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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➓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이겐아민의 작용을 통해 본 부자의 현대적 기전 부자(附子)는 전통 한의학에서 온리약의 대표로 꼽히며, 고전적으로 회양구역(回陽救逆), 온신장양(溫腎壯陽), 온중거한(溫中祛寒), 온심통양(溫心通陽)이라는 네 가지 축으로 설명되어 왔다. 병태 자체는 각각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심장·혈류·대사 기능의 반응성이 저하된 상태”라는 하나의 중심 축을 회복시키는 약이라는 점에서 서로 이어진다. 즉, 부자는 단순히 몸을 덥히는 약이 아니라 기능이 한계점 아래로 떨어진 생리 회로를 ‘다시 켜주는’ 약이며, 이 작동의 첫 스위치가 바로 하이겐아민(higenamine)이다. 이 연재에서는 부자의 본질을 해부하듯 하나씩 짚어보려 한다. 첫 글은 하이겐아민을 통해 부자의 온리약성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살펴보고, 이후 글에서는 포제가 부자의 본질을 어떻게 형성하는지, 부자가 어떤 병태에서 적중하는지, 어떤 병태에선 부담이 되는지, 부자와 육계·파고지의 차이, 부자의 안전성·용량 설정 등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부자는 독성이 강한 약이어서 조심해야 하는 약이 아니라, “정확히 쓰면 누구보다 정밀하게 작용하는 약”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이 연재 전체의 목표이다. 하이겐아민은 어떤 성분인가 — 부자의 온리약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조절자 하이겐아민은 벤질아이소퀴놀린(benzylisoquinoline) 계열의 알칼로이드로, 부자·오두를 비롯한 Aconitum 계열에 상대적으로 높은 농도로 들어 있다. 연꽃의 씨앗, 서장경, 소엽 등 다른 식물에도 검출되지만 그 양은 극히 낮아 약리적 의미를 갖기 어렵다. 부자에서 하이겐아민이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부자에 존재하는 아코니틴 유도체·다당류·페놀류와 결합하여 온리약성을 관통하는 ‘반응성 회복 기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이겐아민 단일물질을 투여했을 때보다 포제부자에서 얻어지는 하이겐아민-알칼로이드-다당류 복합체의 작용이 훨씬 넓고 정교하다는 점이 여러 실험에서 확인되고 있다. 하이겐아민은 β-아드레날린 수용체를 자극하는 물질로, 생리적으로는 심장 수축력·심박수 증가, 말초·중심부 혈류 개선, 대사 반응성 증가 등의 작용을 나타낸다. 이 작용은 전통 문헌에서 부자에게 부여된 네 가지 온리 효능—회양구역, 온신장양, 온중거한, 온심통양—모두에 대응되는 기전이다. 전통의 언어로는 ‘양기 회복’, ‘한을 몰아낸다’, ‘신양을 도와준다’라는 표현이지만, 현대 약리학의 언어로는 “심장·혈관·대사 축의 반응성을 다시 정상 범위로 끌어올리는 약리”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이겐아민이 부자에서만 강력하게 의미를 갖는 이유 — 포제가 만들어주는 ‘약성이 드러나는 환경’ 하이겐아민은 구조적으로 비교적 순한 자극 성분이지만, 생부자 상태에서는 아코니틴·메소아코니틴·하이포아코니틴 등 강력한 독성 알칼로이드에 의해 그 작용이 사실상 가려져 있다. 생부자는 강한 신경독·심장독 때문에 생리 회로가 안정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이므로, 하이겐아민의 조절성 작용은 거의 발현되지 않는다. 부자의 포제는 단순한 독성 제거가 아니라, 이러한 독성 알칼로이드를 벤조일아코니틴·벤조일메소아코니틴 등 저독성·조절성 구조로 전환시키는 과정이다. 이 전환이 이뤄져야만 하이겐아민의 심혈관·대사 조절 작용이 본래의 의미를 가지며, 부자가 온리약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생리적 환경이 형성된다. 즉, 하이겐아민의 작용은 생부자에서는 위험성이 더 크지만, 포제부자에서는 “저반응성 회복”이라는 치료적 의미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하이겐아민이라는 물질이 부자의 약성을 만들고 있지만, 이 물질이 단독으로 약처럼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포제로 조정된 전체 성분 구조 안에서 약성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포제가 없으면 하이겐아민은 약이 아니라 수많은 독성 신호에 묻힌 미약한 자극일 뿐이다. 포제는 하이겐아민을 활성화시키는 과정이며, 부자를 부자답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생약학적 공정이다. 하이겐아민의 약리 기전 — 부자의 온리 효능 네 가지를 관통하는 하나의 생리학적 축 하이겐아민의 첫 번째 작용은 심장이다. β1-수용체를 자극하면 심근 수축력과 반응성이 증가하여 회양구역·온심통양 효과의 토대가 된다. 한의학에서 ‘심양이 쇠한 상태에서 기운을 끌어올린다’고 표현하는 병태들이 현대적으로는 “심장의 반응성이 저하된 상태에서의 기능 회복”과 대응된다. 두 번째는 혈관 반응성이다. β2-수용체 자극을 통해 말초혈관이 확장되고 혈류가 개선된다. 이 과정은 냉성 통증 완화, 복부·사지 냉감 감소, 근육 긴장 완화와 연관되며, 온중거한·산한지통이라는 전통적 표현을 현재의 생리학에 맞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세 번째는 대사 활성이다. 하이겐아민은 미토콘드리아의 산화적 인산화를 촉진하고 ATP 생산을 증가시키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이는 양허·노쇠·저대사 상태에서 떨어진 기초대사량을 회복시키는 작용이며, 온신장양의 핵심 기전을 현대적으로 설명해준다. 전통에서 말하는 ‘신양의 회복’은 호르몬 축·대사 축·심장 반응성의 통합 회복에 가깝다. 이 세 가지는 각각 다른 작용이지만, 최종적으로는 “반응성이 떨어진 생리 회로를 다시 작동 가능한 레벨로 끌어올리는 약성”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구조로 모인다. 부자를 단순히 ‘뜨겁다’고 설명하는 것은 본질의 극히 일부만 설명하는 것이며, 실제 본질은 ‘저반응성 회복’이다. 부자는 모든 사람에게 잘 듣지 않는다 — 소음인에게 유난히 잘 맞는 이유 임상에서 부자는 특정 환자에게는 극적으로 효과가 나타나지만, 어떤 환자에게는 부담이 되거나 체감이 거의 없는 경우도 있다. 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약의 강도가 아니라 ‘반응성 병태의 차이’이다. 부자가 잘 맞는 병태는 공통적으로 저대사·저혈류·저반응성 상태이며, 이는 한의학적으로 소음인의 병태와 가장 밀접하게 겹친다. 소음인은 기본적으로 대사 기능이 낮고, 추위에 약하며, 심박 반응성이 둔하고, 아침 피로가 심하고, 복부 깊은 구조물이 차가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생리적 구조는 하이겐아민이 가진 “작동 스위치” 역할과 매우 잘 맞아떨어진다. 반면 교감신경이 과흥분되어 있거나, 염증성 열이 지속되거나, 태양·소양처럼 반응성이 높은 체질에서는 부자의 β자극·혈류 자극이 불필요하거나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때의 불편감은 “부자가 독해서”가 아니라 “병태와 맞지 않아서” 생긴다. 부자는 강한 약이 아니라, 맞는 사람에게만 정밀하게 작동하는 약이며, 그 판단의 핵심이 바로 ‘기초 반응성’이다. 하이겐아민과 도핑 금지 — 부자의 힘을 보여주는 현대 생리학적 증거 하이겐아민은 2017년 이후 세계반도핑기구(WADA)에서 금지 성분으로 분류됐다. 이유는 β-아드레날린 자극으로 운동능력이 증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부자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심혈관·근육·대사 기능을 실제로 끌어올릴 수 있는 생리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강력한 증거다. 단, 이것은 반응성이 높은 운동선수에게 과자극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고, 반대로 반응성이 낮아진 양허·저대사 환자에게는 조절적 치료작용이 된다. 같은 물질이 병태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부자는 특히 병태 판정이 중요한 약이다. 결론 — 부자의 온리약성은 하이겐아민을 중심으로 한 ‘반응성 회복’이다 부자의 네 가지 온리 효능—회양구역, 온신장양, 온중거한, 온심통양—은 각기 다른 상황에서 쓰이지만, 결국 하나의 병태, 즉 저반응성 생리 상태를 회복시키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축을 이룬다. 이 축의 첫 작동, 즉 “생리적 점화(ignition)”를 담당하는 것이 하이겐아민이며, 포제로 조정된 부자의 성분 구조 안에서 비로소 치료적 의미로 드러난다. 이번 글에서는 하이겐아민의 약리와 부자의 온리약성을 이루는 중심축을 다루었다. 