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성의 차이가 의학의 차이를 만든다”
李殷八의 韓·中·日 醫學比較論
1965년 李殷八(1912~1967)은 『醫窓論攷』라는 저술을 간행하면서 自序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古方은 日本에서 生成發展되어 온 醫學이다. 그럼으로 그들의 國民性 그대로 싹싹하면서도 날카로운 맛이 있다. 이를 運用할 때는 마치 戰場에서 短兵接戰으로 戰勢를 決定짓는 것과 같은 直截性이 있다.
이에 反하여 中國에서 起源한 後世方醫學에는 大陸的인 鈍重性과 攸長性이 엿보인다. 마치 戰場에 있어서 敵을 앞에 두고 陣勢를 버리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이를 包圍하여 殲滅하려 하는 그러한 戰法이다.
도리켜 韓國이 創案한 四象醫學을 생각할 때 이 또한 우리 民族性이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看過할 수는 없다. 즉 나는 四象醫學에서 우리의 先祖들의 外敵과 抗戰하던 그 悲壯한 場面을 想起하게 되는 것이다.
楊萬春 將軍의 安市城싸움, 乙支文德 將軍의 薩水大捷, 姜邯贊 將軍의 對契丹戰, 李忠武公의 水軍 등 모든 싸움이 寡로써 衆을 對敵한 戰法이었다. 물론 우리에게도 奸譎한 金春秋, 金庾信輩의 唐兵誘引으로 因한 民族相殘이나 元軍에 의하여, 日本에 의하여, 淸軍에 의하여 三千里江山이 焦土로 化한 일은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恥辱들은 그 때의 爲政者들의 愚庸이 智謀있는 將軍들의 才略을 發揮하지 못하도록 抑壓하였거나 그렇지 않은데서 原因한 것이고 우리나라의 戰法은 언제나 以弱制强하고 以柔制强하는 戰法이었다. 卽 우리들의 先祖들의 戰法은 미리 知彼知己하여 敵의 虛實을 較計하고 이쪽의 戰力을 審察한 후에 그 實한 바를 避하고 그 虛한 바를 찔러서 敵으로 하여금 再起의 餘地가 없도록 完打하는 奇襲作戰이 그 本領이었다.”
이 글을 쓴 李殷八은 4대째 한의사로 가업을 이어온 醫家의 名文家 出身이다. 그의 딸도 한의사가 된 점을 생각해보면 그의 집안은 5대로 한의사를 이어간 점에서 현대 한의학의 역사상 보기 드문 世醫이다. 경기도 수원시에서 의화한의원을 운영하였던 李殷八은 古方을 연구하는 한의사들 모임인 大韓漢方醫學會를 1962년 창립하여 朴盛洙, 廉泰煥 등과 함께 활동을 하였다.
1965년 저술한 『醫窓論攷』의 서문을 통해 위와 같은 韓·中·日의 醫學을 비교한 것은 李殷八 개인의 이력과 당시 한의계의 상황과 연계시켜볼 때 큰 의미가 있다.
첫째, 일본의학을 고방의학, 중국의학을 후세방의학, 한국의학을 사상의학으로 비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도식이 과연 정확한가는 醫學史를 보는 관점에 따라 개인차가 있겠지만 그가 古方醫學의 연구자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것은 다분히 古方中心의 분류법이다.
둘째, 이러한 의학적 차이가 국민성으로부터 기인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 군사적인 용어를 쓰고 있다. 日本醫學에 대해 “싹싹하면서도 날카로운 맛”, “마치 戰場에서 短兵接戰으로 戰勢를 決定짓는 것과 같은 直截性”이라는 것을 古方醫學의 정확성에 빗대어 설하고 있고, 中國醫學에 대해서는 “大陸的인 鈍重性과 攸長性”, “敵을 앞에 두고 陣勢를 버리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이를 包圍하여 殲滅하려 하는 그러한 戰法”이라는 것은 금원사대가 이후 구성된 黃帝內經中心의 의학체계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韓國醫學에 대해서는 “以弱制强”, “以柔制强”, “知彼知己” 등으로 말하고 있다.
셋째, 1965년에 이러한 비교론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해 3월에 그동안 한의계의 골칫거리였던 유일한 한의과대학인 동양의학대학의 문제가 일단락되었다. 경희대학교가 동양의학대학의 합병을 결정한 것이다. 李殷八이 이 책을 간행한 것이 같은해 8월이었음을 상기할 때 李殷八에게도 이 사건은 한의계의 커다란 경사로 느끼게 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학문의 변방으로 인식되었던 한국의 한의학은 이 시기에 중국·일본과 견주어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1965년 간행된 ‘의창논고’에서 이은팔은 한·중·일 전통의학을 비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