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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속에서 꽃핀 솔표 우황청심원‘솔표 우황청심원’. 한때 집집마다 상비약처럼 두고 먹을 정도로 국민들에게 친숙했던 이 한약의 역사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하나 숨어 있다. 솔표 우황청심원을 개발한 조선무약의 창립자 박성수(朴性洙, 1897~1989) 선생이 한의사이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어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에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독립운동가들의 기밀문서를 전달했던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 스물세 살의 일송(一松) 박성수 선생은 한성약업사와 대창약업사를 창업하며 약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약업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일이었다. 같은 해 9월 박성수 선생은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실로 일제에 체포됐다. 결국 1년 1개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에도 그의 삶에서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박성수 선생은 다시 약업에 종사하며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고, 약재와 함께 독립운동가들이 주고받는 기밀문서도 그의 손을 통해 전국 각지로 전달됐다. 일제의 감시가 이어지던 시절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연락을 주고받고 정보를 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전국 각지를 오가야 하는 약재 유통은 사람과 사람을 연결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었고, 박성수 선생은 자신의 생업을 독립운동을 돕는 데 활용했다. 한약재를 싣고 전국을 오가는 길이 독립운동가들의 소식을 잇는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의 편지를 나르던 한의사, 조선무약을 세우다 그렇게 약재를 나르고 독립운동가들의 편지를 전달하던 박성수 선생은 1925년 조선무약합자회사를 설립했고, 이후 조선무약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한약 제약회사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으며 ‘솔표’라는 상표 역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리고 박성수 선생은 조선무약을 통해 ‘솔표 우황청심원’과 위장약 ‘위청수’ 등 다양한 한약을 개발했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보면 ‘솔표 우황청심원’과 독립운동은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 <1991년도 방영됐던 TV 광고 속 우황청심원> 하지만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돼 1년 1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에도 한약재 사이에 독립운동가들의 편지를 함께 싣고 전국을 누볐던 한의사가 세운 회사에서 탄생한 한약이라는 특별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박성수 선생에게 한의약은 단순한 생업만은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을 이어주는 수단이었고, 이후에는 우리 한약을 산업화하는 토대가 됐다. 열혈 독립운동 한의사, 광복 후 한의학 지키는 일에 나서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나라를 되찾는 데 힘을 보탰던 박성수 선생은, 광복 이후에는 일제의 탄압으로 약화된 한의학과 한의사제도를 지키는 일에 나섰다. 박성수 선생은 한의사협회 결성에 참여하고 대한한의사협회 제3·4대 회장을 역임했다. 특히 1960년대 한의사제도를 둘러싼 존폐 논란 속에서 한의사제도를 지키고 한의사의 법적 지위를 확보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한한의사협회 초창기 회장단에 이어진 독립운동의 인연 대한한의사협회의 초창기를 이끌었던 회장들의 삶에도 독립운동이라는 특별한 인연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1·2대 이우룡 회장은 만주에서 민족교육을 펼치다 일제에 체포돼 징역 2년의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 이원발 선생의 아들이었고, 뒤를 이어 제3·4대 회장을 맡은 박성수 회장은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해 1년 1개월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였다. 독립운동가들의 편지를 나르던 한의사가 만든 ‘솔표 우황청심원’, 그리고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이 이끌었던 대한한의사협회. 한의사들은 민족의학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직접 행동했음을 보여주는 역사의 한 단면이다. -
“한의약계 독립운동, 민족적 대의인 동시에 삶의 현장서 펼친 생존투쟁”[편집자주] 오는 15일 ‘79주년 광복절’을 맞이하는 가운데 본란에서는 ‘한국의사학회지’에 게재된 ‘일제강점기 한의약계 독립운동 유형과 특징(박경목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이란 제하의 논문을 통해 한의약계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특징을 알아본다. 이 논문에서는 한의학을 익힌 한의사와 한약재를 취급하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펼친 독립운동에 주목, 일제강점의 현실을 타개하려 했던 그들에 대해 각종 통계를 통해 객관화된 데이터를 도출하고 있다. 이를 위해 국가기록원에 소장돼 있는 독립운동가 판결문을 활용, 판결문 내 직업 표기에 의생(한의사)을 비롯해 매약상·매약행상, 한약종상·약종상, 의업, 침술업, 침의 등 한의약계 종사자로 판단되는 인물을 검색했다. 판결문 이외에도 수형기록카드와 일제측 경무국 보고서 및 기타 인물 자료 등도 함께 참조했다. 이같은 자료를 기초로 이 글에서는 한의약계에서 독립운동 전선에 나섰던 인사들의 △직업별 △출신 지역별 △연령대별 △운동계열별 △죄명별 △형량별 통계를 추출해 데이터화해 분석해 참여군의 특징 및 독립운동 유형을 객관적으로 파악코자 했으며, 더불어 독립유공자 및 수형기록카드 데이터와의 비교·분석을 통해 한의약계 독립운동의 특징을 제시했다. 집단적 대중투쟁보단 개인투쟁 및 장기적·계획적 투쟁 진행 우선 한의약계 인사 중 판결문을 통해 세부 직업이 확인되는 인물은 112명으로, △약종상(36명·32.14%) △한의사(33명·29.46%) △매약상(30명·26.79%) 등의 순이었다. 