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 ❻김호철 교수 경희대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김호철 교수(경희대 한의대 본초학교실)의 ‘과학으로 보는 한약 이야기’를 통해 임상 현장에서 자주 제기되는 한약의 궁금증과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가며, 최신 연구 결과와 한의학적 해석을 결합해 쉽게 설명할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이 기존의 한약 지식을 새롭게 바라보고, 실제 진료 현장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대황, 단순한 사하약을 넘어 한의학에서 대황(大黃)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역시 사하, 즉 변비 치료일 것이다. 그러나 대황이라는 약재는 단순히 변비를 치료하는 약물이라는 좁은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다. 대황은 사하라는 효능만 제외하면 청열약으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청열사화(淸熱瀉火), 청습열(淸濕熱), 청열량혈(淸熱凉血), 청열해독(淸熱解毒) 등의 효능을 가지고 있다. 또 활혈거어(活血祛瘀) 효능도 강하다. 실제로 대황목단피탕, 인진호탕, 도인승기탕 등은 모두 사하보다는 청열과 활혈의 효능을 중심으로 활용된 예이다. 그래서 임상에서 대황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사하약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청열, 활혈, 해독 등 다양한 효능을 충분히 이해하고 활용해야 한다. 대황이 임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똑같은 약재임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체질, 사용한 대황의 종류, 그리고 끓이는 시간과 포제법에 따라 효능이 현저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을 탐구해보면 과학적 원리와 전통적 지혜가 정교하게 어우러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 어떤 사람은 대황이 듣고, 어떤 사람은 듣지 않을까 – 사하 작용의 열쇠는 장내 미생물 대황은 누구에게나 변통을 터뜨리는 사하약으로 알려져 있지만, 임상에서는 예상과 다른 일이 종종 벌어진다. 같은 대황을 복용해도, 어떤 사람은 단번에 사하작용이 나타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며 “약발이 안 먹힌다”고 호소한다. 이런 차이는 흔히 체질 탓으로 돌려지지만, 최근 연구들은 보다 구체적인 생물학적 설명을 제시한다. 결정적 변수는 장내 미생물의 구성, 그중에서도 대황 속 센노사이드를 활성화시키는 세균이 얼마나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대황의 주성분인 센노사이드 A와 B는 위와 소장에서 흡수되지 않고 대장까지 살아서 도달해야 진짜 약으로 전환되는 프리드러그(pro-drug)이다. 이 분자는 장내 미생물이 가진 베타글루코시다아제와 환원효소의 도움을 받아야 비로소 레인 안트론(rhein anthrone)이라는 활성 대사체로 바뀌며, 이때부터 수분 분비 증가와 장 연동운동 촉진을 통해 사하 작용이 시작된다. 따라서 장내 미생물층이 풍부하고, 특히 센노사이드를 분해할 수 있는 특정 균주와 효소 활성이 충분한 사람은 대황 복용 후 비교적 빠른 배변 효과를 경험할 수 있다. 반면 항생제 복용, 스트레스, 식이 습관의 문제, 또는 해당 균이 부족한 경우에는 이 전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아무런 효과가 없을 수 있다. 이 같은 반응 차이는 단순한 장 건강의 문제라기보다, 개인의 장내 세균 생태계와 반응 민감도의 복합적 결과다. 또한 흔히 간과되지만, 대장내시경이나 건강검진 전 시행하는 장 세척 이후에도 대황의 효과는 현저히 감소한다. 인위적으로 장을 비운 이후에는 장내 미생물의 대부분이 일시적으로 씻겨나가기 때문에, 아무리 대황을 복용해도 그것을 약으로 바꾸어 줄 ‘효소 공장’이 사라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검사 직후 대황을 복용했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는 사례는 이런 배경에서 설명된다. 이 같은 개인차의 생물학적 근거를 밝힌 대표적인 연구가 바로 일본의 고바시(Kobashi) 연구진의 실험이다. 그들은 사람의 장내에서 분리한 수많은 균주 중, 오직 Bifidobacterium dentium과 B. adolescentis만이 센노사이드를 효과적으로 절단해 활성 대사체를 생성할 수 있음을 밝혀냈다. 이 균주들이 존재할 때는 센노사이드 함량이 감소하고, 레인 안트론 농도와 배변 빈도가 눈에 띄게 증가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센노사이드는 거의 변화 없이 배설됐다. 결국, 체질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졌던 사하 반응의 유무는 사실상 보이지 않는 체질, 즉 개인의 장내 미생물 생태계에 의해 결정된다. 대황은 누구나 복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약으로 바꿔줄 세균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는 약의 효과가 미생물이라는 생물학적 조건 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왜 대황은 바로 듣지 않을까? – 사하 작용까지 걸리는 시간의 과학 대황을 먹으면 곧바로 배변이 시작될 것처럼 기대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복용 후 수 시간의 지연이 일반적이다. 어떤 사람은 6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또 어떤 사람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 효과를 체감한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대황의 센노사이드는 즉시 작용하는 자극제가 아니라, 대장에 도달한 뒤 장내 미생물의 효소 작용을 통해 비로소 활성화되는 프리드러그이기 때문이다. 복용, 소화기관 통과, 대장 도달, 미생물 분해, 활성 대사체 전환, 약리 작용 발현이라는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평균 6~12시간, 짧아도 4시간 이상이 걸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런 이유로 대황은 저녁에 먹고 다음 날 아침 효과를 본다는 방식으로 흔히 사용된다. 만약 복용 후 즉각적인 반응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약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몸 안에서 약으로 바뀌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 뿐이다. 게다가 이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장의 운동성이 느리거나, 장내 미생물층이 약해진 사람, 예를 들어 항생제 복용 중이거나 장청소를 받은 경우는 대황을 복용해도 사하 작용이 거의 나타나지 않거나, 반응 시간이 매우 늦어질 수 있다. 실제로 장내 미생물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는 센노사이드가 전환되지 못해 그대로 배설되기도 한다. 결국 대황의 사하 작용은 약초 단독의 효과가 아니라, 장내 미생물과의 협업을 통해 완성되는 생물학적 과정이다. 이 지연은 실패가 아니라 과정이며, 우리 몸 안에서 약이 천천히 만들어지는 시간이다. 대황은 단순한 자극제가 아니라, 몸속 생태계와 소통하며 작용하는 복합적인 한약재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다음 연재 예고 – 대황,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 품종·전탕·포제가 바꾸는 약효의 방향 이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황은 단순한 사하약이 아니라 사람마다 다르게 반응하는 섬세한 한약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2부에서는 같은 ‘대황’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약효를 내는 금문대황계와 종대황계의 결정적 차이, 그리고 끓이는 시간과 포제 방식에 따라 완전히 다른 약으로 바뀌는 대황의 변신 메커니즘을 자세히 다룰 예정입니다. 대황을 단순히 ‘센노사이드가 들어 있는 약’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품종, 조제, 포제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한의학적 통찰과 과학적 근거를 함께 소개드리겠습니다. 하나의 한약재, 그러나 전혀 다른 쓰임. 2부에서 그 다채로운 얼굴을 확인해보세요. -
