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현민 대한한의사협회 기획이사
[한의신문] 대한민국 보건의료체계는 지금 거대한 변곡점에 서 있다.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안에 의료환경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고령화 속도가 예상을 웃돌며 치매, 심뇌혈관질환, 당뇨, 고혈압 등 만성질환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급성·감염병 중심에서 만성·복합질환 중심으로 질환 구조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 변화는 곧바로 국가 재정 위기로 이어진다. 1977년 도입된 국민건강보험은 국민의 건강권을 지켜온 제도지만, 지금과 같은 의료비 증가세라면 2030년 전후 고갈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는 보건사회연구원, 국민건강보험공단, 국회 예산정책처 등 다수 기관의 공통된 경고다.
재정 고갈은 곧 ‘보험료를 내도 필요한 시점에 치료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뜻한다.
이미 필수의료 영역은 인력 부족으로 위기에 처했고, 지방의료는 붕괴 직전이다. 수도권 대형병원으로의 환자 쏠림은 갈수록 심화되며 지역·계층 간 격차가 커지고 있다.
정부도 필수의료 특별법, 일차의료 강화, 통합돌봄 체계 구축 등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환자에게 돌아오는 실질적 효과다. 병이 낫지 않고 재정만 소모된다면 제도는 실패다. 지금 대한민국은 저비용·고효율 체계를 구축할 것인지, 아니면 비효율 속에 침몰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한다.
치료 대신 ‘전전(輾轉)’…쌓이는 환자 절망
의료 현장은 제도의 비효율성을 그대로 보여준다. ‘병원 쇼핑’은 과장이 아니라 환자들의 일상이다.
불면증 환자 A씨는 내과, 정신건강의학과, 이비인후과, 신경과, 대학병원까지 전전하며 수면검사까지 받았지만 여전히 잠들지 못한다.
또 난임 부부 B씨는 수천만 원을 들여 여러 차례 체외수정을 시도했지만 임신에 실패했으며, 무엇보다 시간의 손실이 두렵다.
만성 소화불량 환자 C씨는 내시경, CT, 알레르기 검사까지 받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한 채 고통을 반복한다.
치매 초기 환자 D씨는 약물 외 대안이 없고, 자녀들은 병원 동행으로 경제·시간적 생산성을 잃는다.
정신과 치료 환자 E씨는 약물 부작용과 장기 복용의 불안 속에서 “끊자니 불안, 먹자니 두렵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들은 결국 같은 질문을 한다. “왜 치료가 안 될까요?” 해결되지 못한 환자군이 병원 쇼핑의 주요 대상이 되고, 이들의 좌절은 사회적 불안으로 확산된다.

경제에 치우친 의료 현주소 ‘병원 쇼핑’
병원 쇼핑은 환자의 고통을 넘어 재정 낭비로 이어진다.
① 불면증 환자: 연평균 진료비는 약 83만원이지만 내시경·MRI·수면검사 등으로 비용은 불어난다. 하지만 호전도는 미미하다.
② 난임시술: 체외수정 1회 비용은 400만~1000만원, 성공률은 출산까지 고려하면 약 18%. 다섯 차례 반복하면 수천만 원이 들지만 결과는 불확실하다. 이는 개인의 좌절을 넘어 국가적 저출산 위기로 이어진다.
③ 당뇨 합병증: 혈액투석 환자 1인당 연간 진료비는 2200만~2900만원. 조기 관리로 막을 수 있었던 비용이지만 현 체계는 고비용 치료에 재정을 투입한다.
반면 한의진료는 국민건강보험 총진료비의 2%대에 불과함에도 불면·난임·만성 소화기질환 등 대형병원이 풀지 못한 환자군을 담당한다.
저비용으로 환자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제도 안에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법과 제도에도 드리운 ‘현장 불균형’의 그림자
현재 국회에서 의료체계 개선을 위한 법안들이 활발히 논의되고 있으나 이러한 현장의 문제는 그대로 제도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먼저 ‘필수의료 특별법’은 특정 직역 중심으로 설계돼 다양한 인력이 참여하지 못하는 한계점이 있다.
‘국립대병원 설치법’은 한의과 설치 의무 조항이 없어 국민의 선택권을 제한하며, 국립중앙의료원 또한 고비용 환자군을 다루는 한방진료부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다.
첨단의료·디지털 헬스 관련 법제는 한의진료와 데이터를 반영하지 않아 소외 위험이 크다.
아울러 보훈의료에서도 한의진료는 거의 배제돼 형평성과 효율성이 저해된다.
이처럼 국민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저비용·고효율 자원은 제도 논의에서 구조적으로 배제돼 있다.
이는 단순한 직역 갈등이 아닌 국가 재정과 국민 건강권을 위협하는 근본 원인이다. 국민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구조라면 어떤 직역이든 제도에 반영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