한의약계 종사자의 경우 매일 매일 대중과 직면하는 사람들로, 한의사는 의술을 일반에게 직접 시술하고, 매약상과 약종상은 약재를 취급하면서 면·군 단위, 크게는 도·전국 단위, 해외와의 거래로 활동 폭이 넓은직업이다. 즉 삶의 현장과 맞닿아 있는 그들은 일제강점기 겪었던 한국민의 현실과 민족적 차별을 매일 매일 체감했으며, 이들이 나섰던 독립운동은 민족적 대의인 동시에 삶의 현장에서 펼친 생존투쟁이라 할 것이다. 또한 나이의 경우에는 10대가 3명으로 극소수인 반면 20∼60대에 걸쳐 고르게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장기간 숙련이 필요한 한의사라는 직업의 특수성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되며, 더불어 5, 60대의 독립운동 참여비율이 다른 직능에 비해 높다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다. 운동계열은 △국내 항일(61명) △3·1운동(45명) △만주 방면(23명) △의병(16명) 등의 순으로, 독립유공자 1만7748명의 운동계열과 유사한 분포율을 보인 가운데 국내 항일 계열이 19.98% 높아 상대적으로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비율이 높았던 특징이 있다. 또한 의열투쟁의 경우에는 한의약계의 참여 수치는 적지만, 독립유공자 그룹과의 비교 비율에서 2.31% 높게 나타나, 투쟁 방법에 있어 직접적인 타격형 투쟁의 비율이 높고, 집단적 대중투쟁보다는 개인투쟁과 장기적·계획적 투쟁 방식을 선택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즉 이 글에서는 한의약계의 운동계열의 특징을 △국내 항일과 3·1운동, 만주 방면 계열에서의 참여 활발 △독립유공자와 비교시 국내 항일과 의열투쟁 분야에서의 참여율이 높음 △3·1운동과 같은 대중투쟁보다는 개별투쟁 및 장기적·계획적 투쟁의 참여 비율이 높음 등으로 분석했다. 한의약계 인사들, 민족주의 노선 ‘견지’ 또한 운동노선에서는 총 19가지로 세분화한 가운데 3·1운동의 참여가 45명(27.44%)로 가장 높았고, 뒤를 이어 ‘독립운동단체에서 활동’ 33명(20.12%), ‘의병’ 16명(9.74%), ‘민족종교 운동’ 12명(7.32%) 등의 순이었다. 이중 독립운동단체의 참여율은 대한독립애국단과 노인동맹단, 대동청년당 등의 참여가 두드러진다. 대한독립애국단에는 나병규·문봉의·조종대·이연수·이기헌이, 노인동맹단에는 강우규·김치보·안태순이, 또 대동청년단에는 김관제·민강 등 한의약계 인사가 참여하고 있다. 이와 함께 죄명은 △보안법(45명, 34.35%) △대정8년 제령 제7호(29명, 22.14%) △치안유지법(15명, 11.45%) △모살미수(8명, 6.11%) 등의 순으로 나타나 3·1운동 참여자 비율이 높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특징적인 부분으로 1925년 5월 치안유지법 공포 이후의 수감 비율이 낮았다는 점과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운동노선이 적었다는 점이다. 이는 한의약계 인물들 대부분이 민족주의 성향이라는 점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한의약계 인사들은 전통적 의학을 수학해 공산주의보다는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형량의 경우에는 징역 5년형을 기준으로 그 이상의 형량이 수형기록카드 기록 인물보다 비율이 높고, 그 이하는 낮았다. 이는 비교대상에 비해 한의약계 인사들이 상대적으로 적극적인 투쟁을 벌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 가운데 조종대, 나병규, 강우규, 김병록 및 3·1운동에 참여한 고익진, 김보곤, 신선명, 이가순, 이윤석, 이중혁, 정광순 등 기독계열의 인사와 변태우 등 천주교 신자가 한의약계에 포진해 있었다. 더불어 한의약 종사자로 이동과 회합 및 한약방 운영이라는 이점을 활용, 독립운동을 전개한 경우도 있다. 실제 유경집·김치보는 자신이 경영하는 한약방을 연락 거점이나 자금 수합의 거점으로 활용했고, 민강·박성수·이원직 등은 한의사 또는 약종상이라는 직업의 이점을 활용해 문서 배포, 군자금 모집을 전개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한의약 종사자라는 직업적 특성 적극 활용 이밖에도 민족종교 운동도 두드러지는데, 흠치교·청림교·태을교·무극대도·선도교·정도교·증산교·태극교 등의 종교에 입교해 12명의 인사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들 인사들은 주로 ‘치성금’의 형태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종교적 신념을 독립운동과 연계해 포교 활동에 주력했다. 이같은 사례는 한의약계가 사회주의·공산주의 노선보다 민족주의 노선에 치중된 양상을 보이는 이유 중의 하나다. “한의약계의 독립운동은 직업의 특성을 활용해 다양성, 직접적 타격, 민족주의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고 밝힌 박경목 교수는 “우선 일본군과 직접 교전하거나 고위 관리, 친일파 처단, 일제 주요 기관에 타격을 입히는 격렬한 투쟁 방략을 택했다”며 “또한 장기적·계획적 투쟁을 전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상응하는 전략을 취하면서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거나 민족종교 운동 등 지속적인 투쟁을 해나갔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국내·외에서 한약방이라는 거점을 통해, 그리고 한의사라는 직업적 특징을 적극 활용해 사람을 모으고, 독립운동의 연락 본부 및 자금 조달 역할에 주력할 수 있었다”며 “더불어 전통의학·기독교·민족종교 등 민족주의 노선의 흐름이 강하게 나타나며,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노선의 비중이 낮은 것도 특징이다”라고 덧붙였다. 특히 박 교수는 “이번 논문에서 분석한 164명 가운데 독립유공자로 서훈받은 인물은 총 93명(56.71%)으로, 나머지 약 43%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면서 “앞으로 적극적인 자료 발굴과 연구를 통해 한의약계의 독립운동이 한국 독립운동사의 한 분야로 조명되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
