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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08일 (금)

최승훈 교수

최승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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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학의 화해세계(和諧世界)를 위하여

중국, ISO/TC249를 중의학 세계화 도구로 활용

세계화하자면 중국인들의 마음부터 세계화되어야



文革의 광풍에서 살아남아 재기한 등소평의 노선은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의 실용주의로 요약될 수 있으며, 이는 정치보다 경제가 우선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어 그는 1980년대 본격적으로 개방을 시작하면서 중국의 대외정책을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도광양회(韜光養晦)로 규정한 바 있다.



중국의 대외정책은 전통적으로 주변 국가들을 굴레나 고삐로 우마를 부리듯이 간접 통치한다는 기미정책(羈 政策)이었으나 구미에 비해 산업화와 시장경제에 뒤졌기 때문에 우선 내실을 도모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2003년 후진타오(胡錦濤)가 집권하면서 그동안의 경제 성장에 자신감을 얻어 중국은 국제사회에서 평화롭게 산처럼 우뚝 선다는 화평굴기(和平 起)의 대외정책으로 전환하였고, 곧이어 그가 2005년 9월 UN 창립 60주년 정상회의에서 ‘평화, 공동 번영의 화해세계 건설을 위해 노력하자’는 연설을 하면서 ‘和諧世界’를 공식적으로 천명하였다.



이는 중국 4세대 지도부의 內治 분야 국정 이념인 ‘화해사회’ 개념이 대외 전략으로 연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즉 그동안 축적된 국력을 바탕으로 외교 분야에서도 대립과 경쟁보다는 조화로운 국가관계 형성에 주력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 각국의 문화전통과 어우러지면서도 자기 입장은 지켜간다’는 ‘和而不同’의 정신을 외교에 접목한 것이 바로 ‘화해세계’의 개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和而不同’은 필자가 세계보건기구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에 근무하면서 전통의학의 표준화를 주도하는 가운데 발표하는 마지막 슬라이드에 항상 단골메뉴로 소개했던 <論語>의 한 구절이기도 하다.



최근 전통의학계는 국제적으로 소리 없는 전쟁을 치열하게 치르고 있다. WHO를 통해 중의학을 세계화하려 했던 중국의 의도가 여의치 않자, 중국은 국제표준화기구(International Organi zation for Standardization: ISO)로 방향을 틀어 중의학의 세계화를 꾀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은 2009년 8월 24~25일 북경에서 열린 한국·중국·일본·호주의 4개국 회의에서 ISO에 새로운 기술위원회(Technical Committee: TC)의 설립을 제안하였다. 중국은 그 기술위원회의 명칭을 중의학(traditional Chinese medicine: TCM)으로 한국과 일본은 Traditional Medicine (TM)이나 Traditional East Asian Medicine (TEAM)으로 제안하였으며, 업무범위는 의료기기, 안전성과 품질표준으로 제한하고 향후 확대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어 9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열린 ISO 제46차 Technical Management Board(TMB)에서는 ISO/TC249의 잠정적인 명칭을 TCM으로 하였으며, ISO/ TC249 제1차 총회에서 정식 명칭과 업무범위를 결정하도록 결의하였다.



지난해 8월 4개국이 참가한 북경회의는 World Federation of Chinese Medicine Societies(WFCMS: 세계중의학회연합회)가 주관하였는데, 그들의 거칠고 미숙한 회의 진행으로 중국의 의도가 실패로 끝났다.



올해 1월말 다시 중국정부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면서 19개국의 대표를 초청하고 상해중의약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ISO/TC249 비공식회의를 열어 명칭과 업무범위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꾀하였으나 분위기는 오히려 중국측에 점점 불리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다시 올해 5월 World Federatio n of Acupuncture-Moxibustion Societies (WFAS: 세계침구학회연합회)와의 준비회의를 거쳐 6월 7~8일 북경에서 ISO/ TC249 제1차 총회를 개최하였다.



