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趙膏藥”
韓醫師家門에서 나온 家傳膏藥
1936년 12월1일자 『三千里』에는 “最近 賣藥戰, 누구누구가 돈 모앗나?”라는 제하에 賣藥을 둘러싼 제약회사간의 경쟁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기사 가운데 소제목으로 “天一藥房의 「趙膏藥」”이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아래와 같이 기사화하고 있다.
“全朝鮮뿐 아니라 海內海外에 널리 그 명성이 선전되고 또 애용되여 이미 그 聲價는 정평(近代는 좀 質이 저하되었다는 世評도 있지만)이 있는 것인데 이것은 원래 趙寅燮(同약방주인) 씨의 선대부터 전래되는 비방으로 종기약으로는 神效가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매일 4, 5백포의 판매고가 있어 매월 수만포의 총액을 보게 되며 全鮮 각지에 同藥을 팔지 않는 약방이 없어 그야말로 朝鮮매약의 靈神丸과 天一藥房의 趙膏藥은 쌍벽으로 간주하는 터이다.
그래서 兩會社에서는 이 판매로 인하야 거의 全幅의 기염을 토하는 감이 있는 바이며 同社의 큰 재원이 되는 바라고 볼 수 있게 된다. 朝鮮賣藥에는 趙鍾國 씨가 專務로 모든 것을 지배하고 天一에는 趙寅燮 씨가 그 主腦이다.”
天一藥房의 趙膏藥은 1936년 당시 최고의 膏藥으로 이름이 나있어 장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위의 글에 언급되고 있는 天一藥房은 1913년에 상호를 걸면서 趙膏藥이라는 약을 조제하여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창립인은 趙根昶으로서 한의사이다. 1914년 10월2일에 나온 『조선총독부관보』에 의생면허를 취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이 이전부터 한의사로 활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의사 趙根昶의 아버지인 趙 亨은 청계천 근처에서 서당을 하면서 학문 연구를 한 선비로서 전대로부터 내려온 家傳膏藥을 아들에게 전수하였고 이것이 손자 趙寅燮에게까지 이어지게 된 것이다. 삼대에 걸쳐 膏藥의 맥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손자 趙寅燮은 1910년에 휘문고교를 1회로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견문을 넓힌 후에 돌아와서 한약의 무역을 시작하고 아버지의 제약회사를 물려받아 賣藥事業에 뛰어들었다.
1938년 1월1일 나온 『삼천리』잡지에는 “半島醫藥界大觀” 다음과 같이 趙膏藥의 판매규모를 묘사하고 있다.
“현재 天一藥房에는 貿易部, 漢藥乾材部, 賣藥部, 洋藥都賣部까지 있는데 洋藥都賣部에서는 京城시내는 물론이요 각 지방에 산재한 병원의 주문에 응하여 꾸준하게 배급하는 상태이다. 그리고 각부에는 都長이 있어 각기 부서를 담임하고 각자 共히 맹렬한 활동을 하는 중인데 총자본금은 100만원가량이요, 본점 외에 黃金町, 大邱, 平壤, 光州에는 큰 지점이 있고 50여개소의 대리점과 1400여개소의 특약점이 있으며 趙膏藥을 소매하는 곳은 약 1만여 곳이나 된다고 하니 매년 판매고가 얼마나 굉장한 수자를 돌파할 것인가? 이것이 엇지 一朝一夕에 완성된 업적이라 할 것이냐. 본지점을 통하여 晝夜不拘하고 밧부게 일하는 180여명의 종업원이 있다고 하니 상호도 天一이지만 藥業으로도 朝鮮천하에 하나이라고 하겟다.
또 한가지는 업무를 더욱 확장하고 내용을 更一層 충실케 하기 위하여 昭和 12년 8월에 公稱 資金 50만원의 天一제약주식회사를 창립하고 製造賣藥部와 新藥部를 특설한 후 대대적으로 활동을 하는 중인데 주식회사 사장에 趙根昶氏, 전무에 趙寅燮氏, 상무에 金泰鍊氏, 감사에는 天一藥房 賣藥部 주임이며 一切 선전에 관한 전권을 가지고 잇는 朴永德氏다.”
1930년대 중반 식민지 조선은 金鑛熱과 賣藥戰이라는 두가지에 열광하고 있었다. 天一藥房의 趙膏藥뿐 아니라 朝鮮賣藥의 靈神丸, 柳韓洋行의 「톤토닉」, 慈善堂의 「蔘茸토닉」, 朝鮮商會의 「蔘茸精」, 金剛製藥의 「페찌날」, 釜山 魚乙彬의 「萬病水」 등이 이러한 賣藥戰의 戰士로서 장안의 관심을 끌었다.
◇일제시대부터 인기를 끌었던 조고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