서울시회 창립 70주년 기념식 “한의학의 성공과 발전 다짐”‘한의의 미래, 의료의 미래, 국민의 미래, 다양하고 자유로운 한의학!’을 슬로건으로 한의학의 성공과 발전을 추구하는 서울특별시한의사회의 새로운 전진이 시작됐다. 서울특별시한의사회(회장 박성우)는 18일 역대 명예회장단 및 임직원을 비롯한 많은 회원들과 각계각층의 내빈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코엑스 아셈볼룸에서 창립 70주년 기념식을 개최, 한의학 육성을 위한 새로운 도약을 다짐했다. 서울시한의사회는 1953년 5월 29일 창립총회를 통해 박성수 초대회장을 선출함으로써 첫 출범한 이후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한 끝에 현재는 26개의 분회와 4000여개의 한의원, 100여개의 한방병원, 40여개의 요양병원 등 4000개소 이상의 한의의료기관과 6500여명의 회원이 함께하는 전국 최대 지부로 발돋움했다. 전국 16개 지부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서울시한의사회는 의성 허준 선생의 인술제민 정신을 바탕으로 서울시민의 건강 보호 및 증진에 앞장서 오고 있는 것은 물론 한의사의 권익 신장을 위한 핵심 지부로 자리매김한 가운데 한의계의 변화와 개혁을 선도해 오고 있다. 박성우 회장은 이날 인사말을 통해 “그동안 서울시한의사회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돌아봄으로써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그에 걸맞는 비전을 선포하는 뜻깊은 시간을 마련했다”면서 “창립 70주년 기념식을 기점으로 서울시한의사회는 대한민국의 의료인으로서 국민의 건강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강조했다. 홍주의 대한한의사협회장은 격려사를 통해 “초음파 진단기기, 뇌파계, 엑스레이 골밀도측정기 등과 관련된 소송에서 정의로운 판결이 잇따라 내려짐으로써 올 초에 약속드렸던 것처럼 2023년이 한의약 재도약의 원년을 이루게 됐다”면서 “현대 의료기기의 활발한 사용은 물론 한의의료의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에도 전심전력을 다해 확실한 한의약 발전의 토대를 만들어 내겠다”고 밝혔다. 김관용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은 축사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가 이념, 지역, 세대, 성별 간 갈등과 대립이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가 서로 간 갈라져 불안의 시대를 걷고 있는 이 때, 이 같은 현상을 한의사들이 앞장서 치유하고, 통합해 주시길 당부드린다”고 말했다. 조희연 서울특별시교육청 교육감은 “2015년부터 지난 8년 동안 한의사 분들이 교의 사업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굉장히 큰 도움을 받고 있으며, 이에 대해 깊이 감사드린다”면서 “한의학이 계속 발전을 이뤄서 다음 100주년 기념식 때도 건강한 축하객으로 참석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고 강조했다. 강선우 국회의원(서울 강서구갑)은 “우리의 전통의학인 한의약이 기존의학과는 달리 조금 따뜻한 결로 돌봄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학문이기에 우리나라 국민의 건강을 잘 챙겨주실 것을 믿고 있으며, 국회 보건복지위원으로서 한의약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입법 사항과 정책 사항들을 세심히 살펴보겠다”고 전했다. 김병민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한의사 선배의 도움을 받아 한의약으로 아이들 세 명을 건강하게 키우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한의계의 고충을 많이 듣고, 함께 고민하고 있는 만큼 정부 여당에서도 한의약의 발전을 위해 한층 더 도울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서는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김선동 국민의힘 서울특별시당 위원장은 “지금 전 세계적으로 한류의 붐이 일고 있는데, 앞으로 K-메디신이 열어가야 할 분야도 세계화이며, 이에 한의의료가 인류의 건강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날이 여러분들의 손에 의해 기필코 이뤄지길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또한 오세훈 서울특별시장,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유경준 국민의힘 국회의원 등이 영상 축사를 보내왔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많은 정계 인사들이 축전을 통해 서울시한의사회의 창립 70주년을 축하했다. 특히 이정진 배우와 이진희 아나운서의 사회아래 진행된 창립 70주년 기념식에서는 한의학 발전을 위해 핵심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서울시한의사회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조명하면서더 밝은 미래로 도약하고자하는 내용을 담은 특별 영상이 상영돼 눈길을 끌었다. 기념식에서는 또 TV드라마 <허준>에서 허준 역할을 맡아 열연했던 전광렬 배우에게 한의학 발전에 공헌한 감사의 표시로 공로패를 증정했으며, 박애리 국악 명창을 서울시한의사회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이에 박애리 명창은 “소리 공부를 하다보면 다양한 분야에서 한의의료와 한약재를 다루고 있어 늘 한의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어왔다”면서 “서울시한의사회 홍보대사로서 한의학의 중요성을 널리 전파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박성우 회장은 서울시한의사회 70주년을 기념하는 선포식 세레모니를 통해 영유아, 아동청소년, 청년, 출산보육, 중장년, 노년 등 서울시형 생애주기별 한의약 건강관리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 서울시민의 건강지킴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겠다는 다짐을 대내외에 천명해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편 이날 행사에서는 다양한 계층의 서울시민들과 김대희, 오나미, 박나래, 김민경, 김지민, 김준호, 박영진, 박소영, 한윤서 등 개그맨 및 이영표 전 국가대표 축구선수, 김동현 전 이종격투기선수 등이 서울시한의사회의 발전을 응원하는 영상 메시지 소개와 함께 왕기철·왕기석 국악 명창, K판과 자스민 국악 영재, 김우경 성악가(한양대 음대 교수), 박애리 국악 명창 등이 축하 공연을 통해 서울시한의사회의 힘찬 웅비를 기원했다. -
일제 치하 전국에 약재 나른 사업가·한의사, 박성수본란에서는 광복 77주년을 맞아 독립운동 한의사들의 삶을 조명하고 의미를 되새겨 본다.[편집자주] “나라 망한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이여. 오늘 일은 하늘을 향해 통곡하고 살아서 살고 싶어도 살고 죽고 죽어도 죽고. 지난 백 년 동안 누가 죽을 수 있을까? 어쩌면 생명의 선을 위해 싸웠고, 죽음을 위해 생명의 선을 위해 살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동포 2천만 명은 근거도 없이 죽었다.” 1919년 기미독립만세 운동에 참여, 10개월 간 감옥에 수감됐던 기업가이자 교육자, 한의사인 박성수 선생이 쓴 시다. 독립운동이 투철했던 그의 시에는 망국의 설움에 대한 감회가 베어 있다. 문집으로 ‘일송문고(一松文稿)’ 4권이 있다. 권1에는 시(詩), 권2에는 문장(文章), 권3에는 잡저(雜著), 권5에는 연보(年譜) 등이 실려 있다. ◇생애 초기 1897년 8월 12일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일송(一松) 박성수는 유교가문에서 성장했고 일제강점기 식민교육을 시행하는 학교교육을 받는 것에 반대했던 선친의 뜻을 따라 13세부터 어머니 전씨(全氏)에게서 한학(漢學)의 기초를 배웠다. 이후 한의사 이상열(李相烈)에게 한의학을 배웠고, 경성한의약전수학원(京城漢醫藥傳受學院)을 졸업했다. 24세가 되던 1920년 한성약업사 및 대창창업사를 창업했으나, 이해 9월 독립자금과 밀서를 전달하며 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했다. 