"슛보다 빠른 회복" 한의약에 감동한 농구 레전드김성은 (사)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협회 상임이사(전 농구선수) <편집자주> 대한한의사협회가 국가대표 선수들의 건강 증진과 스포츠 분야에서의 한의약 역할 확대를 위해 매진하고 있는 가운데 한의신문은 국가대표 레전드 선수들을 만나 한의계와 스포츠계의 공동 발전을 위한 견해를 듣고 있다. 본란에서는 우석대학교 여자농구팀 감독으로 팀을 이끌고 있는 김성은 (사)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협회 상임이사에게 스포츠 선수들에게 있어 한의치료가 가지는 장점 및 한의계에 기대하는 점 등을 들어봤다. Q. 자신을 소개한다면? 현재 우석대학교 여자농구팀 감독으로 팀을 이끌고 있다. 현역 시절 현대산업개발 여자농구팀 선수 및 대한민국 여자농구 국가대표로 활동했으며, 선수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다. 또한 (사)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협회 상임이사로 활동하면서 스포츠 꿈나무 장학기금 마련을 위한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Q. 한의계와 스포츠계가 상호 발전을 모색하고 있는데. 지난 5월 진행된 대한한의사협회와 (사)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협회와의 협약 체결을 통해 스포츠와 한의약이 상호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고 생각한다. 특히 선수들은 훈련이나 경기에 참여할 때 신체적인 부상이 잦은 만큼 선수들의 건강 관리 및 부상 예방, 회복 분야에서 한의약이 큰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이를 통해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은 물론 운동선수로서의 생명 연장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된다. Q. 스포츠 선수들에게 있어 한의치료가 가지는 장점은? 현역 시절 움직임과 몸싸움이 많은 농구 종목의 특성상 잦은 발목 부상과 고질적인 허리디스크로 고생을 많이 했다. 때문에 이를 회복하기 위해 한의치료를 여러 차례 받은 기억이 있다. 특히 침 치료와 약침 치료는 부상의 빠른 회복에 큰 도움이 됐으며, 부상으로 인한 근육 긴장 완화에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한의치료는 비수술적이고 자연적인 방법으로 부상 회복 및 치료를 돕기 때문에, 수술이나 치료 시 강한 약물 사용이 부담스럽거나 거부감을 느끼는 선수들에게는 매우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특히 통증 조절뿐 아니라 각 개인의 체질에 맞는 맞춤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점도 상당히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Q. 선수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많은 경기들이 기억에 남지만, 국가대표로서 태극마크를 달고 국제대회에 출전했던 한 순간 한 순간이 모두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웠다. 국민의 응원 속에서 코트를 누비며, 한 경기 한 경기를 치렀던 기억들은 평생 잊지 못할 자산으로 간직하고 있다. Q. 한의협이 진천선수촌 한의진료실 상시 운영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매우 긍정적이고 필요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선수촌에서 다양한 치료 옵션이 제공되어야만 선수들이 상황에 따라 최적의 케어를 받을 수 있다. 한의진료실과 한의사 팀닥터가 상주하게 된다면 선수들의 부상 예방 및 조기 회복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며, 비수술적 치료를 통해 강한 약물이 부담되는 국제대회를 앞둔 선수들의 정신적 안정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Q. 한의계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더 많은 연구와 자료를 통해 한의치료의 효과를 객관적으로 입증하고, 스포츠 분야에서도 그 유용성을 널리 알리는 노력이 이어지길 바라며, 선수나 지도자들이 더 믿고 접근할 수 있도록 스포츠 의학 분야에서의 협업이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스포츠는 몸과 마음의 건강이 함께 이루어져야 가능한 분야인 만큼 한의약은 그런 의미에서 스포츠인들에게 중요한 동반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한의약의 발전과 스포츠 현장에서의 적극적인 활용을 위해 노력해 주시고, 함께 응원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
인생의 마일스톤이 되어줄 소중한 경험대한한의약해외봉사단(KOMSTA)에서는 매년 의료혜택에서 소외된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실시하고 있다. 2017년부터는 KOICA의 WFK(World Friend Korea)봉사단 사업을 수행하며, 매년 ODA대상국으로 5회 이상의 해외의료봉사단을 파견하고 있다. 이번 177차 봉사단은 몽골의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파견됐다. 첫 해외 의료봉사에 대한 설렘과 쓸데없는 걱정 퇴사를 앞두고 어떻게 하면 보람차고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너무 매력적인 제목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2025 KOMSTA WFK 봉사단 177차 몽골 파견 봉사단원 모집합니다." 학생 때 봉사 동아리를 6년 동안 하면서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해외봉사도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 몽골에 여행을 왔을 때 너무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홀린 듯 지원하게 되었다. 몽골에서의 의료봉사는 한몽친선병원에서 진행됐다. 병원에 도착하니 한몽친선병원의 문성호 원장님께서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문 원장님께서는 몽골의 의료제도와 현실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주셨다. 국립병원은 진료비가 들지 않는 대신 수요가 너무 많아 필요한 치료를 제때 받기 어렵고, 사립병원은 비용이 너무 비싸 일반 서민들이 이용하기 힘들다고 하셨다. 또한 몽골에도 물리치료와 사혈치료를 위주로 하는 전통의학이 있어, 한의학에 대한 수용도가 높다고 덧붙이셨다. 문 원장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백진욱 진료부장님의 진두지휘 아래 진료실을 세팅하면서 여러 가지 걱정이 들었다. 낯선 진료 환경,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지, 어떤 환자분들을 보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걱정과 설렘이 뒤섞인 묘한 기분으로 잠에 들었다. 막상 첫날 진료가 시작되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파견단원 12명 중 9명이 첫 해외봉사임에도 마치 해본 것처럼 금방 자신이 맡은 역할에 적응하고 있었으며 통역 선생님들도 단원들 못지않은 열정으로 진료에 임해 주셨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긍정적인 모습으로 임하는 다른 단원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도 힘을 얻고 진료에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날이 지날수록 환자분들이 호소하는 불편함들이 개선되는 것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고, 진료에도 점점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몽골 환자들과의 인상 깊은 만남 몽골은 매우 건조하고 겨울에는 영하 40도 까지 떨어지는 추운 대륙성 기후 때문에 농업 생산량이 제한적이고 목축업이 주요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때문에 몽골인들은 소, 양, 말 등 기름진 육류와 유제품을 즐기며 혹독한 환경과 추위를 견디기 위해 체격이 좋은 경우가 많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환자분들 중에 담낭, 췌장 관련한 질환의 과거력이 있는 분들이 많았으며 단순한 소화 불량을 호소하는 분들의 비율도 매우 높았다. 환자의 생활과 삶의 전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환자의 병증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의료 서비스의 접근성이 좋지 않기 때문인지 증상을 인지하고 있더라도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중풍 후유증으로 양측의 근력 차이가 분명한데도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은 분도 있었고, 혈압이 높은 것을 알고 있지만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은 분들도 많았다. 근골격계 질환의 경우 치료를 받지 않고 마사지만 받거나, 그냥 버티는 경우는 일상다반사처럼 느껴졌다. 한의학적으로 도와드릴 수 있는 부분이 많아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 마땅한 방법이 없어 몸으로 버텨 내는 환자분들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재미있는 점은 환자분들이 통증 부위를 장기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간이 아프다 하면 옆구리 통증, 신장이 아프다 하면 허리 통증인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MRI나 X-ray 촬영 후 필름을 지참해서 내원하신 분들도 종종 있었는데 몽골 의사들도 환자들에게 설명할 때는 신장이 안 좋다는 문구를 사용했다는 걸 듣고 한의학과 그 궤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느껴 반갑고도 신기했다. 가장 놀랐던 점은 오전의 피크타임과 점심시간 직후에 내원하신 분들은 대기 시간이 2시간 가까이 되었는데도 단 한 분도 불평불만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긴 시간을 기다리신 데다 앉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 서서 기다린 분들도 굉장히 많았는데 어느 한 분도 소란을 피우거나 화를 내지 않으셨다. 