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16일 치러진 2009년도 제64회 한의사 국가시험 결과, 888명이 합격했다. 모두 929명이 응시했었다. 10여명에 이르는 탈북자 수험생도 있었다.
이 가운데 국내 한의대를 나오지 않고 북한의 의대를 졸업한 학력이 인정돼 시험에 응시한 수험생은 2명이었다. 하지만 합격의 영예는 단 한사람만이 안았다. 이은지(33)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씨는 함흥의학대학의 고려학부를 졸업한 경력이 우리 정부에 의해 인정돼 시험에 응시, 합격할 수 있었다. 서울 종로구 소재 100년한의원 석영환 원장(1999년 합격)에 이은 두 번째다. 석 원장은 평양의학대학 고려의학부를 졸업한 바 있다.
나머지 몇 명에 이르는 탈북자 출신의 한의사는 모두 국내에서 한의대를 나와 국가시험에 응시한 경우다.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조차 정확히 몇 명의 탈북 한의사가 시험에 합격했는지를 알 수 없다. 다른 탈북 합격자들은 국내 한의대에 입학해 국내 한의대생 자격으로 시험을 보았고, 탈북자 출신이라는 점이 노출되는 것을 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국시원에서도 굳이 이들을 탈북자 출신의 한의사로 분류하고 있지 않다.
“내 만약 짧은 한 순간이라도 안일과 유혹에 빠지면 인생은 천년(千年)을 잃고, 삶의 목표는 만리(萬里)로 아득하리.” 이씨의 마음 속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그만의 신조다.
“다음에 기회가 또 있을 것이라는 안일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정말 노력했다. 이번 밖에는 기회가 없다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혹독하게 몰아 부쳤다. 그렇기에 합격자 명단에서 나의 이름을 확인했을 때 너무도 기뻤다. 뭔가 해냈구나라는 뿌듯함에 전율했다.”
남한 입국 후 5년 만에 이룬 쾌거였다. 그는 2004년 희망과 자유를 찾아 남한의 품에 안겼다. 작고하신 부친을 빼고 어머니와 세 자매 등 한 가족 모두가 안착했다. 이후 2006년에는 결혼을 했고, 이듬해에는 아름다운 공주를 낳았다. 그리고 올해 대한민국 한의사라는 꿈을 일궜다. 사선(死線)을 넘어 희망(希望)을 쏜 셈이다.
얼핏보면 순탄한 여정 같다. 하지만 그는 산과도 같은 큰 고통을 넘었다. 탈북 전 북한국경수비대에 체포돼 수형생활도 했다. 삶과 죽음의 교차점을 보았다. 생(生) 바로 곁에 사(死)가 있었고, 사(死) 바로 곁에 생(生)이 있음을 느꼈다. 남한에 닿기까지의 절박한 심정과 고초, 그리고 국내 정부기관으로부터 수험자격을 인정받기 위해 견뎌내야 했던 수없는 조사과정. 그러나 이 시절을 결코 고난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희망을 찾는 삶의 한 과정으로 여겼을 뿐이다.
오히려 마음 고생이 극심했던 것은 엉뚱하게도 시험공부를 하는 과정이었다.
“국내 한의사국시가 객관식 형태인 것과는 달리 북한의 의대 시험은 주관식으로 출제된다. 그렇기에 객관식 형태의 모의시험을 단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출제 유형도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전국에 있는 한의대를 발이 부르트도록 찾아 다니며 출제 유형 등 시험에 관한 정보를 알아보려 했으나 너무도 강한 폐쇄의 벽에만 부딪쳤다. 외부인에게는 철저하게 차단된 정보, 그 정보를 알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하며 다녔던 시절이 너무 힘들었다. 때문에 출제 유형을 파악하는 것을 포기했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한의학 관련 서적을 달달 외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밤낮없이 외웠다. 암흑에서 무엇인가 하나라도 잡아 보겠다는 심정으로 외우고 외웠다. 몸은 자유인이나 탈북인은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한의사가 된 이상 그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는 또 다른 꿈을 꾼다.
“북한에서 고려학부를 졸업했고, 함흥 도립병원에서 2년간 고려의사로 근무했다. 북한에서의 고려의학 공부와 임상경험은 나만의 특성화라 할 수 있다. 여기에 한국 한의학을 열심히 배워 남과 북한의 한의학 장점을 살리는 좋은 한의사로 성장하고 싶다.”
그러나 한의학의 임상기술을 깊이 있게 배우고 싶은 그에게는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있다. 탈북 이후 독학으로 시험공부에만 매진하다 보니 국내의 한의 관련 인맥이 전무하다는 점이다.
때문에 취업부터가 당장의 고민이다. 어느 곳에 자신의 처지를 호소해야 할지 막막하다. “훌륭한 한의사 선생님을 만나 열심히 배우고 싶다. 남·북한 한의학의 장점을 효과적으로 접목해 환자들의 아픔을 치료하고 싶다. 또 학회에도 가입해 임상만이 아닌 학문적으로도 끊임없이 한의학을 탐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