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한의학 교육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한의학은 한 때 서양의학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여 존폐 위기를 맞이한 적도 있었지만, 그 끈질긴 생명력, 국민들의 애호심 그리고 여러 선각자들의 노력 등으로 이를 잘 극복하고 현재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한의학이 현대에도 한국에서 확고하게 자리잡고 한국인의 건강을 담당하는 의학으로 제몫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근세 이후 근대적인 한의학 교육제도의 확립을 위해 노력한 여러 선각자들의 공로 때문이다.
한국 한의학 교육의 효시 ‘醫學’
개항 이후 서양의학이 들어와 의료제도와 의학교육이 서양의학 중심으로 바뀌기 이전 한국의 의학교육은 수천년동안 한의학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한의학 교육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남북국시대 新羅의 ‘醫學’이라는 교육기관을 꼽는다. ‘醫學’에 대한 기록은 『三國史記』職官志에 보인다.
그 내용은 孝昭王 元年(692년)에 ‘醫學’이라는 의학교육기관을 두어 博士 2人이 학생에게 『本草經』,『甲乙經』,『素問經』,『鍼經』,『脈經』,『明堂經』,『難經』등을 가르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百濟에 이미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직접 시행하는 자에게만 부여하는 ‘博士’라는 호칭이 붙은 ‘醫博士’라는 관직이 존재하였음을 볼 때 삼국시대부터 이미 한의학교육이 체계적으로 실시되었음이 분명하다.
高麗時代 - 醫師考試의 실시
高麗時代에 접어들어 한의학 교육은 크게 그 성격이 바뀌게 된다. 醫師科擧制度가 실시되게 됨에 따라 한의학 교육은 더욱 체계성을 얻게 된 것이다. 958년(광종 9년)에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건의로 실시된 과거제도에는 제술과나 명경과와 같은 문관을 뽑는 분야도 있었지만, 기술관을 뽑는 雜業 속에 醫業을 포함시켜 의학교육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당시에 제시된 의사고시의 응시자격은 品官, 吏屬(품관이 아닌 자로 중앙관직자), 鄕吏, 一般庶民 등으로 신분적인 제한이 비교적 적어 醫術에 능력이 있는 자라면 의사로 출세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의사고시는 여러 과목을 통달해야 하였으므로 쉽게 급제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과거 이외의 특전이나 軍功 등에 의해 의사관리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의학교육은 그대로 의료현장에서 결실을 맺게 되었다. ‘鄕藥’이라는 국산 약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의료형태가 토착화한 것이다. 鄕藥이란, 한국에서 나는 약재를 가지고 한국인의 질병을 치료하다는 민족주체적인 의학을 말한다. 고려후기가 되면 『鄕藥救急方』,『三和子鄕藥方』, 『鄕藥古方』, 『鄕藥簡易方』 등 鄕藥이라는 호칭이 붙는 醫書들이 다수 간행되는데, 이 醫書들은 국산한약재로 일반 백성들을 치료한다는 기본원칙에 따라 만들어진 處方書들이다.
朝鮮時代 - 의학교육의 전성기
朝鮮時代로 접어들면서 한의학 교육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백성들을 무병장수할 수 있도록 어진 정치를 펴는 것이 帝王된 자의 의무라는 유교적 이데올로기를 국시로 삼고 있는 조선사회였기에, 여러 제왕들은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한의학 교육도 그 중요성이 부각되게 되었다.
태조는 1393년에 각도마다 醫學敎授官이라는 醫學敎育者를 1인씩 파견시켜 이들로 하여금 『鄕藥惠民經驗方』을 강의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여 의학교육을 강화시켰다. 세종대왕은 의사고시에 사용할 교재와 시험제도를 법으로 제정하였는데, 이 때 거명된 의사고시용 교제가 25종에 달하는 것을 볼 때 세종대왕의 의학교육에 쏟은 정성은 남달랐다.
세조는 의학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醫書習讀官이라는 관직을 두어 의사들이 의서를 공부하도록 제도화하였고, 또 세조 자신이 의사들에게 친히 의학을 강론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성종은 세종 때 편찬을 마친 『醫方類聚』를 비롯한 다수의 의서를 간행하도록 하여 의학 교육을 부흥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의학교육을 위한 이러한 노력들은 조선 중기에 『東醫寶鑑』이라는 민족의학의 보물이 나올 수 있게 하였다. 허준은 『東醫寶鑑』을 통해 인체, 질병, 약물에 대해 체계적인 신이론을 구성해내어 세계만방에 한국한의학의 우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東醫寶鑑』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 우수성이 돋보인다. 체계적인 항목 선정과 논리전개, 가난한 백성들이 저렴한 의료비로 치료받을 수 있도록 단방요법(單方療法: 한 개의 약물로 치료하는 방법)을 기록한 것, 약물에 대한 한글표기를 실천하여 한의학 보급에 힘쓴 점 등이 그러하다.
제대로 된 인성을 지닌 의사를 만들어내는 것이 의학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부르짖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바라볼 때, 허준과 같은 인물이 조선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의학교육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東醫寶鑑』이 나온 이후 한의학은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되게 되었다. 특히 식자층에 속하는 사대부들이 개인적 수양의 차원과 부모님의 질병, 지역 백성들의 질병 구료 등을 위해 한의학 학습에 몰두하게 됨에 따라 한의학 교육도 그 어느 때 보다도 활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