오랜 시간 동안 불평불만 없이 기다려주신 환자분께 괜히 죄송한 마음에 더 열심히 진료에 임할 수 있었다. 봉사를 마치며 총 4일간의 봉사 기간 동안 총 768명의 환자분이 진료소를 방문해 주셨다. 봉사의 마지막 날이 몽골의 전통축제인 나담 축제의 시즌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많은 분들이 진료 덕분에 몸이 한결 편해져서 휴가를 갈 수 있게 되었다며 고마움을 전하셨다.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는 환자분들의 모습에 나도 진심으로 기뻤다.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으로 오셨던 환자분이 기억에 강하게 남는다. 구안와사 후유증으로 연합운동까지 있던 분인데 마땅히 치료받을 곳이 없어서 한 번도 치료를 받은 적 없던 분이었다. 3일째 진료를 마치고, 마지막 날은 진료가 1시에 끝나기 때문에 오전에 오셔야 한다고 안내해 드렸더니, 오전에는 근무가 있어서 못 온다고 하셨던 분인데 2시가 조금 넘어 봉사지를 모두 정리하고 버스에 탑승하려는 때에 도착하신 것이었다. 바쁜 근무를 마치고 달려와 주신 그분의 모습에 내가 오히려 더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마지막 침 치료를 해 드릴 수 있었다. 치열한 현실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매너리즘에 빠지며 의료인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가끔 꺼내 보며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소중한 기억 한 조각을 얻은 것 같다. 일주일 동안 함께 웃으며 봉사했던 177차 봉사단원분들,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애써주신 KOMSTA 단장님 및 사무국 직원 분들 그리고 몽골 현지에서 너무나 많은 도움을 주신 문성호 원장님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더 많은 이들이 이러한 귀중한 경험을 함께 나누며 전 세계 의료 불평등 해소에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며, KOMSTA의 무궁한 발전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
“‘함께 돌보는 힘’…<br/>부천시에서 보여준 한의 통합돌봄의 가능성”[편집자주] 김범석 부천시한의사회장이 보건복지부와 한국한의약진흥원이 지난달 개최한 ‘2025 한의약 건강돌봄 사업 성과대회’에서 기고 부문 대상(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한 데 이어 그가 참여한 한·양방 방문진료 협진 시범사업 및 다학제 재택의료센터를 통해 경기도 부천시 또한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본란에서는 김 회장을 통해 한의사 중심의 미래 통합돌봄 체계 구축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Q. 부천시가 두 부문에서 수상했다. 부천시가 이번 한의약 건강돌봄 성과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돼 매우 영광스럽고, 무엇보다 기고문 부문에서도 뜻깊은 상을 받게 돼 감사한 마음이다. 이 상은 단지 한 사람의 성과가 아니라 지난 수년간 지역사회와 함께 꾸준히 걸어온 부천시한의사회와 시 행정, 그리고 돌봄 인력들이 함께 만들어낸 공동의 성과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지역 속에서 한의 돌봄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Q. 수상작 기고문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기고문은 루게릭병 50대 남성의 재택진료 사례를 중심으로, 한의학 치료가 단순 증상 완화를 넘어 가족 전체의 삶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온 점을 다뤘다. 한의진료로 환자의 통증, 경직, 수면장애가 완화되고, 보호자의 부담도 줄어들며 삶의 리듬이 회복되는 과정을 함께 지켜봤다. 이를 통해 재택의료의 진정한 의미는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아닌 ‘가족의 일상을 회복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Q. 부천시 재택진료센터의 운영 현황은? 부천시는 2019년부터 보건복지부 지역사회 통합돌봄 선도사업 지자체로 선정돼 지역 중심 돌봄체계를 구축했다. 2021년 코로나19 상황에서 외출이 어려운 어르신을 위한 한의사 방문진료가 본격화됐으며, 이후 재택의료 시범사업으로 확대돼 체계적이고 지속 가능한 진료 기반이 마련됐다. 한의사 5명, 간호사 5명, 사회복지사 4명 등 14명의 다직종 팀이 활동하며, 지금까지 350명 이상의 어르신을 진료했다. 특히 의료뿐 아니라 주거환경 개선, 지역아동센터 연계, 위기 가정 지원 등 지역 복지자원과 협력해 의료·복지 통합모델을 실현하고 있다. Q. 지자체와 끈끈한 연계를 이어왔다. 가장 큰 비결은 현장을 꾸준히 지켜온 지속성과 신뢰라고 생각한다. 단기적인 사업이 아니라 매주 빠짐없이 현장을 찾아 진료를 이어온 지 벌써 5년째다. 현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솔직하게 전달하고, 행정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현실적인 대안을 제안해왔다. 특히 한의사가 의료를 넘어 지역 복지 자원과의 연결자 역할을 수행하며 행정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만들어낸 것이 신뢰의 바탕이 됐다고 생각한다. Q. 돌봄 대상자들은 어떤 분들인가? 대부분 지역사회 통합돌봄 대상자로 의뢰되는 취약계층 어르신이다. 독거노인, 거동이 불편한 만성질환자, 인지 저하로 병원 접근이 어려운 분들이 많고, 가족의 돌봄이 거의 없는 경우도 많다. 현장에는 이른바 ‘쓰레기집’이라 불리는 열악한 주거환경에서 음식물 쓰레기나 오염된 침구가 방치된 상태로 생활하는 분들도 있어 단순 진료를 넘어 주거환경 정비, 위생관리, 사회복지 개입이 절실한 경우가 많다. 이때 한의사와 한의진료는 복합적 어려움 속 어르신들에게 몸과 마음을 돌보는 전인적 돌봄으로, 다직종팀과 함께 깊이를 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Q. 루게릭병 환자 사례가 인상 깊다. 루게릭병은 근력이 점차 약해지는 퇴행성 질환으로, 한의계에서도 접근이 쉽지 않다. 해당 환자는 처음 와상 상태로 대소변 처리가 필요했고, 보호자의 부담도 컸다. 먼저 정기적인 방문진료를 통해 침·약침·뜸 치료, 한약 처방으로 경직 완화, 수면 개선, 기력 회복에 집중했고, 치료 강도와 방식을 조절해갔다. 그 결과 상체 움직임과 호흡이 안정됐고, 보호자 도움으로 교회 예배에 참석할 정도로 회복했다. 의료적으로 이 기적과 같은 변화는 환자와 가족 모두 삶의 방향을 되찾게 했으며, 한의진료가 중증 희귀질환에서도 삶의 질 회복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Q. ‘한·양방 협진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협진은 환자 중심 의료를 실현하는 가장 현실적이고 필요한 방법이다. 한의약은 기능 회복과 일상 복귀에 강점이 있고, 양방은 진단과 급성기 대응에 특화돼 있다. 결국 두 체계가 만나야 환자를 입체적으로 보고 치료의 깊이도 달라질 수 있다. 현장에선 의무기록 공유, 환자 경과 공동 모니터링, 정기 회의 등의 협업 구조를 점차 넓혀나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한 팀’이라 부르기엔 갈 길이 남아 있고, 직역 간 역할과 시선 차이도 존재한다. 그래서 ‘설득’보단 시간을 들여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임’을 체감하고 있다. 협진 효과를 꾸준히 쌓고 결과를 공유하며 서로 전문성을 인정한다면 언젠가 ‘함께 환자를 보는 한 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한의사도 협진에서 대등한 의료 주체로서 실력을 꾸준히 증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내년 ‘돌봄통합지원법’ 시행에 있어 급선무 과제는? 한의사 참여 재택진료와 일차의료 방문진료 시범사업은 양방에 비해 행위 범위가 제한적이고 수가도 낮게 설계된 구조적 한계가 있다. 따라서 통합돌봄체계에서 한의 돌봄이 실질적 역할을 하려면 수가 현실화와 제도적 근거 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다.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는 지자체 조례 제정이다. ‘돌봄통합지원법’이 시행되는 2026년 3월에 맞춰 조례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올해 12월까지 공표가 완료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9월까지는 논의가 마무리돼야 한다. 예방, 치료, 주치의 개념을 담은 한의 돌봄 내용을 조례에 반영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촉박한 만큼 각 지역 분회와 지부 차원의 집중적인 대응과 전략적 개입이 절실하다. 이는 현장의 실천이 제도로 반영될 마지막 기회일 수 있으며, 한의계가 공공의료에서 본격적 역할을 확보하려면 지금 전력을 다해야 한다. -
