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로 원장
천안 약선당한의원<한의학당 회장>
몇 년 전만해도 우리 주변에는 소위 ‘구멍가게’라는게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어렸을 때 빠듯한 용돈으로 군것질을 하던 그런 가게들은 대형할인마트에 밀려 이제는 추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지금 서양의학이 처해 있는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형병원들은 계속 덩치를 키워가고, 개인이 운영하는 영세한 의원들은 대형병원을 선호하는 환자들의 발길을 돌리지 못해 경영압박에 시달리는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그들의 생존전략은 대형병원과 경쟁하기보다는 건강보조식품으로 둔갑한 한약과 IMS로 이름을 바꾼 침을 이용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한의계와의 마찰은 필연입니다. 결국은 약육강식의 논리로써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지요.
그럼 우리 한의계의 현실은 어떨까요?
한의계 역시 대형화의 물결을 피해갈 수 없어서, 대형 프랜차이즈 한의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은 개인 한의원들과의 갈등을 초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싫든 좋든 지금의 한의학 역시 서양의학의 처지와 비슷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안으로는 대형화 추세에, 밖으로는 서양의학에, 더하여 무면허 업자(돌팔이)에 둘러쌓여 내우외환에 시달리는 한의계는 생존기반 전체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향후 우리 한의계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1900년대초 중국 중서의회통파들의 고뇌를 지금의 상황과 잘 비교해보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당종해와 같은 중의사들은 전염병을 치료하는 서양의학의 기술을 보고 큰 쇼크에 빠집니다. 한편으로는 중국의 전통의학이 최고라 하며 복고를 외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의학의 염증개념을 한약처방에 응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지피지기를 통해서 전통의학의 자리를 찾아야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새 빈의협이나 KOMA에는 ‘현대의학의 역사’나 ‘나는 현대의학을 믿지 않는다’ 등의 서양의학의 한계를 보여주는 책들이 소개되더군요.
그런 책을 읽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긴 하지만, 그런 책을 읽고난 소감은 ‘서양의학이 그렇지 뭐, 역시 한의학이 최고야’ 하는 전혀 대안 없는 비판과 자기만족만으로 가득합니다. 서양의학이든 한의학이든 결국은 인체를 들여다보는 체계이지,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라는 식의 흑백논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서양의학과 한의학의 갈등과 대형화 추세 등 이 모든 사건의 피해자는 한의사와 양의사가 아니라 환자입니다.
결국 한의학이 살아남고 한의사가 한의학의 주체가 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해결방안은 철저하게 환자중심의 의학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양의학과 한의학 사이에 상호존중하는 마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상대방 의학에 대해 모르면 모르는 만큼 존중해주어야 하고, 상대방 의학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정확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상대방 의학을 활용하고자 하면 제도적인 절차를 밟아서 면허를 획득하는 것이 민주적인 절차일 것입니다.
그 다음은 치료율을 높여야 합니다.
서양의학 나름대로 우수한 점과 동시에 많은 제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암이나 난치병과 같은 질병을 치료하면 좋겠지만, 쉽게 한의학만 가지고 치료할 수 있는 질환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해서 치료율을 높여야 한의학의 저변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한의학도 살고 서양의학도 사는 윈-윈 전략이 되고, 더 나아가 21세기에 부흥하는 신한의학을 창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