으로 인정받으려면 재현성이 있어야 합니다. 즉 다른 한의사가 프로토콜을 그대로 따라 시행하면 동일한 결과를 얻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한약은 천연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같은 처방, 같은 약재라도 실제 유효 성분의 농도가 동일하기 어렵고, 침구치료의 기법을 세밀하게 정의하더라도 시술자에 따른 숙련도, 득기 정도에는 차이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넷째, 진단과 치료 효과 평가에 있어 양방 기기나 검사가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서양의학계와의 협진이나 공동연구가 아니면 한의사 단독으로만 임상연구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들을 나열하는 것은 아직 근거를 만들지 못한 변명에 불과할 뿐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한의계에서는 이미 증례보고의 형식으로 무수히 많은 치료 사례를 발표해왔지만, 서양의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치료 사례 보고가 근거중심의학 체계에서 차지하는 증거 능력이 낮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제까지의 보고들에 중요한 부분이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개선해서 개원가에서도 임상 근거를 만들어 내야할 지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이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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