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맑음속초11.7℃
  • 맑음6.3℃
  • 맑음철원7.2℃
  • 맑음동두천8.3℃
  • 맑음파주6.0℃
  • 맑음대관령0.8℃
  • 맑음춘천7.5℃
  • 맑음백령도11.1℃
  • 맑음북강릉10.6℃
  • 맑음강릉12.3℃
  • 맑음동해9.5℃
  • 맑음서울12.4℃
  • 맑음인천12.7℃
  • 맑음원주9.1℃
  • 맑음울릉도12.2℃
  • 맑음수원9.5℃
  • 맑음영월5.6℃
  • 맑음충주7.8℃
  • 맑음서산6.9℃
  • 맑음울진9.3℃
  • 맑음청주12.0℃
  • 맑음대전10.7℃
  • 맑음추풍령6.7℃
  • 맑음안동10.0℃
  • 맑음상주11.9℃
  • 맑음포항12.4℃
  • 맑음군산8.7℃
  • 맑음대구10.4℃
  • 맑음전주9.1℃
  • 맑음울산11.0℃
  • 맑음창원13.0℃
  • 맑음광주10.8℃
  • 맑음부산13.6℃
  • 맑음통영12.2℃
  • 맑음목포10.7℃
  • 맑음여수13.1℃
  • 맑음흑산도11.2℃
  • 맑음완도10.7℃
  • 맑음고창7.2℃
  • 맑음순천4.6℃
  • 맑음홍성(예)8.1℃
  • 맑음7.7℃
  • 맑음제주13.3℃
  • 맑음고산13.3℃
  • 맑음성산13.0℃
  • 맑음서귀포14.0℃
  • 맑음진주6.6℃
  • 맑음강화9.8℃
  • 맑음양평8.9℃
  • 맑음이천10.9℃
  • 맑음인제5.7℃
  • 맑음홍천7.4℃
  • 맑음태백3.5℃
  • 맑음정선군3.7℃
  • 맑음제천4.6℃
  • 맑음보은6.1℃
  • 맑음천안7.4℃
  • 맑음보령6.4℃
  • 맑음부여6.6℃
  • 맑음금산6.6℃
  • 맑음8.0℃
  • 맑음부안8.8℃
  • 맑음임실5.1℃
  • 맑음정읍7.0℃
  • 맑음남원6.8℃
  • 맑음장수3.6℃
  • 맑음고창군6.3℃
  • 맑음영광군7.9℃
  • 맑음김해시12.3℃
  • 맑음순창군6.3℃
  • 맑음북창원12.6℃
  • 맑음양산시10.1℃
  • 맑음보성군11.0℃
  • 맑음강진군8.2℃
  • 맑음장흥6.0℃
  • 맑음해남6.5℃
  • 맑음고흥8.4℃
  • 맑음의령군7.4℃
  • 맑음함양군5.4℃
  • 맑음광양시10.4℃
  • 맑음진도군8.3℃
  • 맑음봉화2.8℃
  • 맑음영주7.3℃
  • 맑음문경9.1℃
  • 맑음청송군5.0℃
  • 맑음영덕8.0℃
  • 맑음의성5.4℃
  • 맑음구미9.9℃
  • 맑음영천7.5℃
  • 맑음경주시8.2℃
  • 맑음거창4.9℃
  • 맑음합천9.0℃
  • 맑음밀양10.5℃
  • 맑음산청7.5℃
  • 맑음거제10.4℃
  • 맑음남해11.5℃
  • 맑음8.9℃
기상청 제공

2026년 05월 09일 (토)

위성현 한의협 역사편찬위원

위성현 한의협 역사편찬위원

B0112009070731962-2.jpg

B0112009070731962-1.jpg

애국지사 海網 엄주신(嚴柱信, 1890. 4.15~1973. 8.28)



海網 엄주신 선생은 1890년 4월15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728번지에서 嚴順業씨의 次男으로 출생하였다.

1914년 3월20일 의생 면허를 취득하고 당시 헐벗고 굶주리며 병마에 시달리던 많은 환자들에게 인술을 폈다.



일제시대에 非위생적인 생활습관으로 인해 이질·설사 등의 환자가 급증하였을 때 일본 의사에게 치료받던 환자들은 거의 사망하였으나, 그에게 치료를 받았던 환자는 모두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西部 慶南에서는 아주 용한 한의사로 소문이 났고 구름 같이 몰려온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여 살려냈다.



1919년 3월24일 당시 30세의 醫生(韓醫師) 신분으로 함안군 칠원면(漆源面)에서 손종일(孫鐘一), 박경천(朴敬天), 윤형규(尹兄珪)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한지(韓紙)를 약봉지를 만든다는 핑계로 다량 구입하여 태극기를 제작하고 칠원읍 장터에서 1000여명(倭警 추산 800여명)의 군중을 규합 선도하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3일에도 장터에서 태극기를 높이 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1300여명(倭警 추산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시위를 선도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同年 5월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았으나 ‘내 나라를 찾기 위한 것이 어찌 罪가 될 수 있느냐’ 하면서 항소하였다.

그러나 6월10일 대구복심법원(고등법원) 형사1부에서 기각되어 8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73년 8월28일에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4월13일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2001년 7월27일에는 국가유공자로 추서하였다. 2002년 10월 31일에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No.1015)에 移葬하였다.
 

관련기사

가장 많이 본 뉴스

더보기
  • 오늘 인기기사
  • 주간 인기기사

최신뉴스

더보기

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