방방곡곡에 약재를 나르며 독립운동가들의 편지를 함께 전달했다. 이 때문에 1년 1개월간 감옥에 수감됐고 혹독한 고문 끝에 간신히 살아 나왔다. ◇솔표 우황청심원의 탄생 1925년 감옥에서 나온 뒤 그는 약업에 전념하며 또 다른 회사를 창업했다. “우리나라의 건강은 우리가 지킨다”라는 신념으로 한의학의 현대화를 목표로 하는 조선무약 합자회사(줄여서 조선무약)였다. 조선무약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제약사며 솔표 우황청심원, 위장약, 위청수 등 대표적인 한약들을 개발했다. 특히 ‘솔표 우황청심원’은 한약의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한 제품이다. 솔표 우황청심원은 해방 후 일본 전역에 수출되기 시작했고, 그는 ‘스타’ 한의사로 일본에 초빙돼 각종 세미나에서 학술 발표를 진행하기도 했다. ◇한의사 제도 기틀 다져 1950년 박성수는 수양한의원을 개설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온양에 <국립구호병원>을 설립해 다친 장병들과 마을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같은 시기 부산 피난 시절에는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한의사제도를 만들기 위해 동료 한의사들과 고군분투했다. 이런 공로로 1953년 서울시한의사회 초대회장에 피선돼 활동했고, 1954년 한의사협회 기관지 <東洋醫藥>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재산을 털어 창간작업에 매진하기도 했다. 1955년 박성수는 동양의약대학의 설립인가를 얻어냈다. 같은 해 8월 동양의약대학에 약학과가 병설됐고, 1964년에는 동양의과대학으로 개칭됐다. 이에 따라 수업 연한이 6년제로 바뀌어 국내 한의사 양성 기반이 확고해졌다. 이 대학이 바로 지금의 경희대학교 한의과다. 박성수는 1957년 한국에서 두 번째 한의학 교수가 되어 경희대학교에서 제자들을 육성했고, 이때 제3대, 제4대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이라는 중책을 역임했다. 1957년에 간행된 <忠淸人士集>에는 충청도 출신 인물 가운데 공적이 있는 인물로서 그를 소개하고 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앞서 언급한 양정중학교 후원회장부터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 후원회장(1945), 서울 사립중학교 후원회 연합회장, 한양국립구호병원 건설위원장, 한의사 국가시험위원,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상임위원, 대한한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다 1961년 당시 국가재건회의에서 한의사제도 관련 법률을 삭제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박성수를 포함한 초기 한의계 원로들은 한의사제도 폐지획책을 저지하고 한의사의 법적 지위가 확보된 의료법안을 통과시키려 엄청난 노력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성수는 오한영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과 내무부장관, 문교부 장관 등 각 요직에 손을 써 한의대 인허를 받아내는 한편, 법 제정 쪽에 관심을 쏟아 국민의료법 제2조 의료업자 종류에 ‘한의사’를 삽입, 명문화하는 데 성공해 오늘날 한의사 제도의 기틀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
송파구, 어르신 인지건강위한 '한의치료' 무료 지원송파구는 우울감, 스트레스 등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 어르신들의 인지건강을 증진하기 위해 ‘어르신 한의약 건강증진사업’을 추진한다고 21일 밝혔다. 최근 코로나19 장기화로 감염위험에 대한 우려와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한 일상생활의 제약이 커지면서, 사회적 고립감 증가로 우울 관련 인지저하를 경험하는 어르신이 지속 증가하고 있다. 이에 송파구는 우울감 등 기타 심리적 어려움이 있는 지역 어르신들을 돕고자 ‘어르신 한의약 건강증진사업’을 진행한다. 특히 이번 사업은 한의치료에 대한 비용이 전액 지원돼 관내 저소득 어르신들의 건강관리 형평성 제고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 사업 대상은 만 60세 이상의 송파구민 중 인지선별검사(K-CIST 혹은 MoCA)또는 우울증 선별검사(GDSSF-K)결과가 기준 점수 이하인 어르신이다. 단, 현재 치매진단으로 치료약을 복용하고 있거나 우울증이라고 진단 받은 자, 자살 위험도가 높은 자는 대상에서 제외된다. 대상자로 선정되면, 한의원에서 초기평가를 시행하고 가까운 병원에서 혈액검사를 진행하며 결과를 토대로 침술 및 한약치료를 시작한다. 한의치료는 △인지기능 저하와 우울감 완화를 위한 한의사 건강상담 △총명침 시술(12~16회) △한약제(첩약 또는 과립제) 처방 등이며, 상담 및 치료비용은 무료이다. 혈액검사비용은 서울특별시한의사회에서 지원예정이다. 한의치료를 원하는 어르신은 송파구치매안심센터에서 인지선별검사를 먼저시행하고 결과에 따라 참여 신청할 수 있다. 올해는 선착순으로 50명을 모집한다. 대상자는 관내 지정 한의원 중 방문하기 좋은 곳을 선택해 전화예약하고, 한방치료를 받을 수 있다. 6개 지정 한의원은 △경희제광한의원(거여동) △마천한의원(마천동) △성보한의원(문정동) △세종한의원(송파동) △일동한의원(송파동) △자운한의원(잠실본동) 등이다. 박성수 구청장은 “감기에 걸리면 내과에 가듯이 마음이 아프고 힘들면 그에 맞는 진료를 제때 받는 것이 어르신들에게는 더욱 중요하다”며 “‘어르신 한의약 건강증진사업’을 통해 한의 치료를 필요로 하는 송파구민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
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436)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1958년 12월30일 『東方醫藥』 제4권 제4호(통권 12호)에는 ‘學界消息’이라는 제목의 소식란이 몇쪽에 걸쳐 기재돼 있다. 『東方醫藥』은 당시 대한한의사협회의 박성수 회장이 발행인으로서 이후 1959년 4월27일에 제5권 제1호가 발간되기까지 총 9회가 발행됐다. 『동방의약』은 1955년에 발행된 『동양의약』과 연속선상에 있는 잡지이다. 아래에 ‘學界消息’의 내용을 요약정리한다. ○인천시한의사회에서는 1958년 8월18일 회를 소집하고 간부진의 개편을 결정하였다. 신임회장에 許燮 , 부회장 尹大鉉, 감사 裵二鎬, 車京允, 申京善이다. ○서울시한의사회 감사 洪鍾憲 逝去: 서울시한의사회 발족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회 운영에 헌신적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天賦한의원 원장 洪鍾憲 監事가 숙환으로 1958년 10월24일 영면하였다. 선생은 강원도 삼척군에서 탄생하여 三陟보통학교, 서울 中東중고등학교, 京城법학전문학교 등을 수학하였다. ○전국시도한의사회장 회의 개최: 1958년 9월3일 서울시 도봉산정에서 개최. 국회 속개에 따라 국민의료법 개정법률안이 심의될 기운에 비추어 한의사 영역에 관한 여하한 법제상 변동에 대해 업계의 통일된 결속을 기하고자 전국시도한의사회장 회의를 朴性洙 대한한의사협회 회장 주재로 개최되었다. 