이어지는 글에서는 포제가 왜 부자의 본질을 만드는 과정인지, 부자가 적중하는 병태와 금기 병태는 무엇인지, 부자와 육계·파고지의 차이는 무엇인지, 현대 임상에서 부자를 어떤 기준으로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 등의 내용으로 확장해 나갈 예정이다. 다시 말하지만, 부자는 강한 약이 아니라, 올바른 병태에서만 강하게 정밀하게 작동하는 약이며, 그 본질을 이해하면 그 어떤 약보다 쓰임이 명확한 약이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❾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인삼의 효능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대보원기(大補元氣)’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인삼은 원기를 크게 보한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보기약 중에서도 으뜸이니 피로를 풀고, 식욕을 돋우며, 기운을 북돋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고전적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한의학에서 효능은 글자의 뜻으로 풀이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약이 실제로 어떤 병증을 치료했는가에 따라 정의된다. 다시 말해, 효능은 언어가 아니라 주치(主治)의 축적에서 형성된 개념이다. 고전의 약물학은 처음부터 지금처럼 효능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았다. 《신농본초경》이나 《황제내경》에는 ‘보기(補氣)’라는 효능명조차 없었다. 인삼의 효능도 ‘보오장(補五臟)’, ‘안정신(安精神)’, ‘정혼백(定魂魄)’, ‘명목(明目)’, ‘개심익지(開心益智)’ 등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기허를 치료한다’는 말은 명나라 시기 《본초몽전(本草蒙筌)》에서 처음 등장한다. 효능이라는 분류 체계는 금원사대가를 거쳐 명청대에 이르러 비로소 확립됐다. 따라서 오늘날 본초학에서 사용하는 100여 개의 효능명은 본래의 주치에서 파생된 후대의 용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초이론은 청대의 용어체계를 따르고, 임상은 명대의 《동의보감》 전통을 잇고 있기 때문에 두 체계가 어긋나 보이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비롯된다. 대보원기의 주치는 보기와 다르다 효능이 주치에서 생긴 개념이라면, 인삼의 대보원기가 실제로 어떤 병을 치료하는지를 봐야 한다. 만약 대보원기가 단순히 보기(補氣)의 강화형이라면 그 주치는 식욕부진, 피로, 권태감 같은 기허증이어야 한다. 그러나 고전의 기록은 전혀 다르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대보원기’라는 효능명이 인삼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황기(黃芪), 백출(白朮), 인삼과 함께 대표적인 보기약들 중에서도 ‘대보원기’라는 효능은 오직 인삼에서만 쓰였다. 본래의 의미에서 대보원기는 단순히 ‘보기를 크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이 꺼져가는 위기의 순간에 원기(元氣)를 회복시키는 작용, 즉 회양(回陽)의 범주에 속한다. 따라서 황기나 백출을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대보원기’의 효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명나라 이천(李梴)의 《의학입문(醫學入門)》에는 “氣脫者,汗出肢冷,脈微欲絶也(기탈한 자는 식은땀이 나고, 사지가 차며, 맥이 끊어지려 한다)”라고 하여, 인삼이 이러한 기탈 상태에서 사용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대 왕앙(王昂)의 《본초비요(本草備要)》 역시 “人蔘,回陽救脫,補脾肺二經,生津止渴”라 하였고, 같은 시대의 《증치준승(證治準繩)》에서도 “人蔘治氣脫欲絶,汗多面白,四肢厥冷者”라 하여 인삼을 기탈·허탈의 응급 상태에서 쓰는 약으로 명시했다. 《동의보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附子與人蔘相伍,內外兼固(부자와 인삼을 함께 쓰면 안팎의 양기가 모두 견고해진다)”고 하였다. 이 문장은 인삼과 부자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같은 생명 회복 작용을 한다는 의미다. 부자는 외부 순환을 돌려 양기를 밖으로 펴고, 인삼은 내부의 중심을 붙들어 기운이 새어나가지 않게 한다. 다시 말해, 인삼의 대보원기 효능은 피로를 푸는 보약의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중심이 꺼져가는 순간에 내부의 불씨를 붙잡는 회양 작용이다. 문헌에 보이는 인삼의 회양 작용 중국 명청대 의가들은 인삼을 회양의 약으로 기술한 사례를 남겼다. 청대 오당(吳塘)의 《의학심오(醫學心悟)》에는 “氣脫欲絶,汗出如珠,四肢冷厥,急用人蔘救之,可回陽復命(기탈로 죽음이 임박한 자에게 인삼을 급히 쓰면 양기를 회복시켜 생명을 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의 인삼 조문에도 “久病元氣將脫,宜獨蔘湯(오래 앓아 원기가 탈락할 때는 독삼탕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들은 인삼이 회양구역의 상황, 즉 맥이 끊어지고 체온이 떨어지는 상태에서 응급약으로 쓰였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독삼탕(獨蔘湯)은 인삼만 단독으로 대량 사용하여 기탈을 회복시키는 대표 처방이다. 또한 부자(附子)와 병용하여 내외의 양기를 함께 돋우는 삼부탕(蔘附湯)은 《의학입문》과 《동의보감》 모두에 기록돼 있다. 부자가 외양을 돌리고 인삼이 내양을 붙든다는 인식은 조선시대 의가들도 공유한 바 있으며, 조선 후기 《동의수세보원》에서도 인삼의 작용을 “益元氣而救脫(원기를 돕고 탈락을 구한다)”이라 하여 회양의 개념과 동일하게 설명했다. 이러한 문헌적 전통은 인삼의 대보원기가 단순히 ‘보(補)’의 개념이 아니라, 생명 기능이 정지될 위기에서 양기를 되살리는 응급성 보제(補劑)임을 의미한다. 실제로 《경악전서(景岳全書)》의 장경악은 “元氣者,生命之根本也。人蔘最能回復其脫(원기는 생명의 근본이며, 인삼은 그 탈락을 가장 잘 회복시킨다)”이라 하여 인삼이 원기의 소멸을 회복시키는 최고의 약이라고 칭했다. 대보원기와 회양구역은 같은 작용이다 그렇다면 왜 같은 작용을 하면서 부자는 ‘회양구역(回陽救逆)’이라 하고, 인삼은 ‘대보원기(大補元氣)’라 불렀을까. 이는 생리적 차이보다 한의학의 철학적 언어 체계에서 비롯된 구별이다. 부자는 불의 약이다. 강렬하고 외향적이며, 즉각적인 회복을 이끈다. 인삼은 생명의 근원으로서, 내향적이고 지속적인 회복을 담당한다. 같은 불이라도 부자의 불은 밖으로 타오르는 불이고, 인삼의 불은 안으로 오래 타는 불이다. 그래서 하나는 불을 붙이는 작용으로 ‘회양’, 다른 하나는 그 불을 지키는 작용으로 ‘대보원기’라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두 현상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부자의 회양이든 인삼의 대보원기든 결국 혈류가 회복되고, 체온이 오르고, 심장이 다시 박동하며, 생명 에너지가 재가동되는 현상이다. 현대 생리학으로 보면 이는 순환성 쇼크(circulatory shock) 상태에서 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고, 심박출량이 증가하며, 말초 혈류가 회복되는 과정에 해당한다. 부자의 주요 성분인 하이게나민(higenamine) 은 β-아드레날린 수용체를 자극하여 심근 수축력을 높이고, 말초 혈관을 확장시켜 순환 회복을 돕는다. 한의학적으로 말하면 부자가 외부의 순환망을 급히 열어 양기를 밖으로 퍼지게 한다면, 인삼은 내부의 중심 에너지망을 붙잡아 기운이 내부에서 회복되도록 한다. 인삼의 대표적 성분인 진세노사이드(ginsenoside Rg1, Rb1 등) 은 미토콘드리아 내 ATP 생산을 촉진하고 AMPK 경로를 활성화하여 전신 세포 대사를 재가동시킨다. 효능은 글자가 아니라 반응이다 한의학에서 효능은 문자의 뜻이 아니라 인체의 반응이다. 효능은 주치의 집합이며, 같은 병을 치료하면 같은 효능이고, 주치가 같으면 효능도 같다. 인삼의 대보원기와 부자의 회양구역은 주치가 동일하다. 사지궐랭, 맥미욕절, 한출기탈, 허탈 등이 그것이다. 표현만 다를 뿐 작용은 같은 생리적 현상이다. 결국 인삼의 대보원기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원기를 북돋는 보기약’이 아니라, 생명이 끊어지기 직전의 위기에서 내면의 불씨를 다시 살려내는 회양구역의 한 형태다. 다시 말해, 인삼의 대보원기는 강도의 표현이 아니라 작용의 방향을 나타내는 언어다. 부자의 불이 외부 순환을 돌린다면 인삼의 불은 내부의 중심을 붙든다. 두 약은 안과 밖에서 하나의 생명을 완성하는 짝이며, 고전의 언어는 그 차이를 구분해 두었다. 이제 효능을 다시 볼 때다. 효능은 문자가 아니라 생리의 기록이다. 인체의 반응과 시대의 임상 속에서 살아 움직여 온 언어다. 인삼의 대보원기와 부자의 회양구역은 같은 생명의 불을 바라보는 두 개의 이름일 뿐이다. 