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 수용 여부보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응용하는가의 방법론과 전략 중요
『解體新書』는 한문으로 번역, 총 4권과 해부도가 실린 부록 1권으로 1774년에 출간
『解體新書』의 간행은 단지 의학분야 뿐만 아니라 지식인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 큰 영향 줘

근세까지 한의학 역사 속에 나타난 해부학 관련 내용들을 마무리하면서 본고에서는 마지막으로 일본 근세를 중심으로 해부학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일본이 당시에 동양 삼국 중에서 동서양 학문의 교류가 가장 활발하였고, 결과적으로 서양학문을 바탕으로 한 서구화, 산업화를 추구하여 제국주의까지 이어진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 漢方(Kampo)의학이 해부학 수용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태도와 그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지와라 쇼젠(梶原性全)이 지은 『頓醫抄』(1304년,50권)와 『萬安方』(1316년, 62권) 속에 송대의 歐希範五
臟圖와 存眞圖로부터 이어지는 五臟圖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전 기고문에서 상세히 소개하였다. 이들 서
적은 모두 금원시대까지의 의학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으로 『頓醫抄』는 쉬운 일본 문자로 쓰여져 민간 의료에
편리하도록 저술이 되었고, 『萬安方』은 한문으로 쓰여져 집안에서 전수하도록 작성되었다. 『頓醫抄』의 제43,
44권 「五藏六府形幷十二經脈圖正面內相圖」를 보면 정면도, 배면도 이외에 心과 肺 및 五臟과 心의 관계도가
추가되어 있고 水穀이 나누어지는 것과 남녀의 소변 길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들 의서가 역사적으로 비교적 이
른 시기임에도 중국와 한국의 다른 의서와 달리 五臟圖를 상세히 싣고 있다는 점에서, 해부에 대하여 비교적 개
방적인 일본 의학 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일본은 오랜 정치적 혼란기를 지나 에도시대 중기 이후에 사회가 안정되면서 문화와 학문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18세기 후반 야마와키 토요(山脇東洋:1705~1762)가 1754년에 교토 所司代 酒井忠用의 公許를 얻어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여 1759년 『臟志』로 출간하였다. 여기에 剝胸腹圖, 九藏前面圖, 九藏後面圖, 脊骨側面圖 등 4장의 해부도가 포함되어 있다. 야마와키 토요는 처음에 後世派에서 수학하였으나 철학자인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와 古方派인 고토 콘잔(後藤艮山) 등의 영향을 받아 실증적인 고방파로 선회하였다. 야마와키 토요는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蘭學의 해부학 서적을 읽고 평소에 의심을 가졌던 臟象論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아 해부를 시행하게 되는데, 이때 참고한 서적은 독일인 요한 웨스링(JohanVesling, 1598-1649)이 라틴어로 저술한 『SyntagmaAnatomicu』를 다시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18세기 당시 일본 한방의 주류였던 古方派는 요시마스 토도(吉益東洞)에 이르러 임상의 실증적인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열고 있었는데, 古方派에 속했던 야마와키 토요가 실제 해부를 통하여 고증주의로 선회한 것은 특이할 만하다. 臟志 출간은 후일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의 『解體新書』 간행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야마와키 토요의 『臟志』 간행은 당시 古方派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사노 야스사다(佐野安貞)는 1760년에 『非藏志』를 지어 『藏志』를 정면으로 비판하게 된다. 사노 야스사다는 藏이 藏일 수 있는 것은 形象 때문이 아니라 神氣를 저장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神이 사라지고 氣가 흩어지면 藏은 빈 그릇이 된다고 주장하고, 야마와키 토요처럼 三部九候나 經絡兪穴을 부정한다면 과연 어떻게 진단할 것인지 반문하였다. 