진심이 닿는 곳, 몽골에서의 7일[한의신문] 지난 7월 4일부터 10일까지 제177차 WFK-KOMSTA 몽골팀으로서 울란바토르에 한의약 해외 의료봉사를 다녀왔다. 한국 마트, 한국 편의점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그리 낯설지 않은 그곳에서, 어떤 여행보다도 깊은 울림과 값진 경험을 얻었다. # 의료봉사의 필요성 봉사기간동안 한몽친선병원에는 하루 약 200명의 환자분들이 찾아오셨다. 많은 분들이 이른 아침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도 우리보다 먼저 병원 앞에 도착해 기다리고 계셨다. 몽골은 대부분의 의료기관이 울란바토르에 집중돼 있어, 의료서비스의 지역 간 불균형이 심하다고 한다. 진료 받으러 시골에서부터 먼 길을 오신 분들도 많았다. 외상 후 제때 치료받지 못해 후유증이 남은 환자, 병원에 가본 적이 없어 질환이 만성화된 환자들도 있었다. 직접 현장에 와서 보고 보건의료분야 공적개발원조(ODA)의 필요성을 체감할 수 있었다. # 한-몽 문화적 차이와 유사점 예진을 맡아 환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흥미로웠던 점 중 하나는 몽골 사람들의 증상 표현방식이었다. 몽골에서는 아픈 부위를 특정 장기와 관련지어 표현했다. 예를 들어, 허리가 아프면 ‘신장’, 소화불량은 ‘위장’ 또는 ‘췌장’, 가슴이 답답하면 ‘심장’이 좋지 않다고 표현하는 식이다. 한의학에서 오장육부 개념을 해부학적 장기가 아니라 범주의 용어로써 사용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생각해 인상 깊었다. 이러한 유사성 때문인지 한의학적인 설명도 환자분들께서 낯설어 하시지 않았고, 잘 이해하시는 모습이었다. # 정성과 진심이 오가는 봉사현장 4일간의 진료현장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곳이었다. 나는 환자분들을 몽골어로 맞이하고 진료실 번호를 불러주기 위해 통역 선생님께 몽골어를 배웠다. 환자분과 눈을 맞추고 “센베노”라고 인사했을 때 돌아오는 미소가 내 마음을 환하게 밝히는 기쁨이었다. 그렇게 마음이 통하는 순간의 기쁨이 좋아서 언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히 들었다. 봉사 마지막 날, 한 할아버지 환자분이 진료가 끝난 후에 오셨다. 이미 진료실을 모두 정리한 뒤였지만, 무려 4시간이 걸려 이곳에 오셨다는 환자분을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마지막 날이라 모두 지쳤을텐데도, 팀원들은 주저 없이 다시 베드를 세팅하고 환자분을 맞이했다. 마지막까지 환자에 대한 책임과 진심으로 진료에 임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마음으로 봉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낫고자 하는 간절함과 우리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찾아오신 분들께 정성으로 응답하고자 했던 마음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 의료인로서의 마음가짐을 발견하다 몸은 고되어도 전혀 힘들다고 느끼지 않았던 것은 환자분들의 반응 덕분이었다. 환자분들의 미소와 감사인사 한마디에 피로가 눈녹듯 사라졌다. 치료 후 주치의 선생님뿐만 아니라 진료보조인 나에게도 악수를 청하며 고마움을 전하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다. 어제보다 훨씬 좋아졌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내가 다 기쁘고 뿌듯했다. 봉사 마지막 날, 한의사 선생님들께서 환자분들께 “저희가 없어도 꼭 치료 잘 받으셔야 해요.”라고 말씀하시던 게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들은 본인이 맡았던 환자를 이제 봐드리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크다고 하셨다. 조금 더 치료받으면 훨씬 좋아질텐데… 나 역시 예진했던 환자분들이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경과는 어떤지 궁금했고, 다음날 다시 찾아오신 환자분을 보면 반가웠다. 한의사로서의 보람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느꼈다. 내가 맡은 환자에 대한 책임감, 환자의 회복으로 받는 보답. 앞으로 한의사로 일하는 데에 이 경험은 큰 원동력이 될 것 같다. # 봉사는 시간을 “내서” 하는 것 “봉사는 시간이 되면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다.” KOMSTA에서 자주 듣던 말이다. 이번 봉사를 통해 그 뜻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나눌 때에 마음을 주고받으며 돌아오는 감동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그래서 앞으로도 봉사를 계속 이어가고 싶다. 이번 몽골 봉사는 이 마음에 확신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이번 봉사에 함께한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파견의 시작부터 끝까지 수고해주신 이승언 단장님과 KOMSTA 사무국, 한몽친선병원에서 10년간 진료를 이어오고 계신 문성호 원장님께서 진료현장이 원활히 운영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덕분에 우리 팀은 봉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4일간 완벽한 한 팀이었던 현지 통역 선생님들과도 소중한 인연을 맺었다. 나에게 Tsetsen(지혜롭다)이라는 몽골어 이름을 지어주시고, 한의사로 다시 오면 통역을 전담해주겠다고 약속하고, 고향집에 초대까지 해주신 분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몽골과 진정한 정을 나누고 마음에 따뜻함을 채울 수 있었던 건 모두 사람들 덕분이었다. 그리고 잊지 못할 추억을 함께 쌓은 우리 팀원들, 박종수, 백진욱, 김원록, 김광호, 김진우 한의사 선생님, 백수연, 박은솔, 홍경수, 서병관, 양우준 학생단원 여러분께도 수고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선배님들이 진료하시는 모습과 해주신 말씀들은 나에게 큰 귀감이 되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미래를 준비하는 학생단원들에게도 좋은 자극을 받았다. 이처럼 값진 기회를 주신 KOMSTA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신미숙 여의도 책방-66신미숙 국회사무처 부속한의원 원장 (前 부산대 한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편집자주] 『신미숙의 여의도 책방』은 각 회마다 1개의 키워드에 5권의 도서를 추천하는 형식으로 이어갑니다. 지난 7월8일은 질병관리청이 온열질환 응급실 감시체계를 운영해 온 2011년 이래 가장 이른 시기에 응급실에 방문한 누적환수가 1000명에 도달한 날이다. 구미 공사장 노동자와 경북 팔각산 등산객, 전북 구봉산 등산객의 안타까운 사망 뉴스도 이날 전후로 들려왔다. 더위 만큼이나 진땀을 유발하는 기사들이다. “열대야 2주차, 올들어 낮기온 최고 갱신”, “100년만의 찜통 더위, 습도와 불쾌지수 최고조” 등의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듯한 날씨 기사의 경쟁적으로 붉은 제목들은 글자를 읽는 것만으로도 이글대는 아스팔트 위에 맨발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을 실감시키는 위력이 분명히 있다. “동남아 여행갈 필요가 있나? 서울이 방콕인 걸!” 올 여름 태국이나 베트남보다 한국이 더 덥다는 것은 느낌이 아닌 실제 기록으로 확인된다. 이런 날씨 관련 사건사고의 사회면 바로 뒷 페이지에 실려있는 힙하다는 국내외의 피서지 정보와 최고급 호텔들의 애플망고빙수가 얼마나 비싼지에 관한 비교 리포트는 사람들의 마음에 또 다른 불을 지핀다.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사정과 함께 ‘뭐 한 번 먹어주지. 그깟 호텔 망고빙수, 나를 위한 스몰 럭셔리’라고 마음 먹었다가도 ‘그래도 빙수 한 그릇에 10만원은 좀 너무하지 않나?’라는 내적 갈등을 겪고나면 ‘집 앞 저가커피숍의 4000원짜리 컵빙수라도 사수하자’는 결심을 슬그머니 실천에 옮기게 된다. 일사병과 열사병의 계절에 화(火)를 떠올리는 것은 이열치열의 정신이기도 하고 난데없이 진료실에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어보는 엉뚱한 짓과 비슷한 시도이다. 또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2018)라는 서울대 정치학과 김영민 교수의 책 제목에 부합되는 사유를 흉내내기 위함이다. 폭염도 괴로운데 이 폭염의 일상에 화병을 굳이 떠올리는 이유는 딱히 없다. 덥기 때문이다. 더위를 덜 타기 위한 몸부림에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겠는가? 새 정부 출범 후 국회의 여러 모습 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야당 의원들은 체력단련실과 사우나에서 건강관리와 힐링을 챙기시며 후일을 도모하고 있는 반면에 여당 의원들은 대통령실에서 전화가 걸려올까봐 하루 종일 노심초사 전화기를 노려보고 계시는 분들이 다수라는 꽤 믿을만한 소식통의 제보를 접했다. ‘누구는 장관 후보도 되고 또 다른 누구는 대통령 곁으로도 불려가는데 왜 나에게는 아무런 전화가 걸려오지 않는다는 말인가?’ 절망감 혹은 배신감 혹은 가슴앓이 혹은 그로 인한 불안초조? 이 모든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난다면 다름 아닌 화병(火病)이다. 정치인들의 화(火)를 떠올리니 근본은 질투요, 껍질은 감투다. 비슷하게 정치를 시작해도 중간 경로에 따라 종국에 처한 자리는 천양지차다. 명함도 인기도 영향력도 각기 다른 포물선을 그릴 수밖에 없다. 이 와중에 현직에 있을 때 다음 번 총선까지 염두해 가며 본인의 입지를 지속적으로 비교, 분석, 계산해야 하니 이보다 더 피곤한 자리도 없다.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서 떨어지면 사람도 아니다”라는 씁쓸한 문장이 있다. 총선 낙선자에 대한 조롱을 담은 풍자적 문장이다. 이는 냉정한 현실이기도 하다. 그렇게도 전국민적인 욕을 먹는 자리가 뭐가 좋다고 의원 한 번 해 보겠다고 저리도 별의별 수를 다 쓰나 싶겠지만 국회의원은 얻어먹는 욕 만큼의 무게감으로 동시에 입법에 영향력을 미치고 그로 인한 유명세를 얻는 일종의 정치 셀럽이다. 