우리가 그 본뜻을 다시 이해할 때, 한의학의 효능은 추상적 수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재현 가능한 인체 반응으로 되살아날 것이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❽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한 후배 한의사가 내게 물었다. “세포나 동물실험에서 약리작용이 확인되면, 환자에게도 효과가 있을까요?” 단순한 질문 같지만, 실제 임상에서 환자를 마주하는 한의사라면 누구나 고민해 봤을 문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예스도, 노도 아니다. 약리작용은 임상효과의 보장이 아니지만, 무의미한 것도 아니다. 어떤 약리작용은 임상에서 상당히 높은 개연성으로 재현될 수 있고, 어떤 것은 실험실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결국 임상의가 약리학적 원리, 성분의 특성, 체내 대사 과정, 그리고 동물모델의 속성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 임상 근거가 부족하더라도 효과를 추측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특히 아직 임상시험이 풍부하지 않은 한약 분야에서 이러한 지식은 과학적 한의학을 실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토대다. 세포실험, 가능성을 보여주는 첫 단계 세포실험은 약리연구의 가장 앞단에 놓여 있다. 특정 성분을 세포에 처리했을 때 염증 매개물질이 줄거나 산화 스트레스가 완화되는 결과는 손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결과가 곧 임상효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농도의 벽이다. 세포실험에서 사용되는 농도는 인체 내에서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플라보노이드, 사포닌과 같은 성분은 위장관 흡수율이 낮고 간에서 빠르게 대사되기 때문에, 시험관 속 세포에 적용된 수준의 농도를 환자에게서 유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세포는 단순한 환경에서 특정 반응만을 보여줄 뿐, 면역·내분비·신경계가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인체의 생리학적 맥락을 반영하지 못한다. 세포에서 항산화 효과가 뚜렷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노화 억제나 만성질환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이미 많은 임상시험에서 증명됐다. 따라서 세포실험은 기전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신호일 수는 있으나, 임상효과를 보장하는 증거는 될 수 없다. 동물실험, 모델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 세포실험보다 임상과 한 걸음 더 가까운 것은 동물실험이다. 그러나 동물실험 역시 결과 자체보다 어떤 모델을 사용했는지를 살펴야 한다. 모델의 타당성이 곧 임상으로 이어질 개연성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고혈압 연구다. SHR(Spontaneously Hypertensive Rat)은 자연적으로 혈압이 상승하는 특성을 지니며, 병태가 사람의 본태성 고혈압과 매우 유사하다. 이 모델에서 혈압 강하 효과를 보인 약물은 실제 임상에서도 효과를 낼 확률이 높다. 실제로 수많은 항고혈압제가 SHR 모델을 거쳐 개발됐다. 반대로 치매 연구는 상황이 다르다. 알츠하이머 마우스 모델은 아밀로이드 단백의 축적은 재현할 수 있으나, 사람의 인지 저하와 같은 복잡한 병태는 반영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동물실험에서 수없이 성공한 후보 물질들이 임상시험에서는 번번이 실패했다. 중풍 연구에서 쓰이는 중대뇌동맥폐쇄(MCAO) 모델도 마찬가지다. 혈관을 기계적으로 막아 뇌경색을 유발하는 방식은 일정 부분 사람의 뇌졸중을 재현하지만, 손상을 지나치게 균일하고 과격하게 일으킨다. 동물에서 뚜렷한 효과가 나타나더라도, 임상에서는 기대보다 훨씬 적게 재현될 수 있다. 대사질환 연구에서는 고지방식이를 먹인 쥐 모델이 흔히 쓰인다. 이 모델은 쉽게 비만해지고 인슐린 저항성이 생기지만, 사람의 당뇨병처럼 유전적 요인, 환경, 생활습관이 얽힌 복합적인 병태를 그대로 반영하지는 못한다. 종양 연구에서 널리 쓰이는 이식종양 모델도 비슷하다. 암세포를 동물에 주입해 단기간에 성장시키는 방식은, 수년에 걸쳐 면역과 미세환경이 변하며 발전하는 사람의 암을 충실히 재현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동물에서 효과가 있어도 항암제의 임상 성공률은 극히 낮다. 결국 동물실험은 “효과가 있었는가”보다 “이 모델이 사람의 질환을 얼마나 닮았는가”를 따져야 의미가 있다. 임상의가 동물실험 결과를 읽을 때 가장 먼저 던져야 할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약동학, 임상효과의 문턱 좋은 모델에서 효과가 확인되었더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그대로 재현되는 것은 아니다. 약물이 체내에서 흡수되고, 간에서 대사되며, 혈액 속에서 일정 농도로 유지되는 전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에서는 혈중 농도가 잘 유지되지만, 사람에서는 간 대사가 지나치게 빨라 효과가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에는 대사를 거쳐 오히려 더 강력한 활성 대사체로 전환되기도 한다. 약동학적 차이는 약리작용의 임상 전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다. 특히 한약재 성분은 함량이 낮고 흡수율도 제한적이어서, 세포와 동물에서 관찰된 효과가 임상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경우가 그런 것은 아니다. 위점막에 직접 작용하는 성분은 혈중 농도가 낮더라도 국소적으로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작약이나 선복화 추출물이 위염 모델에서 소량으로도 효과를 보이는 것이 좋은 예다. 따라서 임상가는 약리작용을 해석할 때 반드시 이 약물이 전신 농도를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국소 작용만으로 충분한지를 구별해야 한다. 한약 연구의 특수성 양약은 대개 단일 성분 기반으로 개발된다. 따라서 성분별 약리작용과 임상효과를 비교적 일대일로 연결할 수 있다. 반면 한약은 수십 가지 성분이 동시에 존재하는 복합제제다. 이 때문에 단일 성분 연구로 전체 제제의 효과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성분 간 상호작용, 추출 조건, 제형 특성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특정 플라보노이드가 세포에서 항염 작용을 보였다 하더라도, 실제 탕약에서는 다른 성분들과의 상호작용으로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단일 성분의 함량이 극히 낮아 실험실에서 본 효과가 임상에서 나타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복잡성 때문에, 임상가는 더욱 성분의 약리작용과 체내 대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제형 전체의 작용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한약의 과학적 근거는 단일 성분 연구에 국한되지 않고, 제형과 임상 경험이 결합될 때 비로소 살아난다.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약리작용은 임상효과의 확증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임상시험이 부족한 한약 분야에서도 임상효과를 합리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혈압처럼 충실한 모델이 존재하는 영역에서는 연구 결과를 적극적으로 참고할 수 있고, 치매나 종양처럼 모델이 취약한 영역에서는 훨씬 더 신중해야 한다. 위점막 보호처럼 국소 작용이 가능한 경우는 낮은 용량으로도 임상적 의미를 충분히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임상의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세포실험과 동물실험이 각각 어떤 의미와 한계를 가지는지, 약물이 체내에서 어떤 흡수·대사 과정을 거치는지, 그리고 한약이라는 복합제제가 단일 성분 연구와 어떻게 다른지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임상의는 단순히 연구 데이터를 소비하는 존재가 아니다. 실험실의 결과를 환자의 몸속에서 일어날 가능성으로 해석하고, 그 개연성을 바탕으로 임상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다. 과학적 근거와 임상 경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읽어내는 눈이 바로 임상의의 무기다. 