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의학의 발전과 미래전망 上
10년 후의 한의학?
한의학-억압과 성취의 역사
지난 100년간 한의학과 한의사의 발전과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억압’에서 ‘성취’로 극적 전환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식민화와 함께 시작된 한의학의 지위 격하와 정치적 억압으로 한의학은 거의 몰락의 지경까지 갔다가 광복 이후 극적으로 시술자의 합법적 지위를 회복한다.
그러나 법적 지위만 확보했을 뿐 정치적 지원을 얻지 못한 한의학은 60년대까지 거의 정체상태에 머물게 된다. 70년대 이후 경제 성장의 덕분으로 국민생활에 여유가 생겼고 이를 바탕으로 한방의료에 대한 시장이 커지면서 한의학은 다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한의학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이용 증가에 기인하여 한의학은 안정적 성장을 지속하게 되었고 보다 우수한 인력이 한의사로 충원되어 발전을 가속화시키게 된다.
한의학 발전의 결정적 계기는 1993년에 있었던 약사와의 조제권 분쟁이다. 성원의 숫자나 동원할 수 있는 자원 및 정치적 영향력 측면에서 볼 때 약사가 우위에 있었지만 한의사들은 결속하여 대응하면서 결국 정치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한의사들은 국가로부터 실질적으로 그 존재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후 한의계는 정부로부터 연구 지원도 받을 수 있었고, 국립 한방병원이나 국립 한의대도 설치되었으며, 군의관으로 진출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제 한의학은 외형적으로 전문의료인의 반열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한약조제권 분쟁에서의 승리는 한의사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안겨주게 된다. 분쟁 당시 한의사들은 자신들의 싸움을 정부-의사-약사를 상대로 한 싸움으로 인식하였다. 즉 외형적으로는 약사들과의 분쟁이었지만 내용상으로는 한의학의 존재를 사실상 부정해온 정부나 의사들과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분쟁 이후 싸움의 중요한 상대였던 국가(정부)가 한의사들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서 한의사들은 수십년간 유지해온 발전의 목표를 다시 세워야 했다. 당시까지 한의사들은 한의학의 정통성을 수호하고 국가와 사회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당위적인 목표였다. 그런데 일단 정부가 이점을 수용하게 되면서부터 발전의 지향점은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여기서 한의사들이 취한 전략은 대체로 ‘과학화’로 모아진 것으로 보인다. 한약조제권 분쟁이 발생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과학화였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약사들은 자신들의 발전된 약학지식과 방법을 사용하여 한약에 대한 분석과 과학화를 진척시킬 수 있고 보다 과학적 근거를 갖춘 한약을 고객들에게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한약조제권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의사들은 한의학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한약을 제대로 처방조제할 수 없다고 대응하였다. 한의사들의 논리는 임상시술자로서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고 그 결과에 따라 성분을 가감조절하는 것은 한의사들의 고유권한이며 그러한 지식을 갖추지 못한 약사들이 한약을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볼 때 일반국민이나 사회여론이 한의사들이 홀대를 받았다는 점에 동의하였기 때문에 한의사들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일반국민들이 한의학의 과학화에 대하여 그 세세한 내용을 이해하고 약사들의 주장보다 한의사들의 주장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여 손을 들어준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과학화의 방법론에 대한 각자의 주장은 일반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전문적인 내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약조제권 분쟁은 종료되었지만 한의학의 과학화에 대한 논쟁은 뚜렷한 승패를 가리지 못하고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다. 즉 한의사들은 정치적으로는 승리하였지만 과학적으로 승리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가 의사와 한의사를 모두 공인하는 상황이 되면서 한의사들은 ‘실력으로서’ 의사들과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분쟁 이전까지는 국가나 의사가 한의학을 죽이려 한다는 논리 하에 교류나 협력을 거부함으로써 한의학의 존재를 보존시킬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러한 ‘정치적 보호막’이 사라지게 되면서 한의학의 임상적 효과를 내보이고 인정받는 것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달리 표현하자면 한의학이 보다 높은 수준의 제도화를 달성해야 하는 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한의학이 사회제도로서 공인받게 되면서 그에 걸맞은 투명성이나 합리성, 과학성을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좋든 싫든 한의사들은 한의학의 과학화라는 과제를 지게 되었고 향후 한의학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에 대한 전망도 결국 이와 관련된 여러 세부적 문제들로 구성될 수밖에 없다.
