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의사의 사회적 위상 한국과는 천양지차”
한국의 한의원을 정리하고 미국에 도착해 한의원 개업을 준비하는 중에 전부터 알고 지냈던 LA 모 한의대 출신 후배 한의사에게 인사차 전화를 걸었다.
이 분은 나의 미 한의대 강의를 주선했고 한국에 들릴 때마다 같이 공부를 했던 관계로 잘 알고 지내던 사이다.
내가 미국에 완전히 정착하기 위해 왔다고 말하자 다짜고짜로 이 분이 내게 던진 첫 질문은 참으로 황당한 것이었다. 즉, 한국 한의사면허는 어떻게 하고 왔느냐는 것이다. 무슨 질문인지 몰라 그냥 두고 왔다고 대답할 밖에 없었는데 다시 묻기를 설마 한의사면허를 말소시키고 온 것은 아닌지 재차 묻는 것이다. 이민자들이 이민올 때 주민등록을 말소시키듯 한의사면허도 말소시키고 오는 것인줄 잘못 알고 한 질문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답하자 비로소 안심된다는 듯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부연한 설명이 더욱 황당했다.
아마도 머지않은 시점에 내가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게 분명한데 그때를 대비해 한국 한의사면허를 살려 놓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요지였다.
기대를 가지고 이제 막 미국생활을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이 분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진출하는 한의사들의 전망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들려주었다.
요컨대 한국 한의원 생각으로 미국에서 개업하다가는 백이면 백 모두 크게 실망하게 되고 결국은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분은 미국 한의원들의 영세한 현주소를 구구히 설명하면서 한편으로 내가 미국 땅에서 한의사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유용한 조언들을 들려주었다. 첫째 직원은 절대 한 명이상 써서 안 되고 매월 내는 집세도 최대 1500불을 넘는 곳을 얻어서는 안 된다는 등 최대한 지출을 줄이는 긴축재정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분의 조언이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막상 이 곳에 일 년 이상 살아 보면서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다.
미국의 한의원을 한국 한의원과 평면에 놓고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환경과 조건들이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에 진출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 한의사들로서는 매우 큰 관심분야일 것이므로 구태여 비교하자면 이렇다.
우선 규모적 측면에서 미국의 한의원들은 한국에 비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영세하다. 미국에서는 소위 간호보조 역할을 하는 인력을 한국처럼 두 세 명 이상 고용한 한의원은 전체 한의원 중 1%도 되지 않으며 직원 한 명 정도 고용하거나 혹은 가족이 대신 하는 한의원, 심지어 원장 혼자 진료, 수납, 청소까지 도맡아하는 한의원들이 90% 이상에 이른다. 매우 실망스런 현상이기 하지만 여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미국특유의 다양한 원인들이 존재한다.
미국에서 하루 내원 환자수가 열 명 정도 되면 속된 말로 잘 나가는 한의원 편에 속한다. 이는 한국인을 주 고객 대상으로 하는 거의 모든 한국 한의사들이 운영하는 한의원에 해당되는 말이다.
참고로 미국에서 50여명 정도 모이는 교회라면 한국에서 1000명 정도 모이는 중형교회와 비슷하고 미국서 1000여명 모이는 교회라면 한국에서는 수만 명 모이는 대형교회와 규모가 같은 급으로 친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기는가 하면 이는 당연하게도 미국 내에 사는 한국인들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본인이 개업하고 있는 시카고에는 한국교민수를 약 10만명 정도 추산하는데 이 정해진 한국인 인구를 대상으로 약 50개의 한의원들이 진료하고 있다. 결국 한국 교민들 숫자에 비해 한의원의 수가 너무 포화 상태로 많다는 점이 한의원의 영세성을 초래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현상은 뉴욕이나 LA 같은 대도시는 더욱 심각하다.
한국인 상점들이 밀집된 코리안타운에 가면 한 빌딩 안에 무려 두 세 개의 한의원이 있는 곳도 있고 거의 한 두 집 건너 한의원 간판이 붙어 있다. 한의원이 이렇게 난립하는 이유는 한국과 달리 미국 한의대 입학이 자유롭고 면허도 비교적 쉽게 딸 수 있기 때문이다.
2년의 전문학교 이수 학력만 있는 사람이면 전공불문하고 누구든 서류 전형만으로 한의대에 입학할 수 있고 4년제인 캘리포니아주를 제외한 대개의 미국 한의대는 3년이면 졸업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한의사의 사회적 위상이 한국과 달리 매우 낮으며 교민들 사이에서 제대로 인정 못 받고 있다. 우스개 말로 식당주인 하던 사람이 2, 3년 안 보이다가 나타나면 한의대 졸업하고 개업했다는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