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강제 <醫生制度> 시행 당시에 한의사 관련 단체 임원의 평균 연령 ‘中央과 大邱 중심으로’…
기사입력 2008.04.22 10:25
한의사 말살정책에 끊임 없는 항거
현 대한한의사협회가 존재하게 된 ‘힘’
醫官을 살펴보면
■ 崔奎憲 (1846年生)
- 1864年 19歲의 나이로 醫科에 급제하였다. 字는 胤章, 號는 夢庵으로 1898년 ‘대한의사총합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家族歷을 보면 <醫科八世譜>에 11代 以上 韓醫師를 배출하였던 집안이다. 특히 그의 아들 崔錫賢은 1869年에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以後 <醫科>와 <籌科>를 다 합격하였다.
그의 형제로는 崔奎恒<譯科 합격: 1856年生>과 崔奎承<醫科八世譜: 直長>이 있다. 崔奎憲의 저서는 『小兒醫方』이며 광무2년 1898年에 <太醫院 典醫>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그도 1913年 일제의 강제 醫生制度의 희생자로서 68歲의 나이로 1914年 <의생면허>를 받은 분이다. 이후 그는 한의학 말살정책에 항거하여 韓醫師會 일원으로 많은 노력을 하였다.
■ 李海盛과 李海昌
- <漢方醫藥界>에 李海盛<籌學 : 1853年生 - 議藥同參>은 편집부 部長으로 李海昌<1841. 3.14. 生 - 1897年 典醫>은 編述員으로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이 형제인지 아무도 기술하지 않은 것 같다.
관련서적을 보면 井邑李氏 집안은 조선시대 科擧를 통해 11代 以上<醫譯籌>부분에 及第하였던 집안으로 관련 인원도 100여명이 넘는 당시 명문 中人家門이다. 특히 <醫科八世譜>와 <醫譯籌八世譜>에 이들 집안 내력이 나타나 있다. 형제로는 李海萬<1832年生/ 籌學> 도 있는데 海萬은 아들 李止相<醫科/譯科>과 李道相<籌學>이 있고, 李海昌의 아들 李維相은 <醫科八世譜>에 나오는 인물이다. 동생 李海盛은 1903년에 典醫에 임명되었다.
<太醫院> 鍼醫 金東錫<1861.7.7年生>은 1914년에 醫生免許를 받았는데 그도 고종19년(1882년) 式年試 科擧에 22歲의 나이로 <醫科>에 합격하여 일제의 한의사 말살 정책에 의해 53歲의 나이로 <醫生制度>에 강제편입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지석영은 <文科>출신 醫官이었고, 籌科를 예를 들면 조선 영-정조때 『濟衆新編』의 저자이며 首醫인 강명길도 <籌科>에 합격하여 典醫를 했다. 이와 같이 醫科出身 이외에 醫官들도 많았다. 따라서 <古新聞>에 韓醫師단체의 幹部로 활동하지 않은 醫官이나 韓醫師들은 아주 많을 것이다.
日帝의 끊임없는 수탈에 한의사들의 抗拒노력은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 洋醫師들이 醫學講習所를 日帝時代에 만들고 이들이 다시 醫專으로 승격되고, 이것이 大學, 醫科大學으로 발전되었다.
韓醫師들도 이와 비슷하게 30年代末 기존의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인 大邱 等地에서 이들 과정을 통해 기한이 정해진(3年 更新) 醫生이 다시 나오기도 하였다.
韓醫學의 말살정책과 日帝의 간섭으로 때로는 韓醫師단체가 내분을 겪었지만 끊임없는 노력의 일환으로 내부 自生力을 발전시켜 合心하여 110年間을 외압에 항거하여 오늘날까지 <韓醫師團體>를 만들어 관련제도를 지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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