과학적 한의학은 지식의 소비가 아니라, 해석과 성찰 위에 선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❼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같은 ‘대황’이 아니다 – 금문대황과 종대황의 본질적 차이 같은 ‘대황’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해서 모두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임상에서 강력한 사하 작용을 기대할 수 있는 대황은 금문대황계에 속하는 약재들이다. 반면 종대황계는 이름은 비슷하지만, 약리 성분과 효능 면에서 전혀 다른 계열로 분류돼야 한다. 금문대황계는 전통적으로 의약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되어온 계통으로, 장엽대황(Rheum palmatum L.), 당고특대황(Rheum tanguticum Maxim. ex Balf.), 약용대황(Rheum officinale Baill.), 그리고 우리나라 백두산 자생종인 장군풀(Rheum coreanum Nakai)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 약재는 줄기 단면에 금색의 결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목질부가 단단하고 광택이 있어 감별이 용이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센노사이드, 레인, 에모딘과 같은 안트라퀴논 유도체가 고함량으로 함유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성분들이 장 연동운동을 촉진하고 수분 분비를 증가시켜, 복용 후 빠르고 강력한 사하 작용을 유도한다. 반면 종대황계의 대표적인 예는 우리나라 중북부 지역에 자생하는 종대황(Rheum undulatum L.)이다. 외관상 유사해 보일 수 있으나, 안트라퀴논 유도체의 함량이 극히 낮고, 대신 탄닌류나 플라보노이드계 성분이 많아 해열, 항염, 해독 작용에는 기여할 수 있으나, 장 운동 촉진이나 변비 개선과 같은 사하 작용은 거의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사하 목적의 처방에서는 반드시 금문대황계의 진짜 대황을 사용해야 하며, 종대황을 대황으로 간주하거나 대체해서는 안 된다. 끓이는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대황의 약효 – 전탕 시점이 바꾸는 사하 작용의 강도 대황은 어떤 품종이냐만큼이나 어떻게 끓이느냐에 따라서도 약효가 크게 달라지는 섬세한 약재다. 대표적인 예가 전탕 시간에 따른 사하 성분의 변화다. 센노사이드, 에모딘, 레인과 같은 대황의 주요 사하 성분들은 열에 민감하여, 오랫동안 끓이면 가수분해되거나 산화되어 사하 작용이 현저히 감소하게 된다. 따라서 급성 변비처럼 빠른 효과를 원할 경우에는 물이 거의 다 졸아들었을 때 대황을 넣는 ‘후하’ 방식이 전통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이는 단순한 조제 기술이 아니라, 성분의 열 안정성을 고려한 과학적 방식이다. 그러나 대황을 오래 끓인다고 해서 모든 약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센노사이드는 줄어들 수 있지만, 대황이 지닌 청열, 활혈 작용은 유지되거나 오히려 뚜렷해지는 경우도 있다. 다시 말해, 끓이는 시간은 단순히 약효의 강도를 조절하는 것이 아니라, 약효의 방향을 바꾸는 열쇠가 되는 셈이다. 술과 열로 다듬는 약성 – 포제가 바꾸는 대황의 쓰임과 기운 대황의 약성 변화는 포제법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특히 ‘주증’이나 ‘주자’처럼 술을 가해 찌거나 볶는 전통 포제법은 대황의 사하 성질을 누그러뜨리고, 청열이나 활혈 작용을 강조하는 데 유용하게 쓰인다. 술은 한의학에서 기운을 위로 끌어올리고 혈을 움직이는 승산의 작용을 가진 물질로 여겨지며, 약재의 성질을 부드럽게 조절하거나 특정 방향으로 끌어내는 데 쓰인다. 대황을 술에 증제하거나 자제하면, 센노사이드 함량은 줄어들지만 청열, 활혈, 해독 작용은 오히려 강화된다. 특히 어혈로 인한 복통이나 염증성 질환에 응용할 때는 이런 포제 대황이 더욱 적합하다. 이는 단순한 경험적 지혜를 넘어서, 열과 알코올이라는 두 화학적 에너지가 약재 내 유효 성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반영한 과학적 응용이다. 술은 대황 속에 숨어 있던 활혈 성분을 끌어올리고, 과도한 사하 작용은 억제하여 조화로운 약성을 만들어내는 승화와 조절의 매개로 작용하는 것이다. 대황을 제대로 쓰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들 대황은 단순히 ‘사하 작용을 일으키는 한 가지 약초’가 아니다. 그 효과는 한약재 중에서도 드물게 다양한 층위에서 갈라진다. 같은 대황이라도 품종이 금문대황계인지 종대황계인지에 따라 효과는 극명하게 달라진다. 또 끓이는 시간에 따라 사하 성분이 유지되거나 소실되며, 포제 방식에 따라 청열과 활혈의 방향성이 달라진다. 뿐만 아니라 같은 대황을 먹어도 환자마다 약효가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는 체질이 아니라 장내 미생물 조성 때문이다. 대황의 핵심 성분인 센노사이드는 장내 특정 미생물에 의해 활성화되어야 비로소 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황을 임상에서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첫째, 사용하는 대황이 금문대황계인지, 종대황계인지 분명히 감별해야 하며, 둘째, 끓이는 시점과 시간에 따라 원하는 약리 효과에 맞게 전탕법을 조정해야 하며, 셋째, 포제를 통해 사하 작용을 누그러뜨리거나 활혈 작용을 강화할 수 있는 응용력을 갖추어야 하며, 넷째, 환자의 장내 미생물 환경과 복약 타이밍을 고려해 약효 발현 지연이나 무반응 가능성을 사전에 점검해야 한다. 전통의 지혜와 현대 과학이 만나는 지점에 바로 대황이 있다. 앞으로도 그 치료적 잠재력은 더 깊어지고 넓어질 것이며, 개인에게 맞춘 정교한 처방을 가능케 할 중요한 약재로서, 계속해서 주목받게 될 것이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❻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대황, 단순한 사하약을 넘어 한의학에서 대황(大黃)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역시 사하, 즉 변비 치료일 것이다. 그러나 대황이라는 약재는 단순히 변비를 치료하는 약물이라는 좁은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다. 대황은 사하라는 효능만 제외하면 청열약으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청열사화(淸熱瀉火), 청습열(淸濕熱), 청열량혈(淸熱凉血), 청열해독(淸熱解毒) 등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 또 활혈거어(活血祛瘀) 효능도 강하다. 실제로 대황목단피탕, 인진호탕, 도인승기탕 등은 모두 사하보다는 청열과 활혈의 효능을 중심으로 활용된 예이다. 그래서 임상에서 대황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하약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청열, 활혈, 해독 등 다양한 효능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해야 한다. 대황이 임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똑같은 약재임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체질, 사용한 대황의 종류, 그리고 끓이는 시간과 포제법에 따라 효능이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탐구해보면 과학적 원리와 전통적 지혜가 정교하게 어우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 어떤 사람은 대황이 듣고, 어떤 사람은 듣지 않을까 – 사하 작용의 열쇠는 장내 미생물 대황은 누구에게나 변통을 터뜨리는 사하약으로 알려져 있지만, 임상에서는 예상과 다른 일이 종종 벌어진다. 같은 대황을 복용해도, 어떤 사람은 단번에 사하작용이 나타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며 “약발이 안 먹힌다”고 호소한다. 이런 차이는 흔히 체질 탓으로 돌려지지만, 최근 연구들은 보다 구체적인 생물학적 설명을 제시한다. 결정적 변수는 장내 미생물의 구성, 그중에서도 대황 속 센노사이드를 활성화시키는 세균이 얼마나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황의 주성분인 센노사이드 A와 B는 위와 소장에서 흡수되지 않고 대장까지 살아서 도달해야 진짜 약으로 전환되는 프리드러그(pro-drug)이다. 이 분자는 장내 미생물이 가진 베타글루코시다아제와 환원효소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레인 안트론(rhein anthrone)이라는 활성 대사체로 바뀌며, 이때부터 수분 분비 증가와 장 연동운동 촉진을 통해 사하 작용이 시작된다. 