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한방의학론
1952년 부산 피난시절 裵元植의 고뇌와 희망
“한방의학은 高度로 發達된 科學的 醫學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非科學的 醫學이라고 非難을 받은 이유는 첫째, 體系있는 敎材와 敎育機關이 없는 것, 둘째, 倭政 40年 동안의 한방의학 소멸정책에 起因함이오, 셋째, 한방의학의 擁護育成法令이 없다는 것을 指摘할 수 있다.
解放 後 中央을 爲始하야 한방의학전문학원정도의 敎育機關이 2, 3개소 設置되었으나 역시 별로 성과없이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다.
過般國會에서 國民醫療法令 中 한방의학에 대한 醫療令이 絶對多數表로 通過되었음은 甚히 기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은 바로 한방의학이 우리 民族保健에 적합한 醫學이오, 없어서는 아니된다 證左인 것이다. 또 한방치료를 信仰的으로 信賴하고 全國民의 八割 以上이 한방치료에 依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다음 그 반면에 한방의로서는 한방의학의 眞髓를 硏究하여야 할 것이요, 皮相的으로 한방의학을 修習하여서는 안된다는 무거운 責任感을 느껴야 하며 또한 八割을 占有하는 國民의 保健을 맡어 있다는 사실을 自覺하여야 될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한방의학을 先導發達시킴이 긴요한 課題일 것이요, 그러함에는 제일 먼저 한방의학의 교재와 교육기관이 선결문제일 것이다.”
위의 글은 1952년 12월10일 裵元植(1914~2006)이 자신의 저술 『新漢方醫學總論』을 탈고하면서 쓴 自序의 일부분이다.
1951년 9월25일 부산 피난시절 국민의료법이 공포된다. 이 새로운 국민의료법이 이전의 법률과 다른 점은 한의사제도를 명문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30대 후반의 裵元植은 부산에 피난온 상태에서 한의계의 역량을 모아서 이루어낸 한의사제도의 성공적 쟁취에 감격하면서 다음 단계의 후속 조치를 모색하게 되었다. 한의사제도가 만들어진 상황에서 그에 걸맞는 발전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한국에서 한의학은 80%의 국민이 의존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주류의학이었다. 그럼에도 체계적인 발전전략이 없었기에 답보상태를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답보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 한의학을 체계적으로 교육할 교재와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裵元植은 체계적인 한의학 교육의 모범적 교과서라고 할 서적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당시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1952년 『新漢方醫學總論』이라는 책을 탈고하고 이듬해에 출간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의 의의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從來의 敎材로서는 수많은 醫書 中 傷寒, 金괴 二書가 主宰가 되어 있으나 純漢文과 어려운 述語로 編纂되어 修習키 困難할 것을 느끼고 이 方面에 뜻을 두는 同志들에게 敎材로서는 너무 貧弱하지만 漢方醫學을 習得하는데 參考書라도 되게 하려는 不任의 責任感에서 新漢方醫學總論을 出刊하는 바이니 여러 先輩大家의 叱正을 바라마지 않는다.”
한의사 姜信武가 기증하여 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에 보관되어 있는 『新漢方醫學總論』은 病因編, 診斷編, 治療編, 漢洋病名對照編의 4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病因編은 病의 部位(表, 裏, 半表半裏, 內外), 病情(陰陽, 陰陽說, 虛實, 陽實陽虛, 陰實陰虛), 證(證의 名稱, 主證客證, 正證異證, 表證本證, 壞證), 瘀血, 水毒, 食毒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診斷編은 望診法, 聞診法, 問診法, 切診法으로 구성되어 있다. 治療編은 治療法則(治療四則, 寒者熱之, 熱者寒之之法), 禁忌(發汗法의 禁忌, 下法의 禁忌, 吐法의 禁忌)로 구성되어 있다. 漢洋病名對照一覽表는 각종 질환을 분류하여 동서양의학의 병명을 대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裵元植은 이 책을 일회로 그치지 않고 후속편을 이어서 3회까지 기획하고 있으므로 이 책은 총론임을 自序에서 밝히고 있다. 이 책은 아마도 한의사제도가 만들어진 이후 최초로 나온 한의학교육용 교재가 아닌가 한다.
◇배원식이 1953년 부산 피난시절에 간행한 ‘신한방의학총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