동양의약대학(경희대 한의대 전신) 朴鎬豊 학장이 참석한 가운데 오전 11시부터 7시간 동안 개최되었다. 특히 이날 토의사항에서 현재 京鄕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는 夏季腦炎에 대한 한방요법이 양방대책에 비하여 월등히 우수한 치료성적을 과시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법제상의 제약으로 인하여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제도상 결함에 대해 방역당국이나 보건당국의 반성을 촉구하였다. ○東洋醫學硏究會 발족: 東洋醫藥大學 出身 한의사가 중심이 되어 한방의학의 질적 향상과 과학적 선양에 이바지하고자 동양의학연구회를 결성하였다. 앞으로 순수한 학술단체의 성격을 십분 발휘하여 정기학술발표회, 강연회 또는 좌담회 등을 수시개최하여 사학 발전에 진력할 것이다. 고문에 金長憲 敎授, 吳宗植, 李鍾奎 博士. 대표간사 朴賢緖. 총무간사 李尙仁. 학술간사 洪性善. 섭외간사 박노훈. 출판간사 李文宰. ○앞서 발족을 본 동양의학연구회에서는 그 첫 사업으로 1958년 10월16일부터 5일간 서울 YMCA에서 제1회 학술연구강연회를 가졌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월6일 「鍼灸醫學에 對한 硏究」(박노훈), 「西歐에 있어서의 鍼灸醫學」(李文鎬 博士), 10월7일 「氣味的으로 본 東洋醫學의 藥理」(洪性善), 「東洋醫學의 思考方式」(尹吉永), 10월8일 「治療方式의 새로운 硏究」(朴賢緖), 「東洋醫藥의 科學性」(吳宗植), 10월9일 「내가 體驗하는 臨床에서」(宋炳基), 「東洋醫學界의 今後의 使命」(盧東輝), 10월10일 「東洋醫學의 歷史的 硏究」(李尙仁), 「東洋醫學의 갈길」(李宗奎). ○崔俊相 院長 逝去: 서울시한의사회 최준상 원장은 향년 81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는 일제시기 甲種醫生免許를 취득하여 서울시에서 한의원을 개설하고 평생동안 국민보건에 이바지하였다. 그의 장남 崔健熙 先生도 선친의 유업을 계승한 한의사로서 서울 예지동에서 天一한의원을 개설하고 있다. ○마산일보 기사사건 타결: 1958년 5월 26일, 27일 양일간에 걸쳐 마산일보 문화난에 게재된 의사 김모씨의 논문 「여름 衛生과 傳染病」의 논문 중에 한의학 및 한방치료행위를 모욕한 취지를 발표한데서 발단한 마산시한의사회 및 경상남도한의사회의 분노에 찬 고소제기사건은 비상한 충격을 전학계에 준 바 있었는데, 그 후 피소인 김모씨와 경남의사회장이 수차에 걸쳐 경남한의사회장 李羽龍 先生을 探訪陳謝를 거듭하였으며 피소인의 간청에 의하여 道幹部會를 소집한 석상에서 필자 자신이 본의 아닌 과오를 범한대 대하여 陳謝의 書面을 접수하고 熟議를 거듭한 결과 대승적 견지에서 관용의 아량을 보여서 이미 訊問이 계속되고 있는 고소를 취하할 것을 결의하여 10월29일자로 이를 정식 취하함으로서 그동안 업계에 관심이 크던 同事件의 완전타결을 보게 되었다. -
한의사 박성수 “1919년 기미독립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박성수(朴性洙,1897.8.12.~1989.2.15)는 충북 청주 출생의 한의사로서 1919년 기미독립만세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10개월 간 감옥에 수감된 독립정신이 투철한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쓴 그의 한시는 망국의 설움에 대한 감회가 베어져 있다. “生於亡國世 何物滿腔腸 血塊凝義赤 一噴洗東洋 囹圄今日事 痛哭仰者天 擊欄還一笑 白日復照然 人末百年有死生 孰能死死孰生生 宋端囚燕全忠死 雲長許魏仗義生 生欲偸生生還死 死於當死死亦生 嗟我二千萬同胞 一心無礎是死生 鐵窓讎日若如年 抱膝黙吟坐一邊 茄飯茄湯時喫後 爲何向壁反成眠” “나라 망한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이여...오늘 일은 하늘을 향해 통곡하고 살아서 살고 싶어도 살고 죽고 죽어도 죽고...지난 백 년 동안 누가 죽을 수 있을까? 어쩌면 생명의 선을 위해 싸웠고, 죽음을 위해 생명의 선을 위해 살았는지도 모른다. 우리 동포 2천만 명은 근거도 없이 죽었다.” 3.1만세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년 1개월간 감옥 수감 호 일송(一松). 충청북도 청주 출생. 한의사 기업가 교육자. 박성수 한의사에 대한 세간의 평이다. 그러나 그가 독립운동가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이 모른다. 1897년 8월 12일 출생한 박성수는 유교가문에서 출생했고, 일제강점기 식민교육을 시행하는 학교교육을 받는 것에 반대했던 선친의 뜻을 따라 13세부터 한학에 입문했다. 이후 한의사 이상열에게 한의학을 배웠고, 그후 한의학 공부에 매진하여 경성 한의약전수학원을 졸업했다. 24세가 되던 1920년 그는 한성약업사 및 대창약업사를 창업했다. 이해 9월 독립자금과 밀서를 전달하며 1919년 3.1만세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1년 1개월간 감옥에 수감됐고 혹독한 고문 끝에 간신히 살아나왔다. 1925년 감옥에서 나온 뒤 그는 약업에 전념하며 또 다른 회사를 창업했다. “우리 나라의 건강은 우리가 지킨다”라는 신념으로 한의학의 현대화를 목표로 하는 조선무약 합자회사(줄여서 조선무약)였다. 조선무약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제약사며 <솔표 우황청심원>, <위장약>, <위청수> 등 대표적인 한약들을 개발했다. 특히 <솔표 우황청심원>은 한약의 현대화에 크게 이바지한 제품이다. 독립 운동가들 편지 전달…정부, 독립유공자로 선정 박성수는 회사설립 초기 방방곡곡에 약재를 나르며 독립운동가들의 편지를 함께 전달했다.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그 이후 행적의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에 선정됐다. 해방 전 그는 양정중학교(1939), 경복중학교(1945), 계동국민학교 등의 후원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50년 박성수는 수양한의원을 개설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온양에 <국립구호병원>을 설립해 다친 장병들과 마을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전념했다. 같은 시기 부산 피난 시절에는 전란 중임에도 불구하고, 한의사제도를 만들기 위해 동료 한의사들과 고군분투했다. 이런 공로로 1953년 서울시 한의사회 초대회장에 피선되어 활동했고, 1954년 한의사협회 기관지 <東洋醫藥>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면서 개인재산을 털어 창간작업에 매진하기도 했다. 1955년 박성수는 동양의약대학의 설립인가를 얻어냈다. 같은 해 8월 동양의약대학에 약학과가 병설됐고, 1964년에는 동양의과대학으로 개칭됐다. 이에 따라 수업 연한이 6년제로 바뀌어 국내 한의사 양성 기반이 확고해졌다. 이 대학이 바로 지금의 경희대학교 한의과다. 박성수는 1957년 한국에서 두 번째 한의학 교수가 되어 경희대학교에서 제자들을 육성했고, 이때 제3대, 제4대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이라는 중책을 역임했다. 