뺏지를 달고 있는 현직 때와 뺏지 떨어진 전직 의원, 이 두 그룹 사이에 부여되는 권리와 의무 무엇보다도 중요도나 주목도에 따른 바쁨의 정도가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에 후자 그룹에 속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해 한동안 괴로워하는 분들이 꽤 많다. 이 모든 것을 쉼 없이 멀티태스킹 해내는 의원들의 체력과 멘탈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모두 슈퍼맨인 것만은 틀림 없다. 현재를 살아가는 한의사들의 마음은? 2025년을 살아가는 현직 한의사들의 마음 속에도 불덩어리 한두개씩 있을 것이다. ‘내가 미쳤다고 의대 등록을 포기하고 한의대를 와서 이 고생을 하고 있다니’ 혹은 ‘그 때 수련의를 그만 두고 나가서 선배가 하던 요양병원을 이어서 했었더라면 지금쯤 은퇴자금 확보하고 동네 할매할배들 비위는 더 이상 안 맞춰도 되었을텐데’ 등등 이불킥에 머리쿵을 해 보아도 이미 늦었다. 물은 엎질러졌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한의계에 몸과 맘을 담근 지 수십년이 지나버려 한의사 팔자임을, 이생망 운명임을 받아들인 채 하루하루 버티고 있는 자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눈팅만 하는 모 정치 커뮤니티에 난데없이 “2025년에 한의사가 왜 필요하죠?”라는 게시글 제목이 눈에 들어온다. 글 내용도 댓글도 뻔할 듯하여 건너뛰었다. 열 받는다. 요즘 말로 킹 받는다. 대학병원 경유해서 초재진으로 내원하는 모든 환자들은 하나같이 “교수님이 침 맞지 말라던데요”, “담당 교수가 한약 먹지 말라는데요” 합창을 한다. “여긴 한의원인데 그럼 뭘 해 드릴까요?” 로마 시대의 스토아 철학자인 세네카는 일찍이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와 더불어 『분노에 대하여』라는 그의 저작물을 통해 아래와 같이 조언한 바 있다. 『세네카의 화 다스리기』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메이트 북스, 2019년 4월) - 화라는 녀석이 일단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면 화의 노예가 되기 쉽다. - 일단 화를 내는 것에 성공하면 의기양양해지지만 실패하면 광기에 미쳐 날뛴다. - 화는 내가 상처를 입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다. - 화를 잘 내는 성격은 다양한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타의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싫어한다. - 충동은 단순한 행동에 불과하지만 화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합된 복잡한 감정이다. - 두려움은 회피하려는 마음을 낳고, 화는 돌진하려는 마음을 가져온다. - 화라는 지독한 병은 불평불만과 함께 시작된다. - 화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잠시 멈추는 것이다. - 사람들은 각기 다른 것에 화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취약한 부분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어야만 그 부분을 특별히 보호할 수 있다. 『화병의 인문학, 근현대편』 (박성호, 최성민, 모시는 사람들, 2020년 9월) -한의학에서 ‘화병’은 화(火)의 개념에서 나왔지만 단일한 병인을 가진 병명으로 보지는 않는다. 화병은 증상적으로는 광범위하고, 사회문화적으로는 국지적이라 할 수 있다. - 우리에게 화병은 그저 질병으로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화병은 하나의 문화다. - 현대 한의학에서 화병의 원인으로 손꼽는 것은 대체로 가족 내에서의 갈등 내지는 가족을 잃은 슬픔 등이다. - “간은 녹는 듯, 염통은 서는 듯, 창자는 끊어지는 듯, 가슴은 칼로 어이는 듯”하는 마음의 병은 신체로까지 파급된다. - 말하자면 마음(心)의 병이 몸(身)으로 발현되었다가 다시 정신, 즉 마음(心)으로 회귀하는 셈이다. - 화병에 대한 임상연구에서는 분노, 억울, 불안, 초조, 우울, 의욕상실 등의 정서적인 증상과 함께 답답함, 두근거림, 치밀어 오름 등의 다양한 신체적 증상이 거론된다. - 울화가 몸과 마음의 병을 낳기에 신체 증상과 동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화병은, 신경쇠약의 맥락에서는 과도한 자극으로 인해 소모된 신경이 육체까지도 소모시킨다는 형태로 재배치 되었다. - 화병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불가항력적 충격이 영문을 알 수 없게 다가올 때, 합리적인 이성으로 자신이 처한 고통스런 상황이 이해되지 않을 때 찾아온다. 분노와 억울함, 답답함이 뒤섞여서 나타나는 심리적 질병이다. 『화병의 인문학, 전통편』 (김양진, 염원희, 모시는 사람들, 2020년 10월) - 공식 기록상으로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화병을 앓은 이는 선조이다. 선조가 스스로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을‘화병’으로 언급한 이래 이 병은 조선 왕실의 누적된 유전병이 되어 버린다. - “나는 화병을 앓는 것이라서 계사(啓辭)를 보고부터는 심기가 더욱 상하여 후문(喉門)이 더욱 폐색되고 담기(痰氣)가 더욱 성한데 이것은 좌우의 환시(宦寺)가 다 알고 있는 바이다“ - 가부장제적 질서 안에서 남녀 차별이나 적서 차별 등에 의해 누적된 화병은 사회생활로 이어지면서 더 큰 차별과 원망으로 확산되어 사회 전반으로 퍼져 있다. - 화병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분노이다. 물론 분노만이 화병의 원인이 되는 감정은 아니지만, 화병은 일차적으로 분노와 관련된다. 억울함이 쌓여 바깥으로 폭발하면 분노가 된다. - 중년 여성의 화병 증상은 각각 울구화화(鬱久化火), 심신불교(心身不交)와 같은 한의학 용어로 설명할 수 있다. 『욱하는 마음 다스리기』 (알루보물레 스마나사라, 밀라그로, 2020년 11월) - 화는 맹독이다. 마음이 화에 물들면 인간의 성장은 멈춰버린다. - 화라는 것은 자신을 스스로 화염에 휩싸이게 하는 것이다. - 화내지 않는 사람이 모두의 고삐를 쥐고 있는 것이다. - ‘화가 없다’라는 것은 화를 낼 조건이 갖춰져 있어도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 지혜의 개발이 화를 극복하는 지름길이다. - 화를 내는 사람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약하다. 『한국인의 울분과 외상 후 울분장애』 (채정호 외, 군자출판사, 2021년 3월) - 영어로 Hwabyeong 혹은 Hwabyung이라는 단어로 구글 검색이 가능할 정도로 화병은 한국인의 독특한 문화증후군으로 서양에서는 관찰되지 않는 역기능적 분노(dysfunctional anger)이다. - 화병은 정신의학적 용어로 바꿔 말하면, 심한 신체증상을 동반한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다. - 화병의 유병률은 일반 인구집단의 3-5%에 달하며 외래를 방문하는 신경증 환자들의 20-30%가 화병에 해당된다. - 화병에 대한 연구는 국내 정신의학회에서는 많지 않지만 한방정신의학에서 비교적 활발하고 한동안 심리학, 사회복지학, 상담학 등에서 활발하였다. - 화병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어떤 방어기제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우울증이나 공황장애 또는 정신병적 장애로 분화, 발달할 수 있다. - 화병 치료의 일차적 목적은 당연히 분노의 감소이다. 화병 치료의 원칙은 다른 정신장애에서와 같이 통합적이고 전인적인 접근이어야 한다. 새 정부의 인사청문회 시즌이다. 슈퍼위크라고도 불리운다. 아마 이 글이 실릴 즈음이면 청문회는 마무리되고 야당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각 부서의 장관 후보들은 임명장을 수령했거나 수령 준비 중일 것이다. 장관 후보에 지명이 되자마자 모 의원의 보좌진 상대 갑질 의혹 뉴스가 떴다. 진위를 떠나 갑질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히 존재하고 그 양측의 입장이 완벽하게 다르다는 게 쟁점이다. 가장 큰 문제는 갑질의 가해자는 대부분 그 행위가 상대방에게 해가 되는지를 아예 모른다는 것이다. 갑질 피해자에 대한 감수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반대로, 갑질의 피해자 대부분은 이미 화병이 진행된 중증 환자이다. 가해자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되고 실직이라도 되면 본인 처지를 심하게 비관하게 된다. 이직에 성공해도 전 직장에서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라면 새 직장에서도 더딘 적응력으로 이중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과거의 화병이 주로 가족 안에서의 관계에서 유래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 요즘의 화병은 남녀를 불문하고 직장 내에서의 갑을관계에서 파생된 여러 갈등의 결과로 발생된다. 성별과 세대에 따른 화병의 변천사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마음 건강을 돌아보게 만든다. ‘너만 귀하냐? 나도 귀하다?’, ‘나는 귀한 사람입니다. 당신도 똑같이 귀한 사람입니다’ 진료실에 입장하는 모든 이들을 대하며 속으로 반복해서 외우는 주문이다. ‘화’라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단단한 지혜 절실 최근 넷플릭스에서 화제중인 애니메니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 초반에 난데 없이 한의원과 한의사가 등장한다. 