따라서 장내 미생물층이 풍부하고, 특히 센노사이드를 분해할 수 있는 특정 균주와 효소 활성이 충분한 사람은 대황 복용 후 비교적 빠른 배변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반면 항생제 복용, 스트레스, 식이 습관의 문제, 또는 해당 균이 부족한 경우에는 이 전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 있다. 이 같은 반응 차이는 단순한 장 건강의 문제라기보다, 개인의 장내 세균 생태계와 반응 민감도의 복합적 결과다. 또한 흔히 간과되지만, 대장내시경이나 건강검진 전 시행하는 장 세척 이후에도 대황의 효과는 현저히 감소한다. 인위적으로 장을 비운 이후에는 장내 미생물의 대부분이 일시적으로 씻겨나가기 때문에, 아무리 대황을 복용해도 그것을 약으로 바꾸어 줄 ‘효소 공장’이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검사 직후 대황을 복용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는 사례는 이런 배경에서 설명된다. 이 같은 개인차의 생물학적 근거를 밝힌 대표적인 연구가 바로 일본의 고바시(Kobashi) 연구진의 실험이다. 그들은 사람의 장내에서 분리한 수많은 균주 중, 오직 Bifidobacterium dentium과 B. adolescentis만이 센노사이드를 효과적으로 절단해 활성 대사체를 생성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이 균주들이 존재할 때는 센노사이드 함량이 감소하고, 레인 안트론 농도와 배변 빈도가 눈에 띄게 증가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센노사이드는 거의 변화 없이 배설됐다. 결국, 체질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졌던 사하 반응의 유무는 사실상 보이지 않는 체질, 즉 개인의 장내 미생물 생태계에 의해 결정된다. 대황은 누구나 복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약으로 바꿔줄 세균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약의 효과가 미생물이라는 생물학적 조건 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왜 대황은 바로 듣지 않을까? – 사하 작용까지 걸리는 시간의 과학 대황을 먹으면 곧바로 배변이 시작될 것처럼 기대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복용 후 수 시간의 지연이 일반적이다. 어떤 사람은 6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또 어떤 사람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 효과를 체감한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대황의 센노사이드는 즉시 작용하는 자극제가 아니라, 대장에 도달한 뒤 장내 미생물의 효소 작용을 통해 비로소 활성화되는 프리드러그이기 때문이다. 복용, 소화기관 통과, 대장 도달, 미생물 분해, 활성 대사체 전환, 약리 작용 발현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평균 6~12시간, 짧아도 4시간 이상이 걸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런 이유로 대황은 저녁에 먹고 다음 날 아침 효과를 본다는 방식으로 흔히 사용된다. 만약 복용 후 즉각적인 반응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몸 안에서 약으로 바뀌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이다. 게다가 이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장의 운동성이 느리거나, 장내 미생물층이 약해진 사람, 예를 들어 항생제 복용 중이거나 장청소를 받은 경우는 대황을 복용해도 사하 작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거나, 반응 시간이 매우 늦어질 수 있다. 실제로 장내 미생물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는 센노사이드가 전환되지 못해 그대로 배설되기도 한다. 결국 대황의 사하 작용은 약초 단독의 효과가 아니라, 장내 미생물과의 협업을 통해 완성되는 생물학적 과정이다. 이 지연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며, 우리 몸 안에서 약이 천천히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대황은 단순한 자극제가 아니라, 몸속 생태계와 소통하며 작용하는 복합적인 한약재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음 연재 예고 – 대황,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품종·전탕·포제가 바꾸는 약효의 방향 이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황은 단순한 사하약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섬세한 한약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2부에서는 같은 ‘대황’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약효를 내는 금문대황계와 종대황계의 결정적 차이, 그리고 끓이는 시간과 포제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약으로 바뀌는 대황의 변신 메커니즘을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대황을 단순히 ‘센노사이드가 들어 있는 약’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품종, 조제, 포제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한의학적 통찰과 과학적 근거를 함께 소개드리겠습니다. 하나의 한약재, 그러나 전혀 다른 쓰임. 2부에서 그 다채로운 얼굴을 확인해보세요. -
추도사(追悼辭), 故 이상인 교수님을 추모하며<br/> “본초학의 큰 별 져···부디 영면하시길 빕니다”[한의신문]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에서 오랜 세월 재직하시며 본초학의 발전을 이끌어 오신 이상인 교수님께서 7월3일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본초학의 큰 별이 떨어진 듯한 슬픔과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상인 교수님께서는 한의학의 본초학 분야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한약재의 효능과 기원 연구에 평생을 헌신하셨습니다. 특히 전통 본초학 지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한약재의 효능, 분류, 약리 작용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교수님은 <동의보감> 탕액편에 수록된 일부 향약 재료가 한·중·일 간에 기원상 차이가 있음을 밝혀내어, 잘못 전래된 약재 사용의 문제점을 바로잡는 계기를 마련하셨습니다. 또한 수많은 실험 연구를 통해 전통적인 본초학 이론의 과학적 타당성을 입증하고 발전시키는 데 앞장서 오셨습니다. 특히 교수님께서 1975년에 집필하신 국내 최초의 현대적 본초학 교과서인 『본초학』은 전국 한의과대학의 표준 교재로 널리 활용되며, 본초학 교육의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이후 1991년에는 전국 11개 한의과대학 공동교재 개발을 주도하시며 한의학 교육의 통일성과 질적 수준을 크게 높이셨습니다. 이와 같은 업적들로 이상인 교수님은 국내 본초학 분야에서 독보적 권위자로 자리매김하셨으며, 본초학의 표준화와 제형 개변을 위한 선구적인 길을 여셨습니다. 이상인 교수님은 또한 1978년 대한본초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과 제2대 회장을 연임하시면서 본초학 연구 공동체의 발전과 학술적 교류를 활발히 이끄셨습니다. 대한본초학회지를 창간하여 국내 본초학 연구의 학문적 기틀을 마련하셨으며,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여 오늘날 본초학이 더욱 단단히 뿌리내릴 수 있도록 헌신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식약처의 한약규격집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셨고, 한약 전탕 및 보관에 관한 실험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여 한약 표준화 연구의 초석을 닦으셨습니다. 특히 개별 전탕과 복합 전탕을 비교하여 약효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하신 것은, 현재 우리나라 보험약재 표준화 정책에 크게 기여한 연구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이상인 교수님을 처음 뵌 것은 본과 1학년 본초학 시간이었습니다. 