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9 조선통신사 국제학술심포지엄 上
사단법인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가 주최하고 조선통신사학회가 주관하는 ‘2009 조선통신사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조선통신사와 한·일 문화 교류’를 주제로 지난 1일 부산광역시청 국제회의실에서 개최되었다.
매년 5월을 전후하여 부산에서는 조선통신사 축제가 열린다. 금년에도 행사 첫날에 ‘국제학술심포지엄’이 부산광역시청에서 있었고, 둘째 날에는 험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떠나는 조선통신사 일행의 무사를 기원하는 ‘해신제(海神祭)’가 부산 동구 영가대에서 펼쳐졌다. 마지막 날에는 용두산 공원 및 광복로 일원에서 거리 퍼포먼스 및 퍼레이드 등의 공연이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통신사 축제가 펼쳐지는 동안에 한국과 일본의 문화단체들에 의한 문화공연이 계속 이어졌다. 특히 금년에는 일본 인형 전시회와 일본 행렬 등이 펼쳐졌으며 마침 일본의 ‘골든 위크’를 맞이해 한국을 찾은 일본 관광객들이 매우 많았다.
필자는 2006년 조선통신사 문화사업회가 주관한 ‘조선통신사 뱃길 여정’에 참여한 바 있었는데, 당시 여정을 마치고 한의신문에 기고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당시 과감하게 한의원 문을 닫고 긴 여정을 감행하게 된 계기로는 우선 학위논문을 작성하기 위하여 현지를 답사하고자 한 목적이 컸고,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조선통신사 사행에 참여한 양의(良醫)와 의원(醫員)들의 자취를 느끼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결국 조선통신사의 의학문답 기록을 주제로 문헌연구 논문을 통해 한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조선통신사학회로부터 토론자 자격으로 정식 초청을 받아 이번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사학·문학·요리 분야의 조선통신사 전문가로 알려진 한국과 일본 연구자들의 주제 발표가 있었고, 필자는 그 중에서 제2주제였던 ‘18세기 전반기 통신사 醫學筆談의 전개와 특성’에 대해 발표한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김형태 교수의 醫學筆談 연구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먼저 우리 한의계에서는 조선통신사라는 명칭이 다소 생소하게 들릴 수 있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조선이 일본에 파견한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덕천막부 수립 이후인 1607년부터 1811년까지 모두 12차례 파견되었다. 이중 일본의사와의 의학문답을 나눈 기록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사행은 신묘사행(1711년), 기해사행(1719년), 무진사행(1748년), 계미사행(1763년) 등 네 차례의 사행이다. 필자는 이번 국제학술심포지엄 토론에서 이를 ‘빅4 사행’으로 명명하였다.
보통 조선에서 파견하는 조선통신사의 인원은 적을 때는 260명, 많을 때는 500명 정도였으며 이 인원들을 영접하기 위해 일본에서는 엄청난 자금을 투자하였고 많은 인원을 동원하였다. 보통 사행 구성에는 정사·부사·종사관이라 부르는 3사가 있었고, 그 아래에 제술관과 서기, 양의와 의원 그리고 여러 수행원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 후의 조선통신사는 본래 豊臣秀吉의 뒤를 이은 德川家康이 조선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회복하기 위해 조선에 사절단을 요청한 일종의 정치적인 목적에서 출발하였지만, 이후 문화 교류의 의미가 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당시 조선통신사는 막부는 물론이고 각 영주를 비롯하여 의사, 유학자, 상인, 일반서민 등에 이르기까지 관심이 집중되었다. 소위 ‘한류의 열풍’이라고 부를 만큼 그 열기는 대단히 뜨거웠다.
특히, 일본의 유학자와 의사들은 조선통신사 사절과의 접촉과 교류를 종신의 영예로 알고 조선 사절이 객관에 머물 때마다 앞 다투어 면접을 요청하고 의학문답과 시문창화를 했으며, 서화의 휘호를 구하였다. 예컨대, 18세기 일본의 대학자였던 新井白石의 경우는 그의 저술에 사행에 참여한 조선의 문사가 서문을 써줌으로써 그것을 계기로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처럼 조선통신사에 참여한 유학자 혹은 의사들과의 만남은 곧 출세의 지름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인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며 수용하고자 했던 분야는 조선의 선진 의료기술과 『의림촬요』와 『동의보감』으로 대표되는 조선의서, 인삼과 같은 약물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당시 면담을 신청한 일본인들 중에는 의사가 대단히 많았고, 매번 사행 때마다 조선의사와 일본의사간의 대담내용을 정리한 이른바 의학문답 기록의 서적이 다수 저술되었다.
이러한 의학문답 기록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2003년 안상우 교수(한국한의학연구원)를 중심으로 실시한 동아시아 전통의학권 소재 한국본 의학문헌 공동조사연구과정의 일환으로 일본에 산재해 있는 관련 사료들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의학문답 기록의 자료들이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개최된 ‘국제 동아시아 전통의학 학술대회’ 이후 조선통신사 관련 의학사료 발굴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이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었다.
최초의 연구는 차웅석 교수(경희대 의사학교실)가 소위 ‘빅4 사행’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1711년 신묘사행 때의 의학문답 기록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조선 후기 한의학이 『동의보감』을 중심으로 형성되어갔다’는 의서를 중심으로 한 학계의 논증을 의학문답 기록을 분석하는 방식으로 입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