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촌 한의학 旅行 (12)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내는 용기도 때론 필요해
역시 가장 많이 마음에 남은 것은 사람들과의 추억
글을 쓰고 있는 이곳은 통상 ‘알베르게’라고 불리는 순례자용 숙소이다. 음식 만드는 소리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로 부산하던 이곳도 새벽이 되자 조용해지고, 숙소 전체가 정적에 휩싸여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프랑스 생장 드 피드 포트에서 하루에 20~40km씩 걸어 야곱성인의 무덤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넘어 성서에서 세상의 끝이라고 묘사되어 있다는 서쪽 해변 피니스테레에 이르는 900km 의 길, 37일에 이르렀던 그 순례의 여정이 이제 끝나가려 한다.
처음에 도보여행을 계획할 때는 두려움도 설레임도 없었다. 그저 남들과 다른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원래 걷는 것은 좋아했다. 특히 약간 쌀쌀한 요즘 같은 날씨를 좋아했기에 이번 기회에 원없이 한 번 걸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길이 끝나가는 지금 오히려 어떻게 저 기나긴 길을 걸을 용기를 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내는 용기도 인생에서 필요한 것 같다.
20km가 넘는 길을 15kg의 배낭을 지고, 그것도 매일 걷는다는 것은 일상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그 만큼 이 길에서는 일상적이지 않은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로 이야기하자면 역시 근육통과 물집을 빼놓을 수 없겠다.
매일 숙소로 들어가면 하는 일은 항상 대략 정해져 있다. 샤워를 하면서 빨래를 한 다음 바늘로 물집을 치료하는 것이다. 모두들 바늘을 들고 하루 종일 자신을 시험에 들게 만든 물집을 터뜨리고 약을 바른다. 증상이 심한 이의 발은 표피가 거의 벗겨져 나가서 본래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씩씩하게 걷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 그지없다.
최근 크게 부각된 문제를 들자면 ‘베드버그(Bed bug)’랄까? 이 벌레들은 침대 매트리스, 시트에 살면서 사람의 피를 빤다. 일단 물리면 피부가 부어오르면서 물집처럼 수포가 생기는데, 간지러워서 참을 수 없을 정도이다. 필자도 후반부에 팔다리를 그들에게 허용했는데, 근육통도 잊게 만들 정도로 간지러워 당황스러웠다. 이들 때문에 쇼크가 온 사람도 있다고 하고, 이들이 무서워 숙소에 들어가기 싫다는 사람도 찾아볼 수 있으니 큰 문제는 큰 문제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곳을 걷는 사람들 중 많은 수는 이 때문에 짜증을 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스스로의 마음의 힘으로 이겨내고 계속 길을 걸으려고 한다. 그리고 덕분에 이 길을 더욱 의미있게 걸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점이 필자가 이 길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한편으로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일도 많이 일어난다. 일례로 필자와 친구들은 ‘이 길에는 귀가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 이유는 길을 걷다 어떤 말을 하기만 하면 그에 관련된 일이 바로 일어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순례의 길이 끝이 나고 있었을 무렵, 필자는 길이 얼마 남지 않아 너무 아쉽다는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날, 그리고 이튿날, 필자와 친구들은 원래 길보다 3~4km씩 더 우회하여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우회하려는 마음이 전혀 없었음에도 이틀 연속으로 우회를 하게 된 것이다.
또한 햇볕이 너무 강해서 덥다고 불평하면 갑자기 너무 추워진다던가, 춥다고 불평하면 바로 땡볕을 걷게 만든다던가 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한 번은 인생 새옹지마를 제대로 느낀 날도 있었다. 추석날 아침이었다. 아껴 둔 라면으로 아침을 든든히 먹고 걷는데 날씨도 길도 너무 좋았다. 추석이라 단군 할아버지께서 보살펴주신다고 생각하고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겠거니 하고 느긋하고 즐겁게 걷고 있었는데, 오후가 되자 얄미운 햇볕이 내리쬐면서 돌 길, 아스팔트 길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날 처음으로 저녁 6시까지 걸었던 것 같다.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던 우리 앞에 나타난 건 ‘호텔 부에노스 아이레스’ 그곳에서 우리는 정말 기억에 남는 밤을 보냈다. 욕조가 딸린 독방임에도 가격도 싸고 너무 친절한 그 호텔을 만난 것은 지옥을 다녀온 우리를 다시 천국으로 이끌어 주었다.
기간이 짧지 않았던 만큼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많이 마음에 남은 것은 사람들과의 추억이다. 그 당시에는 그다지 기쁘지도 않았던, 오히려 기분이 나빴던 일들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소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