중국측에 의해 선임된 ISO/TC249의 의장은 호주 출신의 약학 전공자로 호주정부의 식약청과 같은 Therapeutic Goods Association(TGA)에서 고위직 공무원을 지냈던 인물인데, 그는 전통의학에 대한 경험과 식견이 없고 ISO업무에도 문외한이어서 회의 내내 중국측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 회의 도중 한국 대표로 참석한 필자로부터 회의의 진행을 중립적으로 하라는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회의 분위기는 한국과 일본이 중국과 극한 대립을 하면서 독일, 미국, 호주, 오스트리아가 한·일에 우호적이고, 나머지 캐나다, 이스라엘,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 유럽의 국가 대표들은 중국의 전위부대 역할을 하였다.



이번 총회에서는 ISO/TC249의 liaison 기구로 WHO와 ISO/TC215, WFCMS, WFAS가 승인되었다. 한국과 일본이 WFCMS와 WFAS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었으나, 의장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WFCMS와 WFAS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다만 향후 실무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중국 측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학창시절 공부했던 독일어교과서에 기억나는 문장이 있다. 사람은 개와 고양이를 유용한(nutzlich) 동물이라 생각하는데, 막상 고양이는 사람을 유용한 동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비유하기가 뭐하지만, ISO/TC249가 사람이라 한다면 WHO나 ISO/TC215는 개에 해당하고, WFAS나 WFCMS는 고양이에 해당한다고나 할까?

그동안 중국측이 ISO/TC249에 일관되게 제시한 업무범위는 중의학과 침구의 세계화를 겨냥해 만든 WFCMS와 WFAS의 업무범위를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중국은 오랜 세월 WFAS나 WFCMS를 앞세워 중의학의 세계화를 꾀하였지만, 그 한계를 절감하였고, 대신 이제는 ISO/TC249를 중의학의 세계화를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코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WFAS나 WFCMS에서 중국 위주로 행했던 관행과 방식을 ISO/TC249에서 그대로 자행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WFCMS와 WFAS가 ISO/TC249와 협력하여 일하게 되면 투명하고 공정한 국제사회의 도마 위에 올라 오히려 망신당할 수 있음을 그들은 알아야 한다.



이번 총회에서도 그간 불투명하고 불공정했던 WFAS의 행태가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들의 정식 영문 명칭을 WFAS 대표들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던 것도 웃음거리가 되었다.



결국 ISO/TC249 1차 총회에서 명칭의 결정을 차기 총회로 미루었고, 업무범위도 대폭 축소시켜 안전 및 품질관리 표준을 우선 대상으로 결정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긴밀한 공조체제에 의해 중국의 의도는 또 다시 깨지고 만 셈이다. 전통의학의 내용으로 보자면 한국은 중국과 가까운데, 현재 외교적으로는 한국이 일본과 전례 없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향후 중국은 계속해서 그들의 목표를 관철시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 공세를 펼칠 것이다. 그러나 점차 국제무대에 노출될수록 구태의연하고 일방적인 중국의 입장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첫날 회의를 마치고 저녁 만찬에 자리를 같이 한 중국 대표는 오래 전부터 친구로 지내던 필자에게 이같은 국가간 극한 대립은 정말 낭비이고 괴롭다고 하면서 하루 빨리 원래의 연구 활동으로 복귀하고 싶다며 고충을 토로했고, 필자도 전적으로 공감하였다.



총회 둘째 날 예정 시간을 넘긴 회의의 마지막에 마치 경쟁하듯이 명칭은 반드시 중의학이어야만 한다고 소리 높여 강변하는 중국 대표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 사회의 경직된 단면을 본다. 절충이나 타협의 여지없이 임무의 관철만이 유일하게 주어진 그들의 절박한 외침은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었다.



마치 불가능해 보였던 침구경혈위치의 통일이 WHO에서 가능했었던 것에 비해, 내용적으로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 과제들이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는 ISO/TC249를 보면서 국제 관계는 상호 신뢰와 조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을 절감케 된다.



자신은 예외로 하고 타인에게만 강요하는 변화가 실패할 수밖에 없듯이, 세계화를 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먼저 세계화되어 있어야만 한다.

중의학을 세계화하자면 그를 추진하는 중국인들의 마음가짐부터 세계화되어 있어야만 한다.

“허씨에쓰지에” 和諧世界를 꿈꾸는 후진타오 주석의 외침이 그들에게는 허황된 구호로만 들리는 듯 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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