그가 회장을 맡은 시기를 가만 들여다보면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 등 나라의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였다. 1957년에 간행된 <忠淸人士集>에는 충청도 출신 인물 가운데 공적이 있는 인물로서 그를 소개하고 있다. 그 자료에 따르면 앞서 언급한 양정중학교 후원회장부터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의예과 후원회장(1945), 서울 사립중학교 후원회 연합회장, 한양국립구호병원 건설위원장, 한의사 국가시험위원, 대한적십자사 서울지사 상임위원, 대한한의사회 회장 등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보가 들려왔다. 1961년 당시 국가재건회의에서 한의사제도 관련 법률을 삭제해버리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때 박성수를 포함한 초기 한의계 원로들은 한의사제도 폐지획책을 저지하고 한의사의 법적 지위가 확보된 의료법안을 통과시키려 엄청난 노력을 했다. 당시 다른 대학들은 재단만 있으면 문교부에서 인가가 나오지만, 한의과대학은 보건사회부 장관의 승인이 떨어져야 문교부에 넘어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의계에는 정치인도 재력가도 없었는데 반해 세력을 형성한 양방 측이 한의대 설립을 필사적으로 저지했고, 사회적으로도 서구문화의 득세로 한의에 대한 인식도 바닥에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박성수는 오한영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과 내무부장관, 문교부 장관 등 각 요직에 손을 써 한의대 인허를 받아내는 한편, 법 제정 쪽에 관심을 쏟아 국민의료법 제2조 의료업자 종류에 ‘한의사’를 삽입, 명문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검정고시의 길도 열린 것이다. 최초의 ‘한의사전문의’ 시험은 2002년 1월 31일이었다. 이때의 무수한 노력 끝에 현재까지 한의사제도, 한의사 전문의시험 등의 맥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아주 오래전의 일이 아님을, 아주 가까운 과거의 일이었으며, 이러한 제도가 정착되기까지 많은 선배의 노력과 희생이 따랐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법률상 한의사제도 정립 위해 눈부신 활약” 당시 박성수는 한의학 분야 외에 전통문화 계승과 교육 사업에서도 남다른 이바지를 했다. 한시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 대만까지 명성을 날렸다. 실제 한국 한시 협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했고, 대만에서는 한시 학회 고문으로 추대됐다. 또한, 1968년부터 그가 40여 년 전 개발한 <솔표 우황청심원>이 해방 후 일본 전역에 수출되기 시작했고, 그는 ‘스타’ 한의사로 일본에 초빙되어 각종 세미나에서 학술 발표를 진행하기도 했다. 뭔가 기분이 묘하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가 만든 한약이 해방 후 일본 전역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니 말이다. 이러한 그의 경제-무역 분야의 기여에 따라 1969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세 차례에 걸쳐 수출 유공 표창을 받는다. 그를 기억하는 동료 한의사 박남중은 당시 회고담에서 “정부의 부산 피난 시절, 최초의 한의과대학 인가와 법률상 한의사제도의 정립을 위해 일송(박성수)은 부산역 앞 중앙동 삼성여관에 기거하면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라고 말했다. 1989년 2월 15일 93세의 일기로 타계한 박성수는 평생 한의학자(韓醫學子), 한학자(漢學子), 제약회사 CEO, 교수 등으로 알려졌지만 이제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로 그를 기억하고 싶다.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
일제 강점기 한의사의 또 다른 이름 ‘독립운동가’[한의신문=민보영 기자]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에 투신한 한의사들의 삶이 최근 지상파를 통해 재조명된 가운데 삶의 터전에서 묵묵히 헌신한 한의사의 업적이 관심을 끌고 있다. 경술국치 당시 독립운동에 뛰어든 일부 한의사는 저명한 소설가의 친·인척이거나 종교인이었으며, 독립운동가의 든든한 버팀목의 이력을 지니고 있었다. 대한한의사협회에서 발행한 ‘1898~2011 대한한의사협회사’에는 1907년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한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주권을 되찾으려고 한 한의사들의 사투가 나와 있다. ◇천도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인으로도 활약 일제강점기 시절 일부 한의사는 한의업과 독립운동 외에도 천도교, 불교 등에서 활약하며 격동하는 근대사에 기여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광희·변태우·정구용 선생 등이 있다. 1892년 함경북도 학성에서 태어난 김광희 선생은 1922년 7월 고려혁명위원회 해외조직부장으로 활약하는 한편 11월 천도교 신·구파간 내분 수습을 위해 신파의 포조 대표위원으로서 협의를 성공시켰다. 1930년에는 한족총연합회의 지도당으로 조직된 신한농민당 위원장으로 헌신했다. 이 같은 공로로 정부는 김광희 선생에게 195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애국장을 수여했다. 천도교 신도이기도 했던 변태우 선생은 1939년부터 신문·라디오 등 대중매체가 일본의 전과를 과대 보도하는 데 불만을 품고 일본의 불공정한 보도를 비판하고 나섰다. 일제는 1940년 제주도에 중국을 겨냥한 발전 기지를 만들면서 도내 반일세력으로 천주교회 신도 조직을 탄압 대상으로 삼았고, 변태우 선생은 1941년 10월 군사 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당했다. 이듬해인 1942년에는 국가보안법 및 국가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국이 광복한 후 광주 시내에 개원하며 지내다 1950년 고문의 여독과 옥중 생활 후유증으로 광주 자택에서 별세했으며, 정부는 1993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정구용 선생은 1918년 제주도 서귀포시의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3·1 운동보다 5개월 먼저 제주도에서 일어난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전국 최대의 무장항일운동이다. 당시 주지 김연일과 함께 ‘반일 반외세’를 기치로 항일 비밀결사를 결성한 후 민족 독립을 주장하며 무장 봉기를 주도했다. 제주도내 일본 관리와 상인을 내쫓기 위해 마을주민 등 700여 명이 행동에 나섰다. 1923년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은 정구용 선생은 출소 후 경북 포항의 보경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정부는 2002년 정구용 선생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했다. ◇저명 문학인의 친척이거나 소설에 등장하기도 또한 독립운동에 투신한 한의사들은 저명한 문학인의 친척이거나, 유명한 소설 속 등장인물의 모티브를 제공하기도 했다. 