보컬 루미가 갑자기 컨디션 난조로 목소리에 문제가 생기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른 멤버 조이가 한의원을 추천하고 나머지 멤버 미라까지 다같이 한의원을 방문한다. 한의원을 들어서며 미라가 내뱉는 말 “사짜 냄새가 풀풀 나는구만” 한의사가 진료실로 들어서자 멤버들은 효과가 직방인 한약을 받으려고 왔고 빨리 나을수록 좋다고 약처방을 재촉하지만 느긋한 한의사는 부분을 치료하려면 전체를 이해해야 하는 법이라며 진찰이라기보다는 관상을 본다. 루미는 벽이 너무 많고 한 부분에만 집중하고 있으며 그러다보니 분열되고 고립되고 감정을 숨기며 다른 멤버들과 목욕탕도 같이 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얼굴만 보고 이 모든 것을 귀신처럼 맞춘 한의사의 신통함에 조이는 감탄하지만 루미는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한약만 받으면 되니 어서 목소리 치료제나 달라고 다시 한 번 채근한다. 마침 딱 맞는 게 있다며 ‘몸에 좋은 한약’이라고 기재된 한약박스를 멤버들에게 내어 주는데, 나중에 한약 파우치 껍질이 벗겨지면서 한약은 포도 에이드로 밝혀진다. 한국 문화에 대한 현실 고증을 깨알 디테일까지 잘 살렸다고 칭찬 세례를 받고 있는 작품에 한의원과 한의사가 등장하여 나름 반갑기도 했지만 관상으로 진찰을 하는 장면이나 포도 에이드를 표지갈이 하여 한약이라고 판매한 행위는 해외에서도 대체보완의학 분야 종사자들을 사기꾼 기질을 가진 정통 의사의 격에는 미치지 못하는 부류로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진행 중인 3특검의 지난주 주요 뉴스 한 토막은 누군가의 격노가 있었냐 없었냐 들었냐 말았냐에 관한 것이었다. 윗 사람의 분노는 아랫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정책을 급변시키며 인사를 꼬이에 만든다. 화라는 감정에 좌우되지 않는 단단한 지혜가 절실한 시절이다. 화를 내지 않아야 진정한 리더라는 인용 서적의 한 문장을 떠올려 본다. -
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300)김남일 교수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허준(1539〜1615)은 『동의보감』에서 ‘傷寒無補法’이라는 주장에 분명히 비판하고 있다. 傷寒無補法이란 “傷寒에는 補法이 없다”는 주장이다. 傷寒이라는 병은 외감성의 사기가 인체를 침범하여 생겨난 질병이기에 이러한 외부로부터 들어온 사기를 몰아내는 치료법을 위주로 치료해야 하며, 補法은 사용할 수 없고 瀉法을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 주장의 골자이다. 이러한 주장의 시작을 연 것은 宋代의 李子建이다. 李子建은 張仲景의 서적을 8년 동안 연구하여 傷寒에는 惡證이 없으며, 용의들이 가끔식 방제를 잘못 투여하여 병이 깊어지게 만든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저술 『傷寒十勸』에는 상한병에 대한 10가지 주목되는 주장을 하였다. 책의 이름이기도 하고 주장의 다발이기도 한 이 ‘傷寒十勸’의 하나로 “傷寒病은 마땅히 바로 毒氣를 공격해야지 補益해서는 안 된다(傷寒當直攻毒氣不可補益)”라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이 주장에 대해서 樓英, 王肯堂, 張介賓 등은 치우친 점이 있다는 것을 들어 맹렬히 비판하였다. 허준의 맥락도 같은 맥락이다. 허준은 『東醫寶鑑』 寒門에서 ‘外感挾內傷證’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外感만 있고 內傷이 없으면 仲景의 法을 사용한다. <丹心>○傷寒에 內傷을 끼는 경우가 열 가운데 여덟, 아홉이다. 무릇 사기가 모이는 곳은 그 기운이 반드시 허한 것이니, 단지 補中益氣湯을 이리저리 加減해서 사용한다. 氣虛가 심한 경우는 附子를 조금 가해서 人蔘과 黃耆의 功이 행해지도록 한다. (方見內傷)<丹心>○傷寒에 丹溪는 補中益氣湯을 사용하였고, 海藏은 九味羌活湯을 사용하였는데, 모두 이것은 和解의 뜻으로 眞氣로 하여금 散失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綱目>○丹溪와 海藏 등 모든 현인들이 傷寒을 치료함에 모두 補養에 發散을 겸하는 법을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이에 風雨寒熱이 虛邪를 얻지 못하면 홀로 사람을 손상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俗醫들이 傷寒에는 補法이 없다(傷寒無補法)고 말하고는 虛實을 나누지 않고 一例로 땀을 내거나 사하시켜 夭橫에 이르게 하니 진실로 醫門의 罪人들이라 할 것이다. <綱目>○傷寒의 하나의 증상에 頭疼, 身熱, 惡寒, 微渴, 濈然汗出, 沈困, 身痛, 脚痠, 脈浮虛無力한 것을 勞力感寒이라고 이름하니, 잘못 正傷寒으로 여기고서 크게 發汗시켜서는 않된다. <回春>○外感에 內傷을 꼈으면 陶氏補中益氣湯, 十味和解散이 마땅하다.” 이 글은 王好古(海藏), 朱震亨(丹溪), 龔廷賢, 樓英 등 역대 의가들의 ‘傷寒無補法’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여기에 자신의 주장을 개진한 것이다. 『중의학술사』에 따르면 ‘傷寒無補法’에 비판적 견해를 피력한 의서는 樓英의 『醫學綱目』, 王肯堂의 『證治準繩』, 張介賓의 『景岳全書』 등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논쟁에 허준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것이다. 허준은 ‘外感挾內傷證’이라는 “대부분의 外感病은 內傷을 끼고 나타난다”는 주장을 통해서 ‘傷寒無補法’ 주장의 치우친 점을 보정하고자 했다. 이것은 “外感만 있고 內傷이 없으면 仲景의 法을 사용한다”는 것과 “傷寒에 內傷을 끼는 경우가 열 가운데 여덟, 아홉이다”라는 ‘外感挾內傷證’ 글의 서두에서 전제로서 깔고 있는 것이다. 傷寒無補法論에 대한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한의학 교육의 현재와 미래Ⅱ ⑮한상윤 대전대 한의과대학 교수 (한의학교육학회 회장)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대전대 한의과대학 한상윤 교수(한의학교육학회 회장)로부터 한의학 교육의 질적 향상과 함께 우수한 인재 양성을 위해 ‘한의학 교육의 현재와 미래Ⅱ’ 코너를 통해 한의학 교육의 발전 방향을 소개하고자 한다. “시험은 잘 보는데, 침을 놓으라면 손이 떨리고, 환자를 만나면 말문이 막힌다.” 강의실과 임상 실습 현장에서 종종 이런 학생을 만나게 된다. 현재 한의대에는 생각보다 이런 학생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지식은 탁월하지만 술기나 태도 역량이 부족한 경우다. 이처럼 한 분야에 치우친 성장은 결국 의료 역량의 불안정성으로 이어진다. 지금까지 한의과대학의 평가는 대체로 필기시험 중심이었다. 얼마나 외웠는가, 얼마나 정확하게 정답을 골랐는가가 교육의 성과를 가늠하는 기준이었고, 학생도 교수도 이 익숙한 구조에서 크게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복잡하고 다변하는 현대 의료 환경에서는 더 이상 ‘점수’만으로 의료인의 역량이 완성되었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훌륭한 한의사는 머릿속의 정보량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정확한 진단을 위한 지식, 올바른 술기, 공감과 윤리를 갖춘 태도—이 세 가지가 유기적으로 작동할 때 진정한 의료인의 실력과 역량이라 할 수 있다. 지식, 술기, 태도 등 세 축으로 학습목표 구축 따라서 이제는 학습 목표를 지식–술기–태도 세 축으로 구분하고, 각 축에 맞는 평가 지표와 방법을 입체적으로 설계할 때다. 먼저 지식 영역은 단순 암기에서 개념 이해와 적용, 비판적 사고력으로 평가의 초점을 옮겨야 한다. 여러 전공에서는 기존의 객관식 시험에 더해 서술형, 논술형 문항이나 복합형 문제 등도 도입되고 있다. 오픈북 시험, 자료 기반 시험, AI를 활용한 적응형 테스트(Adaptive Test)도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는다. 이런 변화는 단지 시험 형식의 다양화가 아니라, 지식을 연결하고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 설계의 일부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술기 영역은 단순한 임상적 기술이 아닌, 의료인이 아는 것을 직접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하며 동시에 환자 안전과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평가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한의과대학 교육에서 침, 뜸, 맥진 등의 술기 역시 이런 맥락에서 교육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객관 구조화 임상술기시험(OSCE)은 술기 역량을 측정하는 데 적합한 평가방식으로, 이미 거의 모든 의과대학과 한의과대학에서 시행되고 있다. 최근에는 VR이나 진단 시뮬레이터를 활용한 디지털 실습도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임상실습 중 교수나 전임의가 직접 관찰하고 즉시 피드백을 주는 DOPS(Direct Observation of Procedural Skills) 방식도 효과적인 도구이다. 이러한 평가는 정확성, 안전성, 환자 대응 능력 등을 세밀히 측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점차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간과하기 쉬운 태도 영역의 평가는 의료인으로서의 자질을 규정하는 데 있어 핵심적이다. 한의학은 특히 전인적 접근과 공감적 진료를 중시하므로, 단순히 지식이 많은 것보다 어떻게 환자와 관계를 맺는가가 중요하다. 