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방화장품의 의료문화사
현대적 한방화장품의 효시 朴家紛
기록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고조선시대부터 이미 화장을 하였다. 낙랑시대의 고분에 여인들이 눈썹화장을 한 그림이 있는 것을 보면 화장의 기원이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고분벽화에 나오는 여인의 그림에서도 눈썹과 뺨에 화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粉白粉과 脂를 판매한 방문 판매원인 賣粉 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며, 이것은 이미 화장품에 대한 사회적 수요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사용된 粉白粉은 얼굴을 하얗게 보이게 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제조하여 판매하였다. 명성황후도 眞珠粉을 화장품으로 많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시장에는 육의전 가운데 황화전(黃貨廛)에서 粉을 중심으로 한 화장품을 많이 판매하였다.
개항과 함께 서양식 화장품이 화장에 대한 개방적 인식과 함께 물밀듯이 들어왔다. 그동안 화장품이 화류계 여성들을 중심으로 사용되어왔지만, 풍속까지 바뀌어 일반 여염집 여성들과 여학생들까지 화장품을 사용하게 되었다. 개화기에 대한 책을 쓴 비숍 여의 증언에 따르면 구한말 시기에 한국의 보통 여인들은 이미 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개화와 함께 위생국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어 화장품을 관장하는 기구가 정식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화장품이 국가 체계 안에서 관리될 수 있게 되었다.
朴家紛이라는 최초의 현대적 화장품이 탄생하게 된 것은 1916년 한일합방 이후이다. 朴家紛은 두산그룹 회장 박용만의 할아버지인 朴承稷이 처음 개발한 것이다. 朴承稷은 본래 共益社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하고 포목점을 운용하고 있었던 유명한 실업가였다.
朴家紛을 만들게 된 데에는 박승직의 부인의 공이 크다. 박승직의 부인 정정숙이 1916년 어느날 입정동 상나무골 박씨 할머니댁을 들렀다가 분가루를 포장하고 있는 여인들을 목격하고 아이디어를 얻어 분가루를 만들어 포장판매를 시도한 것이다. 부인 정정숙은 남편 박승직에게 화장품을 만들 것을 건의하게 되었고, 이것이 상품화되어 널리 판매하게 된다.
판매량이 많아지면서 정식으로 상품으로서 포장지가 인쇄되게 되었다. 그리고 방물장사들을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당국에 상표가 등록되게 된 것은 1920년이다. 총독부식산국에 등록번호 1번으로 ‘朴’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된 것이다. 朴家紛이 나와서 히트를 치게 됨에 따라 徐家張粉 등과 같은 경쟁품이 등장하게 되어 화장품 시장의 열기가 뜨거워져 갔다. 그럼에도 아직 朴家紛의 경쟁이 되지는 못하였다. 朴家紛의 당시 가격은 50전이었고 한달 판매고는 1만 상자였다고 한다.
1922년 11월24일자 동아일보에는 朴家紛을 선전하는 광고가 게재되어 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쓰여 있다.
“박가분을 항상 바르시면 죽은깨와 여드름이 없어지오. 얼굴에 잡티가 없어지고 매우 고와집니다.”, “박가분은 경향각지 내외국인 신용있는 포목점과 잡화상점에서 판매하옵니다.”(이상 저자 임의대로 현대어로 바꿈)
이렇듯 인기를 끌던 朴家紛도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 원료 가운데 일부인 납의 중독에 대한 여론으로 인하여 퇴조하게 되고 1937년에는 여론에 굴복하여 스스로 문을 닫게 된다.
그럼에도 朴家紛이 남긴 화장품에 대한 업적은 지대하다. 박승직은 전통 화장품에서부터 출발하여 최초의 현대적 화장품을 만들어내어 한방화장품의 시작을 열었기 때문이다.
◇1922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박가분의 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