시인 이육사의 외삼촌으로 알려진 허발 선생 외에도 나병규·조헌영·유경집 선생이 있다. 1919년 강원도 철원 애국단에 지원한 나병규 선생은 서울 상동교회를 통해 알게 된 대한독립애국단 단원 조종대 선생의 활동을 도왔다. 신현구 선생 등이 결성한 대한독립애국단은 본부를 서울에 두고 강원, 충청, 전라도 등지에서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조종대 선생이 지부 설치에 힘을 쏟을 때 나 선생은 한의원을 경영하면서 연락 거점을 등을 제공했다. 소설가 나동향의 조부이기도 하다. 시인 조지훈의 아버지인 조헌영 선생은 일본 와세다 대학 사법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조선유학생 학우회장, 신간회 동경지회장 등을 지내면서 항일운동을 벌였다. 1945년 해방 후 임시정부와 연합군 환영준비위원회에서 사무차장을 역임하고 제헌국회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한의학의 제도권 진입을 위해 노력했다. 경상북도한의사회는 1988년 5월 타계한 조헌영 선생을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안중근 의사와 의형제를 맺을 만큼 친분이 두터웠던 유경집 선생은 1909년 아들 유동하와 안중근 의사 등 7명이 모여 구국 혁신을 맹세하는 ‘7인 동맹’을 조직했다. 자신의 아들 유동주에게 안중근 의사의 의거 당시 러시아 통역을 해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유경집 선생은 고향 원산을 떠나 러시아 국경지대에서 살다가 옴스크시를 거쳐 혁명 직후 폴란드로 이주했다. 유경집 선생은 안중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가 이문열의 작품 ‘불멸’에서 안중근을 돕는 인물의 모티브가 됐다. 소설에서 유경집은 안 의사에게 “얼마 되지 않지만, 군자금에 보태 쓰도록 해 달라”며 적지 않은 돈을 쾌척했다. 유명한 독립운동가의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된 한의사도 있다. 1910년 경술국치를 겪은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이원직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했으며 이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몸담으며 도산 안창호 선생 앞에서 조국독립에 자신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군자금 모금을 위해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를 매각하는 등 다양한 공적을 남겼지만, 일본경찰에게 체포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석방된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하다 1945년 5월 광복을 3개월 여 앞두고 옥사했으며,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이 외에도 정치인, 기업가, 교육가, 기자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도 투신한 한의사들의 이력도 눈에 띈다. 연희전문학교 문과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한일청 선생은 1926년 태극기와 격문을 6·10 만세운동 당시 배포하다 일본 경찰에 기소됐다. 이후 일본 도쿄에서 ‘조선운동’ 기자로 활약한 뒤 한국에서 ‘중아일보’ 예천지국을 운영했다. ‘제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30년 6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독립운동과 사회계몽운동, 한의사로서 사회에 기여한 한일청 선생은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대됐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제약사를 세운 박성수 선생은 1920년 9월 독립운동에 가담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솔표 우황청심원, 위장약, 위청수 등 대표적인 한약을 개발한 박 선생은 설립초기 전국에 약재를 나르며 독립운동가의 편지를 함께 전달한 공로로 독립유공자에 선정됐다. 또한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한의학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방주혁 선생은 독립운동가였던 이시영 선생의 독립운동 자금 부탁을 받고 밀사 한웅을 민영식 선생과 만나도록 주선해 동대문 경찰서에서 문초를 받았다. 이후 46세 때 이시영 선생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에는 부통령이 된 이시영의 정치 고문, 민주당 최고위원 조병옥의 정치고문을 지냈으며 국제연합 사무총장에게 한국 가입 필요성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이자 한의사로 업적을 쌓은 방 선생의 공적은 현재 국가보훈처에 독립운동가로 등록돼 있지 않다. 앞서 KBS 1TV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다큐세상의 ‘독립운동의 숨은 영웅들, 한의사’ 편에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에 헌신한 강우규·신홍균·허발 선생 등 한의사 3인의 삶을 추적했다. 역사교육 ‘독립운동가’ 앱 개발자인 정상규 씨는 이들 한의사의 삶을 추적하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한의사들의 독립운동을 발굴하며 한의학이 발전해온 원동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새로운 독립운동에 대한 시각으로 역사의 숨은 주인공을 찾는 일은 계속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김남일 경희대 한의대 교수는 이 방송에서 “한의학은 역사적으로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학문이다. 그 동안 축적한 경험은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이라며 “전 세계의 의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런 역사를 지닌 한의학과 접목된다면 새로운 의학을 만드는 데에 아주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