교수님의 강의는 언제나 명료했고, 근엄한 모습 속에서도 정확성과 진지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본과 4학년이 되어 진로를 고민하던 시기에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본초학의 표준화와 제형 개변 연구에 뜻을 품게 되었으며, 결국 교수님 덕분에 본초학을 전공하고 연구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50대 후반에 의료 검사가 잘못되어 하반신이 마비되는 큰 어려움을 겪으셨고, 이후 퇴임하시어 개원하여 진료하시면서도 끝없이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셨습니다. 제가 찾아뵐 때마다 교수님은 한약재 관리 상태를 걱정하시고 표준화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제 교수님께서 평생을 바쳐 이루신 본초학의 표준화, 제형 개변, 약물 기원 정립에 대한 위대한 업적과 가르침은 우리 한의학계의 영원한 유산이 되어 후학들의 앞길을 환히 비춰줄 것입니다. 부디 교수님께서 모든 고통과 아픔을 내려놓으시고, 하늘에서 평안히 영면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교수님의 큰 뜻과 유지를 이어갈 수 있도록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❺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약을 다루는 현장에는 늘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공존한다. 하나는 전통의 경험과 직관이 쌓아 올린 복합 처방의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혈중 농도나 약물동태 곡선 같은 근대 약리학의 언어다. 환자의 몸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을 설명하려면 두 언어를 모두 알아두면 좋다. 그럴 때 흔히 제기되는 첫 질문이 “이 성분, 몸으로 얼마나 들어가느냐”이다. 그러나 한약 성분은 혈중 AUC(Area Under the Curve) 하나로는 전모를 보여 주지 않는다. 일부는 혈관으로 곧장 들어가서 전신 농도를 확보해야 효과를 내지만, 더 많은 성분은 장내 미생물이나 간 대사라는 우회로를 거쳐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작용하거나, 아예 흡수되지 않은 채 장관 내에서 역할을 다 한다. 숫자를 넘어선 총체적 시야가 필요한 이유다. 다섯 겹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복합 약물 탕제를 복용하면 첫 관문은 위·소장에서의 가수분해다. 다당·배당체가 잘게 쪼개지고, 지용성 성분은 단순 확산으로, 수용성 배당체는 운반체 단백질의 도움으로 장벽을 넘는다. 두 번째 관문은 장 상피 자체와 간에서 벌어지는 1차 대사다. 시토크롬 P450, UGT, SULT 계열 효소가 성분의 분자 구조를 바꾸어 놓는다. 세 번째 관문은 장내 미생물이다. 흡수되지 못한 고분자 배당체는 β‑글루코시다아제에 의해 소수성 아글리콘으로 변환돼야 비로소 장벽 투과성이 생긴다. 네 번째 관문은 재흡수다. 변환된 대사체가 장벽을 다시 넘어야 전신 순환계에 입성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과정이 끝난 뒤에야 면역·대사 조절 신호가 혈중과 조직으로 퍼져 나간다. 이러한 다층적 루트 때문에 단일 수치로 흡수를 재단하는 시도는 언제나 어딘가를 놓치기 쉽다. 혈중 농도를 확실히 확보해야 하는 대표 성분 갈근(葛根)의 푸에라린은 가장 많이 연구된 한약 플라보노이드다. 경구 생체이용률은 랫드 모델에서 약 7 %로 보고된다. 낮은 수치이지만 해당 연구에서 정맥 투여 시와 비교했을 때 조직 분포는 관상동맥, 뇌혈관까지 두루 퍼졌고, 반감기가 4~6 시간으로 길어 반복 투여 시 농도 누적이 가능하다는 점이 확인됐다. 갈근은 이렇게 생체이용율이 낮아 전통적으로 한 번에 비교적 많은 양을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고삼(苦參)의 알칼로이드인 마트린은 2 mg/kg 경구 투여 후 C_max 92 ng/mL, 절대 생체이용률 17 %로 보고됐으며 반감기가 3 시간가량이라 1일 3회 복용 설계로 전신 항바이러스·항섬유화 효과를 목표로 한다. 카페인은 더 극단적 예다. 45 분 이내에 99 %가 흡수되고 혈중 최고 농도에 도달한다. 이런 고흡수·고반감기 성분은 의도한 전신 작용을 얻는 데 유리하지만, 동시에 약물 상호작용과 C_max 급등 리스크를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장내 미생물 변환물이 주인공”인 성분 대황(大黃)의 센노사이드는 직접 흡수율이 사실상 0 %다. 대신 대장에서 특정 장내 미생물이 이를 ‘레인 안트론’이라는 활성형으로 전환해야 비로소 효과를 나타낸다. 이 과정은 주로 비피도박테리움 같은 유익균의 β‑글루코시다아제와 환원효소에 의해 이뤄진다. 따라서 장내 미생물 상태에 따라 동일한 용량의 센노사이드라도 반응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때 활성물질인 레인 안트론은 장 점막에 국소 자극을 주어 연동운동을 촉진하고, 일부는 혈류로 들어가 COX 억제를 통해 염증성 장 질환의 통증도 완화한다. 그래서 대장내시경 전 항생제나 장 세정제를 사용한 환자는 센노사이드 반응성이 저하될 수 있다. 만일 대황계 약물이 듣지 않는 만성 변비 환자의 경우, 유익균 보충이나 프리바이오틱스 병용을 통해 반응성을 회복할 수 있다. 비슷한 패턴은 황금(黃芩)의 바이칼린에서도 보인다. 경구 생체이용률이 2~4 % 수준이나 탈배당 후 형성되는 바이칼레인·바이칼레인‑7‑O‑글루쿠로니드가 NF‑κB 하위 신호를 억제해 강력한 항염 작용을 발휘한다. 게다가 이 대사체는 뇌혈관 장벽 투과성이 높아 신경 염증 질환 연구에서 주목받는다. 한약 성분과 장내 미생물의 ‘공동 제작’ 모델이 어떻게 전신 작용으로 이어지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다. ‘흡수되지 않아서’ 효과적인 성분 반대로, 흡수가 되지 않아 작용을 완성하는 성분도 있다. 망초(芒硝)는 황산나트륨 10수화물로, 경구 투여 시 장 점막으로 거의 흡수되지 않는다. 오히려 흡수되지 않는 덕분에 장 내강에 고삼투 환경을 만들어 수분을 끌어들여 변을 연하게 하고 장관 압력을 높인다. 연구에 따르면 설파트 이온은 장 융모를 쉽게 통과하지 못해 지속적인 삼투층을 형성해 준다. 같은 계열로는 마그네슘 설페이트, PEG, 락툴로스 등이 있으며, 이들은 ‘비흡수성 이온·분자’라는 점을 전략적으로 활용해 배변 촉진, 장 세정, 간성 뇌병증(암모니아 포집)까지 임상 범위를 넓힌다. 흡수율을 바꿀 수 있는 제형 공학 흡수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발효·효소 처리는 배당체를 아글리콘으로 전환시켜 장벽 투과성을 높인다. 둘째, 지질 나노입자나 고형 지질 캐리어는 소수성 성분을 림프 경로로 우회시켜 1차 간 대사를 피한다. 셋째, 피페린 같은 bio‑enhancer를 병용하면 약물 대사 효소나 P‑gp를 억제해 동반 투여 물질의 C_max를 2~5배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다만 와파린, 페니토인 등 협소한 치료역을 가진 약물과 동시 복용할 때는 INR·혈중 농도 모니터링이 필수다. 넷째, 염변경이나 프로드러그 설계로 용해도, 지질 친화도를 조절하는 기법이 있다. 베르베린의 경우 기반 염을 유산염에서 호박산염으로 바꾸었을 때 C_max가 2배 이상 상승했다는 보고가 있다 임상의가 놓치지 말아야 할 점검 리스트 첫째, 내가 기대하는 효능의 주성분이 원형 분자인가, 아니면 장내·간내에서 재탄생한 대사체인가. 둘째, 제형이나 병용 약물이 흡수율을 의도치 않게 끌어올려 독성 리스크를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셋째, 환자들에게 설명할 때 ‘낮은 흡수율=효능 부족’이라는 오해를 어떻게 과학적으로 해소할 것인가. 예를 들어 “센노사이드는 흡수가 안되니 효과가 없다.”라는 걱정은 “몸이 아니라 장내 미생물이 약을 완성한다”는 메시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한약 성분이 체내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일정 농도의 혈중 도달이 필요하다는 전통 약리학의 명제는 절반만 맞다. 어떤 성분은 낮은 흡수율이라도 장내 미생물 변환물이나 국소 장점막 작용으로 강력한 임상 효과를 만든다. 반면, 고흡수 성분은 전신 독성·약물 상호작용 리스크라는 짐을 함께 짊어진다. 결국 임상의가 설계해야 할 것은 단순한 ‘흡수율 올리기’가 아니라, 작용 위치·대사 형태·환자 안전성을 모두 묶어 내는 통전적 약력학 전략이다. 복합성을 과학으로 번역할 때, 한약은 전통과 현대가 손을 맞잡고도 여전히 설득력을 잃지 않는 치료 옵션으로 남을 수 있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❹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최근 한약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이 약은 항염작용이 있다”, “진통작용이 있다”, “면역을 증진시킨다”는 식의 설명은 이제 많은 한의사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이 됐다. 