또한 『藏志』에서 척추가 17개라고 하였지만, 자신이 관찰한 결과 「內經」에서 말한 것처럼 21개라고 반박하였다. 당시 일본 漢方의 주류인 古方派가 비록 실증적인 진단법과 약물치료를 바탕으로 萬病一毒說, 氣血水 이론 등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傷寒論』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치료를 고수하였으므로, 『藏志』의 간행에 반발하여 이러한 논쟁이 발생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臟志』 이후 카와구치 신닌(河口信任)이 1770년에 역시 막부의 허가를 받아 공식적인 두 번째 해부를 시행하고 이를 기록하여 1772년에 『解屍編』을 간행하였다. 『臟志』와의 차이점은 머리 부분을 추가로 해부하였으며 전체적으로 그림의 장수가 23개로 늘어나 내용이 상세해졌고 과거의 학설들과 비교하여 시비를 가려서 기록한 점이다. 이후 19세기 초까지 18~19차례에 걸쳐 사형수를 대상으로 한 해부가 매우 빈번하게 시행되었는데, 이는 蘭學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서양학문 도입이 당시 일본 사회의 경향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의학계에서는 해부를 통하여 서양의학의 정착을 선점하려는 막부 및 의학자들 사이의 경쟁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蘭學을 그래도 기존의 전통에 기반하여 수용하려던 차원을 넘어서, 원형 그대로 도입하여 이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바로 『解體新書』의 간행(1774년)이다. 『解體新書』는 독일의 요한 아담 쿨무스(Johann Adam Kulmus,1689-1745)가 1722년에 지은 A n a t o m i s c h e Tabellen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등이 번역한 해부학 서적이다. 스기타 겐파쿠는 마에노 류타쿠(前野良澤),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 등과 1771년에 에도에서 이루어진 사형수 시체의 해부를 참관하고 나서 쿨무스의 책을 번역하기로 뜻을 모으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한문으로 번역하여 총 4권과 해부도가 실린 부록 1권으로 1774년에 출간되었다. 『解體新書』는 쿨무스의 책뿐만 아니라 다른 해부학서의 내용도 추가하였고, 神經, 軟骨, 門脈 등의 용어도 이때 만들어졌는데, 神經의 경우 神氣의 神과 經脈의 經을 따서 조합한 말이다. 『解體新書』의 간행은 단지 의학분야 뿐만 아니라 지식인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蘭學이 일본에 이식되었으며 이후 蘭學은 곧 洋學으로 발전하게 된다. 역사학자들이 『解體新書』의 간행을 蘭學 유행의 시작점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일본에서는 『解體新書』를 보완 확충하거나 요약한 책들이 출간되었으며, 메이지유신 전후로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해부학과 생리학을 결합한 의학 교재들이 많이 편찬되었다.
일본 근세 해부학의 도입은 곧 서양의학의 도입을 의미하였으며, 전통적인 당시 한방(Kampo) 의사들 중에는 적
극적으로 이를 수용하여 절충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청말의 중서회통파인 唐宗海가 『中西滙通醫經精義』에서 서양의학의 생리해부도설을 소개하고 王淸任과 서양 해부학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전체적으로 미미하였으며, 일본의 경우에는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메이지유신
이후, 오히려 해부학 지식이 일반에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임상 활용에서는 해부학을 통한 동서의학의 절충은 오히려 그 영역이 줄어들었다. 이는 곧 해부학적 지식이 교양적으로는 수용되었으나 그 임상응용은 쉽지 않았음 을 보여주며, 특히 일본의 경우에서는 한방(Kampo)의 해부학 수용이 곧바로 한의학의 발전이나 지위 향상과 직결되지 않았음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즉, 해부학의 수용 여부보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응용하는가의 방법론과 전략이 중요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解體新書』는 한문으로 번역, 총 4권과 해부도가 실린 부록 1권으로 1774년에 출간
