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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2월 13일 (금)

제주 최대 무장 항일운동 ‘법정사’ 의거의 주인공…정구용 한의사

제주 최대 무장 항일운동 ‘법정사’ 의거의 주인공…정구용 한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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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용 한의사

 

정구용(鄭九鎔·1880.10.5.~1941.5.5./의생번호 2005번/이명 구룡(龜龍)) 한의사는 경상북도 영일군에서 태어나 1918년 무오년 10월 7일, 무오 법정사(戊午 法井寺) 항일 운동의 간부로서 활약했다. 

법정사 의거는 불교계가 중심이 되어 보천교와 함께 일으킨 제주 최초, 최대의 무장 항일운동으로 1919년 3.1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선생은 영일군에서 1913년 방동화, 김연일 등과 함께 제주도로 건너갔다.

당시 김연일의 경우 보천교 교주 차경석과 함께 무장투쟁, 국권회복을 함께 모의했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주도 도민들과 종교 신도들을 설득해나갔다.

정구용은 제주 중문면 법정사에서 주지스님 김연일과 함께 일본의 침략에 분노하면서 ‘반일 반외세’를 기치로 삼는 항일 비밀 결사를 1918년 봄에 결성했다. 이 비밀 결사는 강창규, 방동화 등의 승려를 중심으로 한 조직을 확대한 것이었다. 이해 10월에 이르러서는 30여 명의 동지들을 규합할 수 있었다. 


중문 경찰관 주재소 방화 및 13명의 구금자 석방


1918년 10월 7일 거사가 진행됐다. 10월 5일과 6일은 법정사에서 정기적으로 예불하는 날이어서 이날 모인 사람들과 법정사 승려들은 7일 새벽에 출정식을 갖고 법정사를 내려가 도순리로 향했다. 

김연일 주지,  정구용, 방동화,  강민수,  김인수,  김용충,  장림호,  김상언,  최태유 스님과 행자 김윤옥 등 승려 13인을 비롯한 거사의 주역들은 법정사를 출발할 때 제주도 내에서 일본 관리들을 쫓아내 원래의 조선, 대한제국으로 회복하려 한다는 거사의 목적을 다시한번 강조했다. 

법정사 예불에 참석하였던 34명의 선봉대는 미리 준비해 둔 깃발과 화승총, 곤봉 등을 가지고 서귀포를 향해 나아갔다. 법정사를 출발한 군중은 도순리 위쪽의 상동, 이어서 영남리와 서호리, 호근리로 나아갔다. 선봉대는 마을에서 격문을 배포하고 구장에게 민적부를 제출받아 장정을 모집하는 데 앞장섰다.

서귀포시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 인근 마을에서 동조하여 참여한 주민의 수가 700여 명이 됐다. 중문리에 도착한 선봉대장 강창규와 김상언은 중문 경찰관 주재소의 물건들을 몽둥이로 부수었고, 참여자들은 이를 따라서 기구와 문서 등을 불태웠다. 

강창규는 지붕의 짚을 뽑아 성냥으로 불을 붙여 중문 경찰관 주재소 건물에 불을 붙였다. 정구용은 중문 주재소에 감금됐던 13명의 구금자를 석방하고 식민수탈에 동조했던 악덕 일본 상인들을 공격했다. 일부는 주재소에서 탈취한 무기로 무장까지 했다.

그러나 오전 11시경 서귀포 경찰관 주재소 기마 순사대가 총으로 무장하고 공격해 오자 참여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핵심 간부들도 간신히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참여자 중 66명이 검거되고 법정사는 불태워졌다. 

법정사 항일 운동의 핵심 간부들 검거 실패는 전국적인 체포령, 검거령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때 법정사 항일 운동을 도운 보천교인들의 피해가 컸다. 제주에서 목포까지 검거가 퍼질 때 보천교 교주 차경석의 동생 차윤칠 등 보천교 교인들이 대거 체포됐다.


포항 보경사  ‘3·1 독립의거기념비’에 이름 새겨있어


조선 총독부 재판소 형사 사건부 및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법정사 항일항쟁은 총 검거 인원 66명 중 48명이 소요 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됐다. 재판 결과는 징역형이 31명,  재판 전 옥사 2명, 벌금형 15명과 불기소 처분 18명이었다. 

항일투쟁 핵심주체들 중 일부는 오랜 기간 체포를 피했는데, 김연일은 1920년 3월, 강창규는 1922년 12월 27일,  정구용은 1923년 2월 13일에야 체포됐다. 

연령대별로는 40대가 17명으로 가장 많았다. 뒤이어 30대 15명, 20대 14명 순으로 20~40대의 청년들이 중심이었다. 이들에게 재판은 단 한차례만 열렸고, 66명이 검거된 참여자들 중 일부 옥사자가 발생했으며, 31명이 최고 10년에서 최하 6개월에 이르는 징역형을 언도받는 등 형량에서 보더라도 운동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1919년 2월4일 일제는 정구용을 체포하지 못하자 피의자가 없는 상태에서 열리는 재판 ‘궐석재판’을 열어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3년을 구형했다. 1923년 정구용이 체포되자마자 목포 감옥에 수감된 사유다. 

출옥 후 경상북도 포항 소재 보경사를 근거지로 활동했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이유는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보경사 일주문 앞에 ‘기미 3·1 독립의거기념비’가 있고 이 비문에 정구용의 이름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제주 법정사 항쟁 이후 정구용의 경상북도 지역에서의 행적을 알 수 있는 마지막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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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정구용 한의사에 대한 판결문

 

 

출옥 후에도 사찰을 근거지로 승려들과 독립운동


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과 전체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정구용 판결문’ ‘강창규 가출옥 관계 서류’ ‘폭도사 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 등이 있다. 신문자료로는 당시 ‘매일신보’의 기사 3꼭지도 있다. 이들 자료를 시기적으로 비교 검토하면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일제의 시각과 의도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참여자 규모에 대한 왜곡이다. ‘매일신보’는 1920년, 1923년, 1938년에 걸쳐 총 3번 제주 법정사 항일운동을 보도했다. 최초 보도였던 1920년 기사에는 총 700여명이 이 사건에 참여했다고 보도했지만, 1923년 기사에는 총 400여명, 1938년에는 약 300명이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일제에 체포되어 복역했지만 출옥 후에도 지속해서 사찰을 근거지로 삼아 승려들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정구용의 손녀로 알려진 묘혜 스님(대구 향림사 주지)에 따르면 정구용의 형, 정상용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스님이란 신분이 독립운동을 하는데 도움이 됐다고 전했다. 

유족들은 정구용이 백범 김구의 여러 자금 조달책 중 한 명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김구와 부모님이 함께 찍은 사진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구용은 1941년 포항읍 자택에서 61세로 입적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200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정상규 작가는 지난 6년간 역사에 가려지고 숨겨진 위인들을 발굴하여 다양한 역사 콘텐츠로 알려왔다. 최근까지 51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그들의 보건 및 복지문제를 도왔으며, 오랜 시간 미 서훈(나라를 위하여 세운 공로의 등급에 따라 훈장을 받지 못한)된 유공자를 돕는 일을 맡아왔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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