단순히 ‘착한 학생’ ‘예의 바른 태도’ 정도로 정의되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실제 임상 현장에서 환자와 어떻게 소통하고 공감하는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간편임상평가실습이라고 하는 Mini-CEX(Clinical Evaluation Exercise)를 통해 교수자는 학생의 환자 대응, 의사소통, 윤리적 판단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학생의 반성적 성찰을 담은 리플렉션 저널이나, 팀 프로젝트에서의 협업 과정, 또래 평가 등도 태도 평가의 중요한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e-Portfolio, 역량 기반 교육의 핵심 플랫폼 활용 의과대학에서는 학생의 반경 내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평가하는 ‘360도 다면평가(360-degree Evaluation)’를 시행하기도 한다. 교수, 간호사, 동료 학생, 환자 등 다양한 관찰자의 시선을 반영하여 학생의 태도를 입체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한의과대학에서도 이러한 다면평가 방식의 도입을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교육과정 내에서 태도 평가의 비중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 이 세 영역의 평가를 통합하고, 학생의 개별 학습 궤적을 기록·관리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가 바로 포트폴리오다. 포트폴리오는 학생이 학기마다 자신의 목표를 설정하고, 학습 결과물(시험 성적, 실습 기록, 자기성찰 에세이 등)을 누적·정리하며, 지도 교수와 면담을 통해 피드백을 받고 성장 경로를 재설계하는 과정을 담는다. 이는 단지 평가의 도구가 아니라, 학생이 자신의 배움의 경로를 시각적으로 확인하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성적표인 셈이다. 이미 많은 의과대학에서 전자 포트폴리오 시스템(e-Portfolio)을 도입해 역량 기반 교육의 핵심 플랫폼으로 활용 중이며, 졸업 후 전공의 지원이나 커리어 개발의 기초자료로까지 연계되고 있다. 한의과대학에서도 이 같은 시스템을 구축하고, 학생 개개인의 성장 경로가 한눈에 보이도록 정량·정성 자료를 통합해야 한다. “한의학교육은 이제 전환점에 서 있어” 물론 이런 변화를 현실에 적용하려면 많은 과제가 남아 있다. 평가를 설계하고 시행할 교수자의 시간과 역량, 표준화된 루브릭의 부족, 학생들의 저항감, 학교 차원의 행정적 지원 부족 등이 현실적인 장벽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단일 교과 수준이 아니라, 학과 전체, 더 나아가 대학본부 차원의 협력 시스템이 필요하다. 평가 기준을 공유하고, 평가와 피드백이 단절되지 않도록 교육의 흐름을 설계해야 한다. 한의학교육은 이제 전환점에 서 있다. 단순히 성적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전문성과 성장 경로를 읽어내는 평가가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숫자만 남는 시험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와 실천을 기록하는 평가·지식·술기·태도를 입체적으로 비추는 교육, 그것이 바로 앞으로의 한의학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 생각한다. -
“한의약은 선수생명 연장의 동반자…이제는 내가 홍보할 차례”[한의신문] 프로야구 선수에서 메이저리그 코치, 그리고 이제 우석대학교 총장으로 제2의 인생을 걷고 있는 박노준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협회장(사진)은 누구보다 한의약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있다. 24년 간의 선수 생활 동안 수차례의 부상을 한의진료로 극복해온 그는 최근 대한한의사협회와의 업무협약을 통해 선수와 국민 모두가 한의약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편집자주] Q. 현재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안양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데 이어 지난해 3월1일부터 우석대학교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과거 스포츠마케팅 관련 논문 등으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서울산업대학교 등에서 약 9년간 교수로 활동한 만큼 스포츠 관련 행정과 경영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최근 고등교육 정책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학령 인구의 급감 등으로 여건이 좋지 않아 사립대학의 미래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현재 총장으로 있는 전주캠퍼스뿐만 아니라 지역혁신중심 대학지원체계인 ‘RISE(Regional Innovation System & Education)’ 추진단 활동을 통해 지자체 및 산·학·연·관과 협력하며 지역인재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Q. 대한한의사협회와 업무협약을 체결한 소감은?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협회 조계현 부회장(KBO 전력강화위원장)이 대한한의사협회 홍보대사를 맡게 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협약 체결까지 이어지도록 도와주신 윤성찬 회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번 협약은 상호 윈-윈하며 상생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이미 많은 선수들이 침 치료와 한약 등 한의진료를 받아오고 있는 상황에서 공식 협약을 맺게 돼 매우 뜻깊다. 현재 한의약의 우수성을 국민들에게 어떻게 알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Q. 선수 시절부터 한의진료를 애용해왔다. 스포츠인으로서 한의약의 놀라운 효과를 직접 체험한 산증인이다. 아마추어 12년, 프로 12년 등 총 24년간 현역 선수로 활동했으며, 이후 약 10년간 뉴욕 메츠에서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를 오가며 라운드 로딩 코치로 활동했다. 선수 시절 발목 염좌, 근육 손상 등 부상이 잦았는데, 양방 치료는 보통 보름에서 한 달 이상 소요되는 반면 한의사의 침 치료를 통해 하루 만에 현장에 복귀해 경기에 나섰던 경험이 있다. 이처럼 한의약의 효과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며, 선수로서 직접 그 효능을 경험했기에 이제는 이를 널리 알리는 것이 내 자신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특히 골관절 질환에 있어 한의약은 골조직 재생 촉진, 혈액순환 개선, 염증 완화 등에 뛰어난 효과가 있으며, 인대 염좌 치료에는 침 치료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었다. 우스갯소리로 한의약에 대해 ‘맹신한다’고 할 정도로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Q. 최근 한의약에 대한 접근은? 우석대학교에는 한의과대학이 있으며, 부속 한방병원도 있어 평소에도 한의약을 자주 접하고 있다. 현역 시절과 마찬가지로, 주변 사람들이 신체 어디가 불편하다고 하면 침 치료와 한약 처방을 권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한의원에서 처방받은 한약을 복용하며 자란 덕분에 여름에는 지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덜 타며 건강을 유지해오고 있다. Q. 최근 다시 선수 양성에 힘쓰고 있다. 우석대학교는 전주캠퍼스에 9개, 진천캠퍼스에 1개의 운동부를 운영 중이며, 앞으로도 종목 확대를 계획하고 있다. 이에 진천캠퍼스는 개교와 함께 지난 4월 스포츠단 창단식을 열고, 지역 기반 엘리트 체육 육성에 나섰다. 이는 지역 초·중·고에 다양한 운동팀이 있음에도 대학 운동부가 없어 학생 유출을 우려한 지역의 요청에 따른 것이다. 운동부 창단은 지역 인재 보호와 행정적 지원 확보에 도움이 됐고, 많은 학생들이 고향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학교에도 고3 체육 인재 유치 등 긍정적인 효과를 주고 있다. Q. 선수촌 한의진료과 설치 및 한의사 주치의에 대한 견해는? 이미 오래 전부터 선수촌에 한의진료과를 설치할 필요성을 느껴왔다. 최근 유승민 대한체육회장과 김택수 국가대표선수촌장에게도 한의사가 상주하며, 선수촌 급여 체계 안에서 근무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적극 전달했다. 앞으로 더 많은 학생 선수들과 프로 선수들이 한의진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백방으로 힘쓸 예정이다. 우석대 한의대와 부속 한방병원에는 침술이 뛰어난 교수님들이 많은데, 진천군민을 대상으로 학생들과 함께 자원봉사도 펼치는 등 사회적 공헌 활동도 해왔다. 또한 이번 협약을 통해 선수들이 한의약으로 도움을 받은 만큼 선수촌에도 한의사가 상주할 수 있도록 끝까지 힘을 보탤 것이며,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세영 선수가 런던올림픽에서 무릎 통증을 침 치료로 회복하고 금메달을 따낸 사례처럼 침 치료는 빠른 효과를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를 대외적으로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는 개인적으로, 또 국가대표선수협회를 통해서도 한의약의 뛰어난 효능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Q. 향후 계획은? 국가대표선수협회의 창설 취지가 ‘꿈나무 양성’인 만큼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 혜택을 제공하고, 점차 유소년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여러 종목의 아카데미도 함께 운영해보고자 한다. 운동선수에게 있어 부상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부상 후 빠르게 복귀하는 데에 한의약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대한한의사협회와의 이번 협약이 10년, 50년을 이어갈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할 계획이다. 전국의 한의사 선생님들께 진심 어린 감사와 응원의 말을 전하고 싶다. -