한의학의 성장전략과 과제
한의학의 제도화는 단순히 과학화를 통한 한약의 과학적 효능을 입증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의사들의 생의학(biomedicine) 못지않게 한의학의 산업적 가치를 높이는 과제도 함께 맞물려 있다. 이렇게 되면 한의학은 예전처럼 작은 한의원에서 초근목피로 질병 치료를 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거대한 의료산업으로 진입하는 것이 된다. 한의학이 이렇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한의사들 스스로 한의학과 한의사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을 새롭게 창출해야만 한다. 한의학의 속성을 ‘과학적 한의학’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한의사의 역할도 임상시술자이면서 동시에 연구자이고 교육자이며, 과학문화 담론의 선도자로서의 역할 인식도 필요하게 된다. 이 세 과제를 도식화하면 다음 그림과 같다.
즉 현 단계에서 한의사들에게 필요한 성장전략은 과학화-전문화, 산업화-시장화, 정체성 정립(identity building)의 세 축으로 구성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가지 축은 서로 조합하면서 한의사들의 당면과제에 대응하게 만든다. 첫째, 과학화와 정체성 확립을 통하여 한의사들은 전문의료인으로서 자리매김을 하게 되고 의사와 같은 지위를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의사와의 경쟁에서 더 이상 한의학의 특수성을 강조하거나 민족문화적 속성을 강조하는 것으로는 전통한의학을 수호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보편적 의학으로 그 차원을 높이기는 어렵다.
서구사회에서도 대체의학과 생의학의 갈등 속에서 대체의학은 생의학이 만들어 놓은 제도화의 틀을 받아들이고 의사가 설정한 의학의 표준에 맞추어 대체의학의 내용과 시술방식을 제도화해 나가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체의학 본래의 특성을 상실한다는 내부적 비판도 제기되지만 주류의 대체의학 지도자들은 기존의 제도화의 틀을 수용하고 사회적 인정을 획득하는 길을 선택하고 있다.
둘째, 한의학의 과학화 및 한방의료의 산업화를 통하여 한방서비스의 생산기반을 획기적으로 확대할 수 있게 된다. 산업화란 상품과 서비스의 기술적 표준을 정하고 생산공정을 기계화하여 대량의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게 함으로써 부가가치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과정이다. 한약은 그동안 성분과 약제의 효능 및 처방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공장식 생산이 어려웠다.
더불어 약으로서 필요한 부작용 및 독성의 종류나 한계 등에 대하여도 분명하게 규정되지 못했다. 의약품은 물론 식품이나 기타 서비스 등에도 표준 설정이 보편화되는 현실에서 한의학이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신비의 명약’이 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대중적인 의약품으로 인정받기는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따라서 과학화를 통하여 표준 설정의 근거를 제공하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화를 추진하는 것은 거의 필연적인 발전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셋째, 한방의료의 산업화 및 한의학에 대한 새로운 가치정립을 통하여 한방의 미래지향적 발전전략을 수립할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자원을 발굴 또는 획득할 수 있게 된다. 한의학이 발전하려면 한의학적 담론이 문화코드로서 시대에 부합되어야 한다. 소득 2만불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의식이나 생활방식도 점차 경쟁의 고도화나 문화적 다양성을 지향하는 쪽으로 변화하였다. 여기서 한의학의 성격도 민족주의나 민족문화라는 담론이 더 이상 지지를 받기 어려워졌다. 그런데 다문화시대 한의학은 그에 걸맞은 문화담론이 무엇인지 명확하지 못한 실정이다. 예를 들어 연전에 의학드라마 ‘New Heart’가 상당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킨 적이 있다.
물론 한의계에도 10여년 전에 ‘허준’이란 드라마가 히트한 적이 있다. 그런데 허준의 열성과 의료인으로서의 자세 같은 것은 지금도 본받을 만한 것이지만 조선시대와는 상이한 건강문제를 갖고 있고 건강에 대한 인식도 다른 요즈음의 신세대들에게 New Heart가 아닌 허준이 어필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하다. 건강문제에 대한 담론이란 건강문제에 효과적인 의학지식뿐만 아니라 그 문제를 설명하는 방식, 치료 기법, 진료실의 공간 구성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신세대에게 의미가 통하는(making sense) 한의학 담론이 되려면 어떤 모습의 한의학과 한방의료가 되어야 하는지 개념화하고 설계하는 작업이 필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