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의 공공성’ 만으로 개방 ‘해일’ 피할 수 없어”
2005년 3월에 정부는 WTO 서비스 협상의 의제로 법률, 건설, 금융, 출판 부문을 포함시키고 시청각과 보건의료 부문은 제외하였다. 이로서 한의계는 숨을 돌릴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보건의료 부문의 시장개방이 단순히 2005년의 일로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처지로 보아 의료시장개방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한의계도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철저한 이해와 대응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있다.
한국은 근본적으로 해외시장진출을 통해 먹고 살아야할 나라이다. 이 때문에 1960년대부터 소위 수출주도형 산업화를 추진하였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바 있다. 이 발전전략은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되리라고 본다.
해외시장의 진출을 주요 발전전략으로 삼는 이상 국내시장개방도 불가피하다. 과거라면 강대국들의 호의로 상호적인 시장개방요구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 11위의 경제규모를 가진 대국으로서 피할 수가 없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정부는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시장개방이 불가피하다고 볼 때 각 산업 분야에 따라 명암이 갈리게 되어 있다. 이미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한 분야는 국내시장개방 문제가 해외진출의 발목을 잡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반면에 아직도 국제경쟁력이 취약한 분야는 시장개방 절대 불가를 외치고 있다.
국내의료시장의 개방이 임박해있다면 한의계도 이에 대한 대응책을 본격적으로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세계 속의 한의학’을 주창하는 대한한의사협회는 이러한 대응책 마련에 앞장서야 한다.
국내의료시장개방에 대한 한의계의 대응책 마련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전략은 ‘수비보다 공격’이다. 의료계 일각에서 주장하는 의료의 공공성만으로는 의료시장 개방의 해일을 피할 수 없다. 특히 경쟁 상대가 무려 15만명의 중의약사를 거느린 중국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보다 강도 높은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대응책에는 단기적인 것과 장기적인 것이 있다. 단기적인 대응책의 핵심은 한의계의 WTO협상 전략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의료서비스 개방논의는 네 가지 협상 형태(mode)로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국경간 공급 즉 원격의료행위의 허용여부, 둘째는 해외 소비 즉 자국 환자의 해외의료기관 이용여부, 셋째는 상업적 주재 즉 외국자본의 영리의료기관 설립 허용 여부, 넷째는 자연인의 이동 즉 의료인력의 상대국 진출 허용 여부이다.
이 네 가지 세부 분야의 조건과 결론은 양허를 요청하는 국가와의 협상에 의해 결정된다. 현재로는 중국, 폴란드, 파키스탄 등이 전분야 제한없이 양허를 요청한 상황이다. WTO의 최혜국대우(MFN)라는 성격상 일단 이 국가들과의 협상이 끝나면 기타 가입국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러므로, 한의계는 이 협상에서 보다 유리한 조건을 끌어낼 수 있는 전문가를 공급해야 하고 이 과정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보장하는 조직체계를 정비해야 한다.
단순히 유리한 협상에 임한다기보다 창조적이고 미래를 볼 줄 아는 협상 전략을 준비해야 한다. 예컨대, 상호면허인정(MRA)을 시도할 경우에 ‘동등하게 그러나 차별화되게’ 면허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중의사들의 한국 진출과 한의사들의 중국 진출을 자유롭게 하되 면허의 종류를 달리하여 장래에 한의사의 명성이 높아질 경우 국제한의학 시장에서 차별화된 지위를 누리도록 유도할 수 있다. 물론 면허의 동일화가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장기적인 대응책이란 한의학의 국제경쟁력 제고를 가능하게 하는 각종 전략을 의미한다. 필자가 지난 10월 정책기획국의 세미나에서 설명했던 바처럼, 국제적 표준화의 선점, 특성화, 연구중심국립대학의 설치, 국제적 동맹의 결성, 유치산업보호론적 산업육성 정책 등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의학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이 있어야 한다”는 막연한 주장과 약소한 인맥 동원, 그리고 정치적 압력만으로는 대대적인 투자를 이끌어 낼 수 없다. 산업으로서의 한의학이 세계의 동양의학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10개년 계획 등이 제출되어야 국민을 설득할 수 있고 동시에 대대적인 국가적 투입이 가능하다. 향후 한의학은 인술(仁術)이라는 관점을 뛰어넘는 산업(産業)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의학의 국내적 위상에 관한 전통적 관심은 이미 부적절하다. 한의학계가 국내에서 진행되는 서양의학과의 경쟁의식이나 한의학 위상 고취를 위한 노력 혹은 한의학과의 발전을 위한 정부 지원 요청 등으로 얼마남지 않은 준비 기간을 소비하는 것은 매우 애처로운 일이다. 오로지 인적 자원 밖에 없는 대한민국이 조선과 전자와 자동차에서 뿐만 아니라 한의학 분야에서도 세계를 리드할 수 있게 하려면 무엇보다도 그 첨단에 서있는 한의사 본인들의 각성과 노력이 요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