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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09일 (토)

정재현 공중보건한의사

정재현 공중보건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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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체질의학회 국제학술대회 上



백일기도, 백일잔치, 수능백일, 국시백일... 우리 주위에는 수없이 많은 ‘백일’을 기념하는 날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백일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석 달 남짓한 그리 짧지 않은 그 시간이 현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오묘한 무게를 지닌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들은 새해를 맞이하며 금연, 금주, 다이어트, 독서, 여유, 효도, 가족과의 오붓한 시간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새해의 목표들을 세우곤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목표들 중에서 백일의 무게를 견디어 내고 살아남아 현실을 바꾸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칼바람 불어오던 1월의 어느 날, 소복이 쌓인 눈을 밟으며 들어간 국가고시 시험장... 지난 6년간의 노력을 매듭짓는 시험을 무사히 치르고, 합격통지서를 받으며 감격에 겨워 세웠던 많은 다짐들... 이제 와서 그 다짐들을 돌이켜 보면 이내 부끄러워집니다.



여수 돌산에서의 진료 의외의 효과 많아



어엿한 한의사로서 내딛는 첫 걸음, 특히 국가의 부름에 성실히 임하여 공중보건한의사로서 내딛는 첫 걸음에 저라고 어찌 다짐과 결의가 없었겠습니까. 열손가락으로 이루 다 헤아리기 힘들던 제 자신과의 약속은 백일은 커녕 채 두어 달의 무게도 견디지 못하고 이리 저리 부대껴 잊혀진지 오래였습니다.

저는 2009년 4월20일을 기하여 전남 여수시 우두보건지소 공중보건한의사로서 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아직 어수룩하기만 한 초짜 한의사에게 주저 없이 몸과 마음을 맡겨오는 어르신들이 어찌 그리도 많던 지요.





이 곳 여수 돌산은 수산업과 농업에 종사하시는 할머님, 할아버님들이 많습니다. 뱃일과 농사일은 제가 상상해온 것 이상으로 거칠고 힘든 것이었습니다. 어수룩하나마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놓은 침이 의외의 효과를 내었던 것인지, 예전보다 훨씬 몸을 가누기 수월해졌다며 여름감자, 옥수수, 보리떡을 머리에 이고 내원하여 잘 부탁한다 인사를 건네시는 환자분들에게 힘을 얻어 열심히 진료해 오던 차였습니다.



공보의 원칙적으로 6개월간 출국 금지



부임 초기에는 하루 네 다섯 명을 헤아리던 환자 수가 나날이 늘어, 진료 두 달 째 접어들던 지난 7월 초에는 하루 서른 명을 넘어서더군요. 문제는 그 때부터였나 봅니다. 짧은 실력과 미숙한 솜씨에 더 이상 호전을 보이지 않는 분들이 하나 둘 생겨났습니다.



어디어디 새로 온 한의사가 침을 잘 놓더라는, 시골의 순박하면서도 무서운 입소문에 그저 허리 다리 아프신 근골격계 환자가 아닌, 교과서에서도 본 적이 있는지 없는지 생소하기만 한 병고를 제게 호소하시는 난감한 환자분들도 생겨났습니다.



우선 누워 계시라며 더듬더듬 이리저리 책이라도 찾아 볼 수 있는 여유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눈에 띄게 늘어난 환자 수에 줄어든 일인당 진료 시간은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갔습니다. 좋은 마음으로 성심성의껏 진료에 임하겠다던 다짐은 그렇게 서서히 지쳐갔나 봅니다. 문득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가 싶더니, 분주히 책을 뒤져보던 열정이 어느 샌가 사라지고, 환자분들께 건네는 말이 점점 짧고, 무뚝뚝하고 거칠어지기 시작하더군요.



급기야는 진료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거슬려오고, 이제 좀 덜 왔으면, 나를 좀 덜 찾았으면 하는 불손한 생각이 머리에 맴도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겨우 두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경건한 마음으로 임했던 초발심은 온데간데없는, 환자를 귀찮아하는 게으른 공중보건한의사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제게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일본에서 열리는 ‘사상체질의학회 하계 국제학술대회’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워낙 지쳐있던 터라 사실 학회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제게는 큰 부담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더군다나 저는 신규 공중보건한의사이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6개월간 출국이 금지되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외규정상 해외학술대회의 연사 또는 발표자인 경우에 한하여 출국을 허한다는 병무청의 차디찬 답변도 돌아온 상황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순간에 제게는 갈림길이었습니다. 일상에 지쳐 대강대강 진료하고 좀 쉬어보자는 생각도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하루조차 넘기기가 이렇게 벅찬데, 발표 준비까지 해서 참가한다는 것이 쉽게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짧지 않은 고민의 시간이 있었고, 결국 제가 내린 결론은 참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제 스스로도 심기일전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기왕 힘든 상황, 물러서지 말고 한 걸음 내딛어 정면으로 부딪혀 보자, 하는 마음을 먹었던 듯 생각됩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진료가 있어 퇴근하고 나서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습니다. 금요일 오후, 한 주를 마무리하고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던 때, 주말이나마 편하게 쉬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러가며 밤새워 포스터 준비를 했고, 그렇게 여러 주말을 컴퓨터와 씨름하여 세상에 내어놓기 부끄러운 조촐한 포스터 한 장이 완성되었습니다. 출국을 가로막던 보건소, 병무청과 씨름해 가며 결국 허가를 받고, 예쁘게 출력된 포스터를 받아들던 순간은 제게 짜릿한 희열의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익숙한 환경 벗어나 한계 넘을 수 있던 기회



제게 이번 학회 참석은 ‘일본으로 향한다’는 의미 보다는 ‘한국을 떠난다’는 의미가 더 컸던 듯합니다. 용기 내어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낯선 땅을 디딜 때, 비로소 스스로 그어 놓았던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던지요? 어렵게 참석한 학술대회는 전라남도 여수 돌산의 우물 안 개구리로 굳어져 가던 제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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