논문에 소개된 약리 기전을 근거로 말하거나, 동물실험 결과를 인용하며 약재의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이며, 한약이 정성에서 정량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 있다. 바로 “그 작용이 얼마나 강한가”라는 질문이다. 대부분의 설명은 약리 기전을 나열하는 데 그치고, 그 효능의 강도, 즉 어느 정도의 치료 반응을 기대할 수 있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항염작용이 있으니 염증에 쓸 수 있다”, “진통작용이 있으니 통증에 좋다”는 식의 단순한 연결로 처방이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과학화를 한다면서도 정작 과학적이어야 할 효능의 세기는 무시되거나 놓치는 것이다. 양방에서는 이 지점을 분명하게 짚고 간다. 바로 최고효능(Emax)이라는 개념이다. 이는 약물이 유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치료 효과를 의미한다. 어떤 약이 10mg에서 반응이 최고조에 도달하고, 그 이상 용량을 올려도 더 이상 효과가 늘지 않는다면, 그 시점이 바로 Emax다. 이후에는 부작용만 증가하게 된다. 양방에서는 이 개념을 기반으로 적절한 용량을 정하고, 병용 여부를 결정하고, 약물 설계와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한약에도 이 개념을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한약재가 동물실험에서 염증 지표를 15% 낮췄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약재는 급성기 염증을 강하게 억제하긴 어렵지만, 만성 염증 조절이나 예방적 관리에는 유용할 수 있다. 그러나 실험 수치는 언급하지 않고 “항염작용 있음”이라는 말만 반복하면, 그 약재의 임상적 쓰임새를 과대평가하거나, 반대로 저평가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필자의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있었다. 황련을 SHR 모델에 적용했을 때 혈압 강하 효과는 약 12~15% 수준이었다. 이는 양방의 일반적인 항고혈압제가 유도하는 30% 이상보다는 낮지만, 혈압이 소폭만 상승해도 두통이나 불면을 겪는 환자에게는 의미 있는 개선 효과가 될 수 있다. 희렴, 두충, 천마 등도 유사한 수준의 혈압 강하 효과를 보이는 약재들이다. 하지만 이런 약재들을 마치 혈압약처럼 단독 치료제로 사용할 경우, 환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이처럼 최고효능을 고려하지 않은 처방은 과학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전략 없는 약물 선택에 그칠 위험이 크다. ‘작용 있음’은 출발일 뿐이지, 도착점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작용이 어디까지 도달하는가”, 다시 말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한의사가 최고효능을 고려한다는 것은 단지 수치를 말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수치를 통해 임상 전략을 세우고, 환자와의 소통을 정직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약은 항염작용이 있지만 20% 수준이므로, 급성기보다는 만성 관리에 적합합니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약을 과학적으로, 설득력 있게 쓰는 방식이다. 한약은 그 자체로 복합적이고 섬세하며, 수치로 단순화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닌 의학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용의 강약을 말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마황이나 대황처럼 단독으로 빠른 반응을 유도하는 약재도 있고, 감초나 인삼처럼 완만한 효능으로 보조적 역할을 하는 약재도 있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이 체감의 차이를, 이제는 과학적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한약의 과학화는 더 이상 기전 설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제는 “이 약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이 약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느냐”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한약은 전략적인 임상 언어가 된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❸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약의 효능은 기미론(氣味論)의 전통적 관점과 현대 과학적 접근(약리학, 천연물화학, 시스템 약리학)을 융합하여 이해하고 연구해야 한다. 한의사가 임상 현장에서 처방을 할 때 가끔 듣게 되는 질문이 있다. “이 한약의 유효성분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은 전통적 한의학과 현대 과학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질문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한의학에서는 약재의 효능을 설명할 때 기미론(氣味論)을 이용한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기미론이란 기(氣)와 미(味)를 통해 약재의 효능을 해석하는 이론으로, 수천 년간 한약의 효과를 설명하는 핵심적인 개념이었다. 그래서 많은 한의사들이 이 질문에 대해 “한약은 성분으로 치료하지 않습니다.”라고 답하곤 한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생각해보자. 기미론에서 미(味), 즉 맛은 무엇인가? 맛이란 결국 여러 성분들이 복합적으로 섞인 화학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한약의 효능을 기미론으로 설명한다 하더라도 그 근본적 바탕은 결국 성분의 복합적 작용이다. 따라서 “한약은 성분으로 치료하지 않는다”는 말은 반만 맞는 이야기일 수 있다. 실제로 한약의 효능은 성분이 존재하고, 그 성분들의 복합적인 작용으로 인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어떤 성분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정확히 특정하지 못할 뿐이다. 한약 성분의 복합성과 상호작용의 중요성 현대 약리학과 천연물화학의 발전으로 한약의 성분을 더 세밀히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단일 성분이 아니라 여러 성분들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약효를 나타내는 것을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마황을 예로 들면, 마황에는 에페드린(ephedrine), 슈도에페드린(pseudoephedrine), 노레페드린(norephedrine) 등 다양한 알칼로이드가 포함되어 있다. 이 성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기관지 이완, 교감신경 활성화, 발한 작용 등의 다양한 효능을 나타낸다. 그런데 마황의 전통적 효능인 ‘산한해표(散寒解表)’는 이들 성분 각각의 독립적인 효능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복합 성분의 상호작용이 필수적이라는 점이 여기서 드러난다. 인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삼에는 약 50가지 이상의 진세노사이드(ginsenoside) 성분이 존재한다. 각각의 진세노사이드는 면역력 강화, 항염증, 항산화, 신경 보호, 피로 회복 등의 다양한 효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삼의 전체적인 ‘보기(補氣)’ 효능은 이 성분들의 복합적인 시너지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 특정 성분 하나만으로 인삼의 효능을 대표할 수 없는 것이다. 여러 성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전체적인 효능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한약의 효능연구에서 논리적 비약의 위험성 한약의 효능을 연구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논리적 비약이다. 특정 성분이 특정 효능을 나타냈다고 해서 이를 곧바로 한약 전체의 효능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오류를 범할 위험이 있다. 