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속초9.6℃
  • 구름많음12.2℃
  • 맑음철원13.5℃
  • 맑음동두천14.0℃
  • 맑음파주14.1℃
  • 구름많음대관령9.8℃
  • 맑음춘천11.9℃
  • 연무백령도10.3℃
  • 구름많음북강릉14.6℃
  • 구름많음강릉15.8℃
  • 맑음동해12.9℃
  • 맑음서울16.2℃
  • 맑음인천14.2℃
  • 맑음원주15.1℃
  • 구름많음울릉도10.9℃
  • 맑음수원14.7℃
  • 맑음영월14.2℃
  • 맑음충주15.1℃
  • 맑음서산14.0℃
  • 맑음울진12.5℃
  • 맑음청주15.4℃
  • 맑음대전15.7℃
  • 맑음추풍령12.4℃
  • 맑음안동12.2℃
  • 맑음상주12.1℃
  • 연무포항12.8℃
  • 맑음군산15.6℃
  • 연무대구13.1℃
  • 맑음전주17.0℃
  • 연무울산12.7℃
  • 연무창원14.1℃
  • 구름많음광주16.5℃
  • 연무부산15.8℃
  • 구름많음통영14.1℃
  • 맑음목포15.4℃
  • 연무여수12.4℃
  • 흐림흑산도13.8℃
  • 맑음완도17.4℃
  • 구름많음고창17.4℃
  • 맑음순천14.2℃
  • 맑음홍성(예)15.8℃
  • 맑음14.5℃
  • 구름많음제주18.3℃
  • 구름많음고산16.4℃
  • 구름많음성산16.6℃
  • 구름많음서귀포17.7℃
  • 구름많음진주13.4℃
  • 맑음강화14.0℃
  • 맑음양평13.7℃
  • 맑음이천14.2℃
  • 구름많음인제10.8℃
  • 맑음홍천11.7℃
  • 맑음태백12.4℃
  • 맑음정선군11.1℃
  • 맑음제천12.7℃
  • 맑음보은13.8℃
  • 맑음천안14.3℃
  • 맑음보령17.0℃
  • 맑음부여14.5℃
  • 맑음금산13.9℃
  • 구름많음14.9℃
  • 맑음부안15.7℃
  • 맑음임실15.6℃
  • 구름많음정읍16.0℃
  • 맑음남원15.4℃
  • 맑음장수14.0℃
  • 구름많음고창군16.5℃
  • 맑음영광군16.7℃
  • 구름많음김해시15.6℃
  • 맑음순창군15.2℃
  • 구름많음북창원14.2℃
  • 구름많음양산시
  • 구름많음보성군14.3℃
  • 구름많음강진군14.5℃
  • 구름많음장흥15.6℃
  • 맑음해남16.1℃
  • 구름많음고흥15.5℃
  • 구름많음의령군12.1℃
  • 맑음함양군14.3℃
  • 구름많음광양시15.6℃
  • 구름많음진도군15.4℃
  • 맑음봉화12.2℃
  • 맑음영주12.6℃
  • 맑음문경12.1℃
  • 구름많음청송군13.6℃
  • 맑음영덕12.3℃
  • 맑음의성14.1℃
  • 맑음구미12.0℃
  • 맑음영천13.6℃
  • 구름많음경주시13.0℃
  • 맑음거창13.6℃
  • 맑음합천13.7℃
  • 구름많음밀양13.6℃
  • 구름많음산청13.9℃
  • 구름많음거제13.7℃
  • 구름많음남해11.8℃
  • 연무15.9℃
기상청 제공

2026년 03월 24일 (화)

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 (28)

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 (28)

B0042012061235991-1.jpg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한말의 학자 黃玹(1855〜1910)이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한말의 역사책인 『梅泉野錄』에 郭鍾錫(1864〜1919)이라는 인물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郭鍾錫의 기억력은 남보다 뛰어나 어떤 사람들은 그를 동의보감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 번만 보면 모두 암송하였으므로 그의 총명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예술을 통달하고 병법도 연구하였다. 그리고 河兼洛이라고 하는 사람은 武人으로 곽종석과 종유하여 항시 곽종석을 도와주었다. 그는 곽종석에게 병법을 배운 후 대원군과 내통하여 강계부사까지 지냈다. 곽종석은 이미 높은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경박한 무리들은 날마다 그의 옆에서 지껄이며 怪術을 가진 사람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싫어하여 태백산에 들어가 수년 동안 지내다가 다시 가야산에 들어가 살았고, 최후에는 거창 산중에 들어가 살았다.”



곽종석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 영남과 호남의 유생들의 연서를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호소문을 金昌淑을 통해 파리에 전달한 파리장서사건의 주인공이다. 어려서부터 유교경전을 공부하였고, 도가와 불가의 서적에도 밝았다고 한다. 25세에 李震相의 문인이 된 후로 학문에 전념하였고, 을미사변 이후로는 각국에 일본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보내기도 하였다.

곽종석 같은 大儒를 ‘동의보감’이라고 호칭한 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첫째, 곽종석 개인의 학문적 성향이다. 비록 그가 한의학에 대해 어떤 연구를 하였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어린 시절 도가와 불가의 서적도 연구한 점을 볼 때 학문적으로 상통하는 의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았을 가능성이 높다. 유학자임에도 ‘동의보감’이라는 의서로 그를 별명으로 불렀다는 것은 그가 의학 연구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둘째,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다는 점이 ‘동의보감’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억력이 뛰어난 능력과 『東醫寶鑑』의 뛰어난 점이 등치된다고 본 당시의 의식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 대해 곽종석 본인도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 번만 보면 모두 암송하였으므로 그의 총명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곽종석은 ‘동의보감’이라고 호칭될 만큼의 총명한 인물로서 그의 암송 능력은 이 책에 비견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셋째, 이 시기에 『東醫寶鑑』이라는 의서가 가지고 있었던 학문적 권위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곽종석같은 대학자를 ‘동의보감’이라는 의서의 이름으로 호칭하여도 당시 이에 대해 깊이 동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東醫寶鑑』은 당시 최고의 학문적 경지를 담고 있는 서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관련기사

가장 많이 본 뉴스

더보기
  • 오늘 인기기사
  • 주간 인기기사

최신뉴스

더보기

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