“재밌는 연구란 항상 새롭고 창의적이며 도전적이어야 하죠∼”Q. 수상한 소감은? “아직 부족한 점이 많지만, 한의학 발전에 기여하라는 격려의 의미로 주신 상이라고 생각한다. 감사한 마음으로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더욱 책임감을 갖고 연구에 매진해 나가겠다.” Q. 그동안 진행한 주요 연구 내용은? “그동안 진행한 연구는 크게 두 가지 분야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인공지능과 한의학을 결합해 한의사의 사고모형을 분석하는 연구다. 일반적으로 인공지능을 이용한 한의학 연구라고 하면 한의사의 진단이나 치료처방을 재현하는 AI모델을 만드는 연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접근하는 방식은 조금 다르다. 인공지능의 데이터 처리 및 학습 알고리즘을 통해 한의사가 진단하고 처방하는 사고과정을 설명해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한의사가 환자의 전신적 증상을 관찰하고 이로부터 한열, 허실 등의 변증을 도출해내는 과정을 기계학습의 ‘차원축소(dimensionality reduction)’로 해석할 수 있음을 제안해 왔다. 이를 통해 한의학에서 정보를 압축하는 방식과 그것이 정보처리 관점에서 주는 효용, 그리고 손실되는 정보의 정도를 정량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같은 연구의 의의는 한의학의 정보처리 방식을 설명하는 새로운 언어를 제공한다는 점으로, 이를 통해 한의학 이론 자체를 발전시키고, 한의사 사고모형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 AI모델을 구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또 다른 연구 분야는 최근 ‘NeuroAI’로 일컫어지는 분야로, 심층신경망을 활용해 뇌의 작동원리를 시스템 수준에서 이해하려는 것이다. 구체적인 연구 주제는 소뇌신경망의 학습과 기억 메커니즘으로, AI 학습 이론을 바탕으로 소뇌가 어떻게 효율적으로 학습하고 기억을 저장하는지에 대한 가설을 세우고, 이를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구현한 이후 실제 동물실험을 통해 검증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Q. 연구자로서 진로를 선택한 계기는? “학부 시절 연구자 진로에 막연한 관심은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알아보거나 경험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본과 4학년 때 KAIST 의과학대학원 하계인턴 프로그램에 한 달간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연구자의 진로가 매력적이라고 느끼면서도 각 연구실의 고도로 전문화된 연구주제들의 중요도와 의미를 당시 구체적인 질문이 없었던 인턴으로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2학기에 김창업 교수님의 NNSM 연구실 대학원생 모집공고를 보게 됐는데, 당시 이해한 수준은 부끄럽지만 ‘인공지능 기반의 한의학 연구라니…요즘 말하는 인공지능 의사 이런 건가? 왠지 멋져…’ 정도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구체적인 주제보다도 “연구는 재밌어야 하고, 재밌으려면 새롭고 창의적이며 도전적이어야 한다”는 교수님의 말씀에 막연히 동기화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Q. 연구자의 길을 걸으면서 어려운 점은? “대학원에 진학한 첫 해, 감사하게도 해외 학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그동안 공부해온 분야에서 전세계 석학들의 발표를 듣는다는 사실만으로도 두근거렸고, 처음 경험해본 포스터 세션에서는 ‘열띤 토론의 장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막연하게 “난 큰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어”라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야 제대로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것이 새롭고 마냥 신나기만 했던 신입생 시절이 지나고 연차가 쌓여가면서, 학회 무대에서 내 자신의 연구 주제를 발표하기 위해서는 나머지 기간 동안 연구실의 작은 내 공간에서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치열하고도, 때로는 지난한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Q. 연구자의 길을 걷고 싶은 한의사 회원들에 조언한다면? “먼저 혼자 고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컨택하고 경험해보기를 권하고 싶다. 생각보다 국내외 유수의 연구기관에서 다양한 연구 분야에 종사하고 있는 한의사 선배님들이 많이 계시다. 그리고 뜻이 있는 후배님들의 연락에 기꺼이 응답해 줄 것이다. 연구주제에 따라서도, 또 연구기관에 따라서도 연구의 형태가 아주 다양하기 때문에, 본격적인 대학원 진학 전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현장의 소리를 들어보고 인턴 프로그램이나 워크샵 등의 기회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해보면 좋을 것 같다. 이러한 적극성은 사실 적극성은 내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었는데, 대신 나에게는 무모함이 있었고 다행히 운까지 따라주었던 것 같다.” Q. 현재 관심을 갖고 있는 연구 분야 및 향후 계획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연구 주제 중 현재 조금 더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은 NeuroAI 기반의 계산신경과학적 연구다. 최근 발표한 논문은 소뇌신경망에서 운동기억이 학습되고 저장되는 원리에 대한 것이었는데, 진행 중인 연구에서는 운동조절 등의 전통적으로 알려진 소뇌의 기능을 넘어 고차적인 인지기능과 체내 항상성 조절을 위한 섭식행동에서 소뇌가 어떠한 연산을 하고,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지 밝혀보려고 한다. 또한 당장은 아니더라도 한의학적 치료의 신경과학적 메커니즘 연구에도 도전해보고 싶다. 최근 침 치료의 효과가 어떠한 신경회로를 통해서 발현되는지, 어떠한 분자생물학적·행동학적 변화를 이끌어내는지에 대한 굉장히 높은 수준의 연구들이 다수 발표되고 있다. 저는 제가 가진 계산신경과학적 전문성을 살려 생리학적·병리학적 상태에서 뇌신경망의 연산특성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또 이것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지 등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해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Q. 그 외 하고 싶은 말은? “개인적으로 한의계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임상 현장에서의 역할뿐만이 아니라 기초와 임상 전 분야에서 연구를 통해 한의학 이론을 검증하고, 새로운 발견을 통해 이론을 수정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사람들 역시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여건은 사실 녹록치 않다. 6년이라는 한의대 재학기간 이후 또 다시 기나긴 시간 동안 트레이닝을 받아야 하는데,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고민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배움의 과정이라고는 하지만, 이들 한 명 한 명이 역량을 갖춘 연구자로 자라서 한의계와 나아가 기초의학계에 기여할 수 있는 잠재력을 생각한다면 우리 한의계 내부에서도, 또한 국가적으로도 인력 양성책을 마련하기 위한 노력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나 역시 이제는 시니어 연구자로서 보다 책임감을 가지고 어떠한 노력을 할 수 있을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많이 본 뉴스
- 1 보험사만을 위한 ‘향후치료비 박탈’ 개악 즉각 철회!!
- 2 “막막하다는 한약 처방, 길을 제시하고 싶었다”
- 3 성남시한의사회, 이종한 신임 회장 선출
- 4 “환자의 고통 외면할 수 없어, 담적증후군 코드 등재 결심”
- 5 2026년도 제81회 한의사 국가시험 합격률 96.3%
- 6 ‘천차만별’ 4세대 실손 비급여 차등제…보험사 별 할인액 ‘최대 5배’ 격차
- 7 한의약 기반 ‘성장재생 제제’, 줄기세포 보호 입증…“재생의학의 새 가능성”
- 8 [칼럼] 부산극장의 함성, ‘한의사’라는 이름을 쟁취한 기록
- 9 ‘PDRN-PL 미소 재생 약침’ 특허 등록…“한의 재생치료의 새 지평”
- 10 ‘침구사’부활? 이미 침·구 전문가인 3만 한의사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