예를 들어 부자에서 하이겐아민(higenamine)이라는 성분이 강심 작용을 나타내지만, 이 성분 하나만으로 부자의 전통적 효능인 온리(溫裏)를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하이겐아민의 작용이 부자의 전체 효능 중 일부일 뿐이며, 이 작용 또한 성분 간의 복합적 상호작용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약 효능 연구의 올바른 접근 방법은 개별 성분의 약리학적 작용을 규명하고, 이렇게 밝혀진 여러 성분들이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여 전체 효능을 나타내는지를 지속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이런 접근 방식을 통해 한약의 효능에 대한 보다 정확하고 체계적인 이해를 얻을 수 있다. 한약의 효능을 이해하기 위한 미래연구 방향 한약의 성분 연구를 통해 효능을 밝히기 위해서는 다양한 최신 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다. 최근 주목받는 접근법 중 하나가 시스템 약리학(system phar macology)이다. 이는 복합 성분들이 여러 표적(target)에 동시 다발적으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체계적으로 규명하는 접근이다. 예를 들어 황기(Astragalus membranaceus)의 면역력 증강 효과가 아스트라갈로사이드(astragaloside)뿐 아니라 다당류(polysaccharide) 성분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나타난다는 연구가 있다. 이러한 현대적 접근 방식은 단일 성분의 효능 연구를 넘어서 성분 간 상호작용을 분석하고, 그 결과가 어떻게 전체 약효로 연결되는지를 규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 생물정보학과 네트워크 약리학(network pharmacology)을 이용한 연구 역시 활발히 진행 중이다. 이 방법은 성분 간의 상호작용과 효능을 데이터 기반으로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이를 통해 한약의 효능을 더욱 정확하게 규명하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결국 한약의 효능을 이해하는 최적의 방법은 개별 성분의 특성을 명확히 규명하는 것과 동시에 성분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내는 전체 효능의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한의학의 전통적 지혜와 현대 과학적 접근이 조화를 이루며 상호 보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약의 효능 연구가 이 방향으로 발전할 때, 우리는 전통적 한의학의 가치와 현대적 과학의 정확성을 함께 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❷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탕제와 환산제의 장단점 물을 이용해 약재를 끓여 추출하는 탕제(湯劑)는 전통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어 온 제형이다. 준비 시간이 길고 맛이 쓰다는 단점이 있지만, 물에 잘 녹는 성분(수용성 성분)을 효과적으로 추출해 빠른 흡수를 기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한의학적 치료의 대표적 방법으로 자리 잡아왔다. 그러나 물을 용매로 삼는 이상 비극성 물질을 충분히 용출해 내기는 쉽지 않다. 실제로 많은 한약재가 지닌 핵심 효능이 지용성·비극성 성분에 의존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이러한 성분들은 물과 화학적 친화성이 낮아 탕제로 끓여도 기대만큼 추출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환산제(丸散劑)는 약재를 곱게 분말화한 것이어서 극성·비극성 성분을 상대적으로 고르게 섭취할 수 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는 탕제가 아닌 형태로 내려오는 처방들이 많다. 예컨대 삼령백출산이나 오령산은 그 대표적인 사례로서, 산제 상태일 때의 약효가 더욱 잘 발현된다고 알려져 있다. 비극성 성분에 주목하라 예를 들면 길초근(쥐오줌풀)은 강력한 진정·수면 작용이 있음에도 전탕하면 효과가 급감하기 쉽다. 이 약재에 함유된 주요 활성 물질이 비극성 물질이어서 물에 녹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길초근은 알코올 추출 방식이나 산제 형태로 복용할 때 더 뚜렷한 효과가 나타난다. 오가피 역시 술에 담가 먹는 오가피주가 예로부터 잘 알려져 있는데, 이는 특정 트리테르페노이드나 리그난(lignan) 계열 성분이 물보다 알코올에 훨씬 잘 용출되기 때문이다. 당귀수산 같은 처방에서는 ‘주수상반(酒水相拌)’이라고 하여 술과 물을 섞어 약을 달이라는 전통적 지침이 발견되는데, 이는 알코올을 가미해 비극성 성분까지 더 많이 이끌어내고자 한 선조들의 경험적 지혜로 해석할 수 있다. 복령 또한 보통 산제나 분말 상태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유향(乳香)과 몰약(沒藥)은 수지성 물질이 주를 이루는데, 이들 역시 물이 아니라 술이나 기름에 푼 뒤 사용해야 지용성 성분을 온전히 섭취할 수 있다. 심지어 사향(麝香)처럼 열에 약하고 물에 녹지 않는 방향성 물질의 경우, 가루로 직접 복용하거나 환제에 소량 배합하는 식으로 사용해 왔다. 이렇듯 비극성 성분이 중요한 약재는 전탕만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환산제 또는 알코올 등 유기용매 추출물 형태로 쓰는 것이 전통적으로 권장되어 왔다. 탕제와 환산제의 약효 차이를 설명해 주는 화학·물리학 현대 화학·약리학의 발전으로, 각 성분의 극성 정도와 용해 특성, 열 안정성, 휘발성 등을 정량적으로 측정하고 비교할 수 있게 되면서, 전탕으로 확보되는 성분과 알코올성 혹은 기타 용매 추출에서 확보되는 성분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탕제와 환산제의 약효 차이는 화학적·물리적 원리로도 쉽게 설명된다. 물은 극성 용매(polar solvent)로서 극성 화합물을 잘 녹이지만, ‘like dissolves like(유유상종)’ 원리에 따라 지용성 물질에 대한 용해도는 낮다. 반면 알코올이나 에테르, 기름 등의 비극성 용매는 물에 녹지 않는 성분을 잘 추출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약재에 따라 ‘어떤 용매가 최적의 유효 성분 추출에 적합한가?’를 분석하는 일은 현대 한약 약리 연구에서 점차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극성 지수(polarity index), 분자량, 열 안정성, 휘발성 등에 대한 면밀한 측정을 통해 “전탕으로 추출되는 성분 vs 알코올 추출로 얻어지는 성분”을 정량적으로 파악하고, 임상적 효능이나 약력학을 비교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는 중이다. 다양한 제형, 추출방법의 선택과 한의학의 미래 오늘날에도 한의사는 환자의 상태와 목표로 하는 약리 작용에 맞춰 제형을 결정해야 한다. 환산제가 제시된 전통 처방을 단순히 탕제로 바꿔 쓸 때는 “속도가 더 빠르니까 문제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비극성·지용성 성분이 온전하지 않으면 기대했던 효과가 반감될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전통적으로 “탕제가 무조건 최고”라고 단정 지은 적이 없다. 우리 선조들은 “가루로 복용하라”, “술이나 식초에 담가 쓰라”, “기름에 볶아서 쓰라” 등 각 약재에 맞춰 제형과 조제 방법을 구분해왔다. 이런 전통적 지침들은 단순 편의가 아니라, 해당 약재나 처방의 본질적 효능을 온전히 이끌어내려는 경험적·실용적 지혜의 집약이다. 현대 과학의 분석 도구와 접목해 보면, 여러 본초학 문헌에 기록된 전통 방식이 실제로 유효 성분 추출률을 높이는 합리적인 방법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탕제와 환산제는 서로 다른 효능과 특징을 지닌 중요한 도구들이다. 물이든 알코올이든, 혹은 기타 용매이든 그 선택은 한약재의 성질과 환자의 상태, 그리고 추출하고자 하는 유효 성분의 특성에 달려 있다. 전통과 현대 과학을 조화롭게 접목한다면, 한의학은 훨씬 풍부한 치료 스펙트럼을 확보할 수 있고, 더 나은 임상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다양한 제형 선택의 폭을 넓히고, 각 제형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적재적소에 활용한다면, 한의학의 미래는 한층 더 밝아질 것이다. ▷김호철 교수는? 경희대 한의대 및 대학원에서 한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이후 서울의대 약리학교실, 미국 코넬의대 분자신경생물학실, 존스홉킨스의대 응급의학과, 중국 수도의대, 산동성중의병원, 베트남전통의약대학 등에서 객원교수로 연구와 교육을 수행했다. 현재는 경희한의대 본초학교실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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