『解體新書』의 간행은 단지 의학분야 뿐만 아니라 지식인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 큰 영향 줘

근세까지 한의학 역사 속에 나타난 해부학 관련 내용들을 마무리하면서 본고에서는 마지막으로 일본 근세를 중심으로 해부학이 어떻게 수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일본이 당시에 동양 삼국 중에서 동서양 학문의 교류가 가장 활발하였고, 결과적으로 서양학문을 바탕으로 한 서구화, 산업화를 추구하여 제국주의까지 이어진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 漢方(Kampo)의학이 해부학 수용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태도와 그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카지와라 쇼젠(梶原性全)이 지은 『頓醫抄』(1304년,50권)와 『萬安方』(1316년, 62권) 속에 송대의 歐希範五
臟圖와 存眞圖로부터 이어지는 五臟圖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전 기고문에서 상세히 소개하였다. 이들 서
적은 모두 금원시대까지의 의학을 종합하여 정리한 것으로 『頓醫抄』는 쉬운 일본 문자로 쓰여져 민간 의료에
편리하도록 저술이 되었고, 『萬安方』은 한문으로 쓰여져 집안에서 전수하도록 작성되었다. 『頓醫抄』의 제43,
44권 「五藏六府形幷十二經脈圖正面內相圖」를 보면 정면도, 배면도 이외에 心과 肺 및 五臟과 心의 관계도가
추가되어 있고 水穀이 나누어지는 것과 남녀의 소변 길에 대한 설명이 있다. 이들 의서가 역사적으로 비교적 이
른 시기임에도 중국와 한국의 다른 의서와 달리 五臟圖를 상세히 싣고 있다는 점에서, 해부에 대하여 비교적 개
방적인 일본 의학 문화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후 일본은 오랜 정치적 혼란기를 지나 에도시대 중기 이후에 사회가 안정되면서 문화와 학문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18세기 후반 야마와키 토요(山脇東洋:1705~1762)가 1754년에 교토 所司代 酒井忠用의 公許를 얻어 사형수의 시체를 해부하고, 그 내용을 기록하여 1759년 『臟志』로 출간하였다. 여기에 剝胸腹圖, 九藏前面圖, 九藏後面圖, 脊骨側面圖 등 4장의 해부도가 포함되어 있다. 야마와키 토요는 처음에 後世派에서 수학하였으나 철학자인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와 古方派인 고토 콘잔(後藤艮山) 등의 영향을 받아 실증적인 고방파로 선회하였다. 야마와키 토요는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蘭學의 해부학 서적을 읽고 평소에 의심을 가졌던 臟象論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아 해부를 시행하게 되는데, 이때 참고한 서적은 독일인 요한 웨스링(JohanVesling, 1598-1649)이 라틴어로 저술한 『SyntagmaAnatomicu』를 다시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18세기 당시 일본 한방의 주류였던 古方派는 요시마스 토도(吉益東洞)에 이르러 임상의 실증적인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열고 있었는데, 古方派에 속했던 야마와키 토요가 실제 해부를 통하여 고증주의로 선회한 것은 특이할 만하다. 臟志 출간은 후일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의 『解體新書』 간행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야마와키 토요의 『臟志』 간행은 당시 古方派에 충격적인 사건이었는데, 사노 야스사다(佐野安貞)는 1760년에 『非藏志』를 지어 『藏志』를 정면으로 비판하게 된다. 사노 야스사다는 藏이 藏일 수 있는 것은 形象 때문이 아니라 神氣를 저장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神이 사라지고 氣가 흩어지면 藏은 빈 그릇이 된다고 주장하고, 야마와키 토요처럼 三部九候나 經絡兪穴을 부정한다면 과연 어떻게 진단할 것인지 반문하였다. 또한 『藏志』에서 척추가 17개라고 하였지만, 자신이 관찰한 결과 「內經」에서 말한 것처럼 21개라고 반박하였다. 당시 일본 漢方의 주류인 古方派가 비록 실증적인 진단법과 약물치료를 바탕으로 萬病一毒說, 氣血水 이론 등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傷寒論』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치료를 고수하였으므로, 『藏志』의 간행에 반발하여 이러한 논쟁이 발생한 것은 당연해 보인다.
