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에서 사랑받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세계화 시키겠나”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세계화(globalization)는 언젠가부터 시대적 화두가 되었다. 한의학계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한의신문 웹사이트(www.akomnews.com)에서 ‘세계화’라는 단어로 뉴스 검색을 하면 1526건이 검색될 정도이다.
어감도 좋고 취지는 더 좋다. 세계화! 한의학이 세계로 뻗어나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러나 ‘한의학의 세계화’를 돋보기로 몇 초만 들여다본다면, 설렘에 벅차오르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동시에 한숨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한의학의 정체성에 대한 정의가 아직 모호할 뿐더러 무엇을 세계화할 것인가에 대한 대책이 구체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늘 세계화는 구호 속에만, 신문기사 표제어로만 전혀 구체적이지 않은 모습으로의 이미지만 떠돌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열렸던 대체보완의학 학회에서 한국에서 한의학을 전공했다고 내 소개를 할 때면 현지인들은 늘 한국과 중국, 일본을 잘 구별하지 못했고(한국의 위치와 독립적 언어의 유무에 대한 궁금증), 그들에게 익숙한 TCM(Traditional Chinese Medicine)과 한의학의 차이를 물어왔었다. 과연 우리는 “한의학은 중의학과 이러이러한 점에서 다르고 독특하며 우수하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세계화시킬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자료로서의 한의학 이론서·임상서를 각국 실정에 맞춘 언어로 번역하여 갖추고 있는가? 세계화를 부르짖는 한의계 내부의 많은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대목일 것이며 학교에 몸 담고 있는 필자도 물론 예외는 아닐 것이다.
지난 9월 18일~27일 열렸던 금산인삼축제가 신종 플루를 호재 삼아 100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고 한다. 타미플루 확보, 거점병원 지정, 24시간 콜센터 가동 등의 나름 체계적이고 과학적으로 보이는 관리에도 불구하고 감염자와 사망자는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 때문인지 근거 없는 각종 건강보조식품과 인삼류의 판매가 일반 대중들의 불안심리를 파고들며 틈새시장을 당당히 메우고 있다. 기존 의료체계에 대한 불신의 부메랑이 왜 한의계로 날아가지 못하고 인삼축제에 꽂힌 것일까? 늘 한의계는 “현대의학이 해내지 못하고 있는 각종 만성 난치질환에 한의학은 효과가 있다” 라고 주장해오고 있는데, 왜 현실에서는 한의계가 아닌 겨우(?) 인삼축제 정도의 행사에 1000억원이나 되는 돈이 모이는 것일까? 우리는 지역 인삼축제보다도 더 매력도 없고 정보도 없고 거기에 재미도 없는 경지로 몰락한 것은 아닐까? 의사들도 대책이 없다는 질병이라면 그 다음은 한의사에게 문의해야 순서 아닌가? 인삼축제에 몰린 일반인들의 움직임은 볼품없는 한의학의 위치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 같아서 머쓱하고 유감스런 마음이 든다.
지난 9월17일 중국, 대만 및 국내 한의학계 관계자들이 모여 신종 인플루엔자의 한의학적 치료효과를 확인하는 국제세미나가 열린 바 있었다. 특히 중국의 치료현황 보고에서 경증(輕症)은 한약으로, 위중한 증세는 한약과 양약을 동시에 치료하는 것을 국가적 지침으로 확정해 시행하고 있으며 9월16일까지 약 13억 인구 중에서 사망자는 아직까지 없다고 하였으며 한약 투여가 양약 대비 약 1/7 비용으로 비슷한 치료율을 보인다고 발표했다. 한의사협회는 신종 플루에 대한 치료 가이드라인을 조만간 정부에 제출해 한의학을 통한 치료를 적극 활용할 것을 건의할 예정이라고 보도하였다. 이에 대해 의료일원화 특별위원회(회장 유용상, 광주미래아동병원장)는 이 세미나가 열렸던 17일 당일 즉각적으로 경고를 표명했다. 과학적인 치료가 무엇보다 시급한 이 때 이러한 과학적 근거 없는 언급을 하는 한방측의 행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과거 2003년 사스(SARS) 파동 때에도 한방측은 똑같은 행태를 보이다가 질병관리본부의 비판을 받은 전력이 있는 만큼 한방측에서 이러한 근거 없고 위험한 주장을 계속한다면 신종 플루에 대한 국가적인 대처 및 치료에 상당한 혼란을 초래한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한방적인 방법으로 신종 플루를 진단하는지부터 세계에 공개하고 검증받아야 한다고 했다. 이 위원회 관계자는 “향후 신종 플루에 대한 예방접종 및 현대의학적 치료시 한의사와 그 지지자들은 반드시 배제해야하며 신종 플루를 굳이 치료해야 한다면 현대의학적 진단이나 치료에 손벌리지 말고 한의학계 스스로의 방법으로만 대처할 것을 제의한다”며 “의사들은 신종 플루 환자를 볼 때 한방에서 치료받느라 시기를 놓치지는 않았는지 반드시 문진할 것을 건의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국내 신종 플루 거점병원 455개에 한방병원은 전무하다. 신종 플루에 대한 중국쪽 연구를 근거삼아 몇 마디 했더니, “한방측은 꺼져라……”라는 반응이다. 국가 보건의료체계 안에 있는, 이른바 제도권 의학인 한의학의 현실이다. 한의사라는 직종은 국가 보건의료체계에 과연 필요한 존재인가 하는 자괴감이 밀려온다. 