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221)1957년 朴盛洙의 原因不明熱과 小兒變蒸論에 대한 주장을 보니… 1957년 『東方醫藥』 제3권 제2호에는 천보의원 원장인 한의사 朴盛洙의 ‘原因不明熱과 小兒變蒸論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이 실려 있다. 박성수 선생은 양·한방 동시면허자로서 한의학에 대한 학리적 연구에 매진했던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1962년 대한한방의학회라는 학회를 李殷八 선생과 함께 결성하여 이듬해에 廉泰煥과 함께 『現代漢方醫學總論』이라는 교육용 교재를 만들어 이 학회에서 교육용 교재로 사용하였다. 대한한방의학회는 傷寒論을 위주로 하는 古方을 연구하는 한의사들이 결성한 학회로서 야심찬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글의 내용을 약간의 현대어로 고쳐 실어본다. “最近에 와서 어떤 醫院 特히 漢醫院看板에 原因不明熱에 對하여 特殊治療를 한다고 한 것을 間或 보게 된다. 이것을 西洋心醉의 人이나 或은 洋方醫家에서 본다면 ‘原因을 아는 熱病도 治療가 困難한 때가 많은데 原因을 모르고 어떻게 治療를 할 것인가?’ 하고 疑訝心을 가지게 할 뿐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漢方誹謗을 茶飯事로 하는 相對方의 好餌가 될 念慮가 不無하다. 原因不明熱을 善治할 수 있다면 原因分明熱은 勿論 더 잘 治療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바이니 거저 熱病能治라고 表示함이 도리어 賢明한 일이 아닌가. 이 不明熱에 對하여는 筆者가 思考하건대 漢方兒科書에 記載된 變蒸論의 槪念이 乳兒에 있어서의 原因不明熱인 경우를 指稱함이 아닌가하고 생각하는 바이다. 變蒸이라 함은 乳兒의 氣血과 骨肉이 發育하는 過程의 變化를 表現한 것으로 보는데, 그리하여 이에 對한 學說이 많이 나와 있다. 그 中에서 一說을 摘記하여 보면 아래와 같다. ‘小兒變蒸은 俗謂之 牙骨長也라. 如蠶之有眼하며 龍之 骨하며 虛之轉介가 皆同此類變生而長也’라 하였다. 이것도 亦是 初生兒發育程度의 變態를 다른 動物에 비유하여 論한데서 不過하다. 變蒸이라는 것은 十變五蒸의 略稱인데 變이라 함은 情智를 變하는 것이고 蒸이라 함은 血脈을 蒸하는 것이다. 十變五蒸이라는 것은 乳兒가 出生하여 三十二日마다 一變하고 六十四日마다 一蒸하는 狀態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出生 後 五百七十六日로서 變蒸이 終了되는 것이다. 이 期開에 있어서 變할 때는 上氣하고 蒸할 때는 發熱하는 것인데 輕한 者는 微熱이 나며 神經質이 되어 잘 놀내고 잠도 잘 안자며 耳冷이 있고 上唇에 魚眼大의 白色疱疹도 생기며 汗出도 좀있다. 重한 者는 高熱이 나고 脈이 亂脈이 되며 食慾이 없어서 젖을 잘먹지 않고 或은 吐하기도 하고 또는 眼球가 上竄되어 赤黑部分이 白色으로 되는 수도 있다. 그러나 變蒸의 時期가 經過하면 아무런 일도 없던 것처럼 된다. 그런데 아주 튼튼한 乳兒는 變蒸의 時期가 와도 아무런 症狀을 나타내지 않는 일도 있다. 以上 變蒸에 依한 症狀이 大體로 보아 變의 境遇에는 輕한 것이고 蒸의 境遇에는 重한 것이며 其期間은 五~十日로서 終結되어 平常時로 돌아가게 된다. 萬一 이 期間을 지나서도 回復되지 않을 때에는 治療를 施하여야만 되는데 이에 對한 治法에 對하여서도 別다른 것이 없고 古方의 隨證治之의 思想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上述한 것이 變蒸에 對한 槪念的 思素이다. 이것이 要컨데 原因不明熱에 對한 一個의 適例가 아닌가하여 愚見을 草한데 對하여 先輩의 批判을 바라마지 않는다.” <- 1957년 ‘동방의약’에 발표한 박성수가 작성한 원인불명열과 소아변증열에 대한 논문. -
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214)1963년 10월10일 오후 3시 昌慶苑에서 있었던 행사 晴崗 金永勳 先生 文化勳章 褒賞記念祝賀宴 1963년 10월10일 오후 3시에 창경원에서 거행되었던 청강 김영훈 선생 문화훈장 포상기념축하연에 대해서 『대한한의학회보』제1권 제7호(1963년 11월20일 간행)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963년에 광복절을 기념하여 정부에서는 대한민국건국축하식전에서 교육, 학술, 예술 등 17개 부문에 걸쳐 267명의 유공인사들에게 건국국민훈장을 수여하였는데, 이 때 보건 부문에 수상자로 선정된 11명 가운데 晴崗 金永勳(1882~1974) 先生이 포함되게 된다. 호가 晴崗으로 1882년 江華島 江華邑 官廳里에서 출생한 金永勳은 名醫 徐道淳의 제자가 되어 醫學入門 硏究 계통의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1904년 최초의 근대적 한의과대학인 同濟醫學校가 설립되어 교수를 뽑자 이에 지원, 수석합격하여 都敎授가 되었고, 典醫 出身이며 한의계의 원로였던 洪哲普, 張容駿, 崔奎憲 등과 함께 八家一志會를 만들어 한의학의 부흥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대한한의학회보』 제1권 제7호에는 김영훈 선생이 훈장을 받은 것을 축하하는 자리의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한한의학회의 주관으로 사무장 李宗泰 이사의 개회사에 이어 박성수 명예회장의 간곡한 축하사가 있었고, 대한한의사회를 대표하여 李龍珠 부회장의 기념품 증정, 동양의약대학을 대표하여 권영준 교수의 화환 증정, 『醫林』을 대표하여 裵元植 선생의 화분 증정이 있었고, 동양의약대학장 李鍾奎 박사, 대한한의학회 고문 김장헌 교수의 축사가 있었다. 이어서 청강 김영훈 선생의 답사가 끝나자 宴席으로 들어가 여흥으로 一樵 金鼎濟氏의 詩唱, 北堂 朴承煥氏의 時調 등이 흥취를 북돋았고 오후 6시 기념촬영후 산회하였다. 『대한한의학회보』 제1권 제7호에 나온 金永勳 先生의 답사의 요지를 정리해 본다. “오늘날 불초한 이 사람을 위하여 장노선생들과 여러 청장동지께서 이 자리에 모이셔서 이같은 盛宴을 베풀어 주시니 불초의 無常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감격한 말씀을 무엇이라 표현할 수 없습니다. 금반 문화포상을 받을 때에 몇가지 감상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한의학교를 허가하여 달라고 總督府衛生局長 西龜와 京畿道衛生科長 天安敏介에게 여러번 종용하였으나 이것은 총독부령으로 되는 것이 못되고 일본 내무부에서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기껏 道醫講習所라는 것을 허가할 때 同志田光玉氏가 不肖보다 功勞가 多하였으며 기백명의 한지의를 배출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이런 환영연을 전광옥씨가 받어야 할 것인데 이미 不歸客이 되었은 즉 千萬遺憾입니다.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형 부통령의 ‘釜山時代’에 朴性洙氏, 朴鎬豊氏, 不肖 등이 陳情書 또는 直訴도 하고 하여, 그 때 두분의 말씀, 우리나라의 한의학은 유서깊은 의학 또는 우리 국민이 없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여서 한의사와 한의과대학을 헌법에 의한 허가설정된 것인즉 朴性洙, 朴鎬豊 兩氏가 당연히 이러한 환영을 받어야 할 터인데 불행히 朴鎬豊氏도 已作故人이 되어 千萬遺憾이옵니다. 지금 박성수씨로 말하면 우리 한의사, 한의과대학의 창설시에 우리의 빈곤한 한의사회 重壘多事, 風風雨雨에 음으로 양으로 自己家産을 賣出하여 십여년간을 左支右支하여 우리 학교와 醫會가 지금 국내 국외에 형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박성수씨가 당연히 이런 환영을 받어야 할 터인데 유독 不肖같은 車載斗量者가 아무 공헌없이 이런 존중한 환영을 받는 것은 慙愧하고도 더욱 恐懼莫措합니다.” <-1963년 대한한의학회보에 실린 청강 김영훈선생 문화훈장 포상기념축하연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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