『臟志』 이후 카와구치 신닌(河口信任)이 1770년에 역시 막부의 허가를 받아 공식적인 두 번째 해부를 시행하고 이를 기록하여 1772년에 『解屍編』을 간행하였다. 『臟志』와의 차이점은 머리 부분을 추가로 해부하였으며 전체적으로 그림의 장수가 23개로 늘어나 내용이 상세해졌고 과거의 학설들과 비교하여 시비를 가려서 기록한 점이다. 이후 19세기 초까지 18~19차례에 걸쳐 사형수를 대상으로 한 해부가 매우 빈번하게 시행되었는데, 이는 蘭學으로부터 시작된 새로운 서양학문 도입이 당시 일본 사회의 경향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의학계에서는 해부를 통하여 서양의학의 정착을 선점하려는 막부 및 의학자들 사이의 경쟁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蘭學을 그래도 기존의 전통에 기반하여 수용하려던 차원을 넘어서, 원형 그대로 도입하여 이식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는데 바로 『解體新書』의 간행(1774년)이다. 『解體新書』는 독일의 요한 아담 쿨무스(Johann Adam Kulmus,1689-1745)가 1722년에 지은 A n a t o m i s c h e Tabellen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을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등이 번역한 해부학 서적이다. 스기타 겐파쿠는 마에노 류타쿠(前野良澤),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 등과 1771년에 에도에서 이루어진 사형수 시체의 해부를 참관하고 나서 쿨무스의 책을 번역하기로 뜻을 모으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이후 한문으로 번역하여 총 4권과 해부도가 실린 부록 1권으로 1774년에 출간되었다. 『解體新書』는 쿨무스의 책뿐만 아니라 다른 해부학서의 내용도 추가하였고, 神經, 軟骨, 門脈 등의 용어도 이때 만들어졌는데, 神經의 경우 神氣의 神과 經脈의 經을 따서 조합한 말이다. 『解體新書』의 간행은 단지 의학분야 뿐만 아니라 지식인을 포함한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蘭學이 일본에 이식되었으며 이후 蘭學은 곧 洋學으로 발전하게 된다. 역사학자들이 『解體新書』의 간행을 蘭學 유행의 시작점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일본에서는 『解體新書』를 보완 확충하거나 요약한 책들이 출간되었으며, 메이지유신 전후로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해부학과 생리학을 결합한 의학 교재들이 많이 편찬되었다.
일본 근세 해부학의 도입은 곧 서양의학의 도입을 의미하였으며, 전통적인 당시 한방(Kampo) 의사들 중에는 적
극적으로 이를 수용하여 절충하려는 사람도 있었다. 이는 청말의 중서회통파인 唐宗海가 『中西滙通醫經精義』에서 서양의학의 생리해부도설을 소개하고 王淸任과 서양 해부학은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고 말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전체적으로 미미하였으며, 일본의 경우에는 서양의학이 본격적으로 도입된 메이지유신
이후, 오히려 해부학 지식이 일반에 퍼졌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임상 활용에서는 해부학을 통한 동서의학의 절충은 오히려 그 영역이 줄어들었다. 이는 곧 해부학적 지식이 교양적으로는 수용되었으나 그 임상응용은 쉽지 않았음 을 보여주며, 특히 일본의 경우에서는 한방(Kampo)의 해부학 수용이 곧바로 한의학의 발전이나 지위 향상과 직결되지 않았음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즉, 해부학의 수용 여부보다 어떻게 받아들이고 응용하는가의 방법론과 전략이 중요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많이 본 뉴스
- 1 정부, 사업자용 간편인증 도입…홈택스 등 공공사이트에 적용
- 2 “경혈마취, 경혈 개념-통증 조절 기전의 유기적 연결”
- 3 ’25년 직장가입자 건보료 연말정산…1035만명 추가 납부
- 4 중동전쟁 여파 의료용품 수급 대란···정부와 긴밀 대처
- 5 ‘생맥산가감방’, 동맥경직도 유의 개선…“심혈관 신약화 가능성 시사”
- 6 대마, 의약·산업 활용 입법 재개…기능성 성분 CBD 중심 재분류 추진
- 7 “추나요법, X-ray와 만나다”
- 8 “지난해 케데헌 열풍, 올해는 K-MEX가 잇는다”
- 9 세계인들은 한의약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⑤
- 10 ‘한의난임치료’에 약제비·검사까지 무제한 지원…제도권 진입 전환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