과거 우리들의 역할과 현재의 과업 그리고 미래의 임무를 포함한, 우리가 가진 역사적 의무에 대해서 반성을 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앞에 언급했었던 중국의 연구는 조류독감이 유행했던 몇 해 전부터 진행되어온 것으로 은교산과 마행감석탕을 합방하고 거기에 보기약을 가미한 한약 캡슐을 이용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 동일한 처방으로 신종 플루 감염자 66명에 대한 임상시험을 실시한 결과 고열의 지속일과 입원일수를 감소시켰고 제반 임상증상의 호전을 가져왔다는 결과를 발표하였다. 이는 중서의결합의라고 하는 서의-중의의 완충지대에 해당하는 중국 특유의 의료인 제도의 확립과 활발한 교류가 낳은 결과이고 서의만의 단독치료가 모든 질병 치료의 최선으로 자리잡은 현대 의료체계의 한계를 중의 병행치료를 통해 극복해가는 과정을 세계 의학계에 알린 눈물겨운 도전의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는 신종 플루에 이런 연구결과가 있다는 이야기와 한의학적인 견지를 발표한 게 전부인데도 불구하고 입만 뻥끗하면 한방 너네들은 썩 저리 물러나지 못할까 하는 야단과 호통소리가 자자하니 향후에도 치료할 수 있는 환자를 눈 앞에 두고도 한의사라는 이유로 말 한마디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펼쳐질 것 같아서 못내 씁쓸하다. 왜 현대의료계의 한의학폄하는 갈수록 심해지는 것일까?
오는 2010년 1월30일부터는 기존의 양방병원 안에 한의사를 고용하여 한방진료를 겸할 수 있고, 한방병원 안에 양의사를 고용하여 양방진료를 겸할 수 있게 하여 “그동안 으르렁 대고 싸울 만큼 싸웠으니 이제 좀 서로 같이 한 공간에서 친하게 진료해 보라”고 하는 취지의 법령이 생긴다. 이렇게 나라에서는 의사-한의사의 공동진료로 다른 어떤 나라에도 없는 독특한 한국만의 의료행태를 권장하고 나섰다. 이런 국가적 정책에 대해 국내 의사들의 생각은 과연 어떨까? 의사협회에서 이러한 협진 장려 정책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힌 바는 없지만 그간 의료일원화 특별위원회를 통해 전해진 안티한의학 관련 성명서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한방을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하늘 아래 의학은 하나이다. 한의학은 민속, 원시의학이다. 이런 전공자들과 과연 무슨 질병을 협진하라는 것인가. 한·양방협진은 의료비 낭비이자 사기이다” 정도의 속내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 스스로 사랑하고 아끼지 않는 한의학을 세계인들이 먼저 알아채고 사랑해줄 리 없다.
와인이 오늘날처럼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분위기 있는 고급술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프랑스인들의 남다른 와인사랑과 더불어 프랑스내 와인시장이 탄탄했기 때문이고, 일본의 스시가 서구인들 사이에서 최고급 음식으로 자리잡게 된 데에도 일본인들의 자국 음식에 대한 하늘을 찌를 듯한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내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한의학을 과연 누가 무엇을 위해 세계화 시켜준단 말인가. 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해서 우리가 지금 가장 급한 건 뭐? 바로 한의학의 국내입지를 보다 굳건히 다지는 일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영어 잘하는 교수들도 좋고, 국제적인 학회를 잘 치루는 일도 좋다. 하지만 국제 글자만 붙여서 그럴 듯한 행사를 치뤘던 그 많은 축제와 심포지엄들을 통해 과연 한국은 그 많은 분야에서 국제적인 명성과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가? 빛좋은 개살구가 많았고 남 좋은 일은 좀 많이 시켰는가? 겉치레가 많았던 그 많은 낭비들을 버리고 이제는 좀 실속을 차려보자.
진정으로 한의학의 국내화를 이루는 길은 보다 편리하고 효과적인 의학으로서의 기능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국가 보건체계 안으로 굳건하게 한 자리 차지하는 일이다. 그러려면 근거를 만들어야 하고, 한의학의 저 많은 치료들이 객관적으로 비용효과적이며 빠르며 근거중심의학적인 측면에서의 “효과가 있다”라고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도 ‘너의 방법은 틀리고 나의 방법만이 독창적이다’라고 주장하는 한의사들이 있다면 시대착오적인 자기주문을 외는 무속인과 다를 바 없다고 손가락질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미래의 한의계는 쪽대본으로 연명하는 막장드라마를 써 나갈 것인가? 아니면 눈물과 감동까지 줄 수 있는 역전드라마를 펼칠 것인가? 아직은 개봉박두이지만 그리 쉬워보이지 않는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국민건강보험체계의 5%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한의학이 과연 민족의학인가? 비보험치료 위주의 귀족의학으로 남아서는 절대로 민족의학도 토착의학도 될 수 없다. 한의학의 세계화보다 시급한 한의학의 국내화, 한의학의 지방화, 한의학의 동네화 방안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면 혼자만 알지 말고 널리널리 퍼뜨리자. 한의학의 기능과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열어주고 반드시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길만이 한의학의 국내화와 세계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