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본란에서는 2022년 8월15일 광복 77주년을 맞아 독립운동 한의사들의 삶을 조명하고 의미를 되새겨 본다.
일제강점기 많은 한의사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힘썼다. 그 중에서는 독립군 한의 군의관으로서 치열한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의 생명을 지켜낸 한의사도 있다. 바로 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신준식 박사의 숙조부 신홍균 선생이다.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난 신홍균은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 가족을 데리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향한다. 자신 소유의 약 4000평 토지를 친척에게 위탁하고 홀연히 고향을 떠난 신홍균은 그곳에서 가업이자 생업인 의술을 펼치며 살았다.
[중국 동승촌 열사 기념비에 기록된 '조선독립군 대진단 신홍균']
◇김중건과의 만남
본토에서 일제의 탄압이 본격화됨에 따라 만주, 연해주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던 1916년 여름, 김중건(원종교를 창시해 항일무장투쟁을 펼친 독립운동가)이 자신의 부하를 이끌고 찾아왔다. 민족종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려는 김중건의 뜻에 감복한 신홍균은 1920년 5월 200여명의 청년들과 독립군 ‘대진단’을 창설한다.
대진단이 항일투쟁 및 독립운동가 양성을 시작한지 얼마 안가 일제는 봉오동·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북간도 지역 한인 학살을 자행했다. 이때 단장 김중건이 체포되는 등 대진단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으나, 신홍균이 이를 수습하고 새로운 단장으로서 흥업단, 광복단, 태극단 등 인근 독립군 부대와 연합해 무장투쟁을 이어나갔다. 또한 대진단은 도적으로부터 농민들을 지키는 등 한인 사회의 지지를 받으며 당시 지역 내 큰 영향을 끼친다.
그러던 1933년 3월 초, 한국독립군의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연합 제의가 들어왔다. 대진단은 이를 수락해 신홍균을 비롯한 정예병 50여명이 한국독립군에 합류한다. 군사력이 향상된 한국독립군은 이후 벌어진 사도하자·동경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신홍균은 당시 한의 군의관으로서 전투는 물론 부상병 치료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전자령 전투의 숨은 영웅
당시 중국 연길 왕청현 동북부 산악지대 등지에서 활동을 이어가던 한국독립군은 근방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이 연길현 방면으로 철수할 것이란 첩보를 입수했다. 이에 한국독립군은 중국인 항일 부대인 길림구국군과 연합해 일본군의 통과 예상 지점인 대전자령에 매복했다.
하지만 아침부터 쏟아진 폭우는 일본군의 철수를 지연시켰고, 이에 한중연합군의 매복시간은 늘어만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참호 속 빗물이 허리까지 넘치고 식량도 떨어져 가자 병사들의 사기는 급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신홍균은 숲 속에 자생하는 검은 버섯을 한아름 뜯어와 이렇게 말했다.
“이것 좀 잡수시오. 장마 끝에 돋는 검정 버섯인데 중국인들이 요리로 많이 애용하고 요기치풍(療飢治風)도 하지요. 이것 빗물에 씻어서 소금에 범벅했으니 잠시 요기는 되실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지청천은 굶주림에 고생하는 각 부대에 버섯을 먹여 재정비에 나설 것을 명령했다. 평소 약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신홍균의 기지로 사기를 잃어가던 병사들은 다시금 활력을 되찾게 됐다.
마침내 6월 30일 오후 1시경 일본군이 대전자령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기회를 포착한 한국독립군은 사격과 함께 바위를 굴려 자동차와 우마차를 파괴하는 등 적을 완전히 포위시켰다. 5시간 넘게 이어진 치열한 전투의 결과, 일본군은 130여명 이상 살상됐고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대부분의 병력이 줄행랑을 쳤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과 무기, 탄약, 피복, 식량 등 엄청난 물량의 노획품을 분배하고 부대를 재편성했다. 이처럼 한중연합군의 합작으로 일제에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대전자령 전투는 청산리대첩,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군 3대 대첩으로 꼽힌다.
하지만 대전자령 전투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의 공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8월 길림구국군 사령관 오의성은 한국독립군에게 무기의 절반을 넘기고 길림구국군에 합류할 것을 강요했다. 이를 거부당한 것에 앙심을 품은 오의성은 10월 13일 밤 한국독립군을 급습하게 되고 지청천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이때 신홍균이 목숨을 걸고 나섰다.
“내 나이 50이 되도록 독립운동을 위해 처자를 버리고 지청천 장군의 휘하에 들어와 섬겨 왔는데 장군을 잃게 되었으니 내 살아 무엇하랴? 이로써 목숨을 끊겠노라.”
신홍균은 이렇게 외치고 자결을 시도했다. 하지만 부질없는 목숨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고 신홍균의 일장 연설을 들은 길림구국군 사이에 불명예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됐다. 불리해져 가는 여론에 오의성은 결국 한국독립군들을 석방시킨다. 만약 신홍균이 나서지 않았다면 지청천은 훗날 임시정부 인사들과 함께 광복군을 설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후 신홍균은 병사들을 인솔해 항일투쟁을 지속했다. 중경 신문기자 갈적봉이 1945년 5월 펴낸 ‘조선혁명기’에는 “동북의 한국독립군은 신흘(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사용한 신홍균의 가명) 등이 인솔해 영안, 목릉, 밀산 등의 산림지대에서 항일 운동을 계속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부에서는 신홍균의 숭고한 독립운동 업적을 기려 2020년 11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약90년 만에 인정받게 된 신홍균의 서훈은 그의 종손인 자생한방병원 설립자 신준식 박사에게 전달됐다. 민족과 민족의학을 함께 지키고자 싸웠던 그의 의지는 선배 한의사로서의 모범이자 자생한방병원 설립 정신의 근간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