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노현 민의련의 역사와 활동 강연
나가노 중앙 케어센터 견학 및 체험
어린이 빈곤 워크숍과 연수 되돌아보기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 연수 참가기
황아현 학생(경희대 한의과대학)
Ⅰ. 서론
— 안다고 할 수 있었으면 세상이 진즉 좋아졌겠지
7월 22일부터 25일까지 일본의 나가노현 의료현장에 다녀왔다. 감사하게도 참의료실천청년한의사회의 지원을 받아 한국사회적의료기관연합회에서 주관하는 연수의 기회를 얻었다.
이전에도 청년한의사회에서 여러 지원과 강의를 통해 배운 바 있어, 나는 나름대로 사회적 의료현장에 대해 알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사의련 민의련 청한에게 모두 죄송한 생각이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일본의 의료체계를 배우고 참관하는 일정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공공의료를 이전부터 아예 몰랐다고 한다면 새빨간 거짓말이다. 모르진 않는데, 안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실제로 해 본 적도, 진로를 그쪽으로 잡은 적도, 내가 사회적 의료, 민주의료, 참의료, 이렇게 불리는 의료를 할 자신이 정말로 없었기 때문에.
나는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본과 3학년이다. 공공의료와 일차의료 현장에 관심이 있지만, 관심이 있다고 대놓고 이야기할 만큼 용기 있거나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공공의료에 대한 지식은 쌓아두었으나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안다고 할 수 있었으면 세상이 진즉 좋아졌겠지. 내가 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서 막혔다.
그동안 학교에서 의료를 주로 질병의 진단과 치료, 환자 개인에 대한 의료서비스라는 관점에서 배워 온 것도 클 것이다(학교라는 시스템에 유감은 없다. 진단과 치료를 알아야 먼저 의료를 실천할 수 있고, 교수님들은 최선을 다해 우리를 의료인으로 만들어주신다). 다만 허덕이며 강의를 따라가는 내게, ‘좋은 의료’ 혹은 ‘이상적인 의료’와 내가 할 의료는 자각도 없이 완전히 분리돼버렸다.
알아. 그런데 세상만사가 안다고 해결되진 않잖아. 누가 어떻게 뭘 희생해서 해낼 건데? 정답 없는 질문에 답하자면, 일단 그걸 할 사람이 나는 아닌 것 같았다.
미리 답을 밝혀둔다면, 나가노현에서 나는 드라마틱한 해답을 찾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순히 일본의 의료체계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 현장을 통해 내가 가지고 있던 의료에 대한 생각을 돌아보는 연수였다고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이번 연수에서 특히 기억에 남았던 경험은 ① 나가노현 민의련의 역사와 활동에 대한 강연, ② 나가노 중앙 케어센터 견학 및 체험, ③ 어린이 빈곤 워크숍과 연수 되돌아보기였다. 각각의 경험은 사회적 의료와 참의료, 그리고 예비의료인으로서의 나에 대하여 다시 세우는 버팀목이 되었다.
Ⅱ. 본론
1. <나가노현 민의련의 역사와 활동, 소중히 여기는 것>
—사회적 의료는 특별한 사람들의 선택이 아니다
우리를 처음 반겨주신 마쓰모토 협립병원의 사노 다쓰오 회장님. 비행을 마친 열두 명의 의료계열 학생들에게 사노 다쓰오 회장님께서는 <나가노현 민의련의 역사와 활동,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해 강연해주셨다. 민의련의 역사와 활동, 민의련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주신 시간이었다.
민의련은 의료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시작이다. 전전 무산자 진료소 운동, 전후 민주진료소 활동을 이어가서 1953년 결성되었다. 민의련이 지향하는 의료는 질병만 보는 것이 아니라, 질병 + 생활환경 + 노동환경+ 경제적 상황을 모두 바라보는 것인데, ‘무차별/평등의 의료’에 대해 무척 강조하셨다. 반드시 모두가 지켜야 할, 의료의 원칙이라고.
동종업계에서는 민의련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낯선 원칙에 손을 들고 질문했다. 사노 다쓰오 회장님께서는 자신 있게 말씀하셨다.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도 일부 존재하지만, “민의련의 의료 원칙 자체는 의료인이라면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가치입니다.”
큰 울림을 느꼈다. 의료인의 역할을 고민하던 차였다. 의료인으로서 나는 당연히 진단과 치료를 제공하게 되겠으나, ‘사회적 의료’가 정말로 의료인의 역할인지. 그냥 의료만 하는 것도 힘들 것 같은데. 나는 내가 사회적 의료를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예방의학과 의료인문학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나는 내 삐딱한 고민의 정체가 냉소와 회의였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당연한 원칙인데. 현실 운운하면서 포기하기에 나는 아직 학생인걸.
사회적 의료는 특별한 사람들의 선택이 아니다. 내가 당연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실천하기 어렵다고 여겼던 의료의 가치가,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의료의 원칙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는 앞으로 어떤 의료인이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던져보게 되었다.
2. 나가노 중앙 케어센터 견학
— ‘환자의 삶을 본다’는 모습
2일차. 나가노 중앙 케어센터의 여러 시설을 견학했다. 쓰루가노카제, 후루사토 등의 현장을 둘러보고 머신을 직접 체험했다. 특히 주요하게 설명해주셨고 와 닿았던 부분은 각 시설이 대상자의 생활과 기능 회복/유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하는지였다.
나가노 중앙케어센터의 쓰루가노카제에서는 개별성을 존중한 생활환경을, ‘그 사람의 방’을 신경쓴다. 개인 가구와 물건을 사용하고 들여올 수 있는 등 개인이 습관과 취향을 유지할 수 있게끔 규칙이 짜여졌다. 환자의 관리되는 삶 이상으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한 공간이었다. 노인보건시설 후루사토는 병원과 가정 사이의 중간시설로, 병원 치료 → 후루사토에서 재활·생활 적응 → 가정 복귀라는 수순을 밟는다. 최종 목표는 가정에 복귀하고 자립하는 것이다.
중앙케어센터에서는 화장실의 변기 위치와 기댈 수 있는 벽의 위치를 조정하고, 욕탕의 욕조를 올리고 내릴 수 있는 시설을 갖춘 등 굉장히 소소한 부분들을 신경 쓴 게 인상적이었다. 이 공간에서 실제로 생활할 사람에 대한 배려가 보기만 해도 느껴졌다.
단순히 시설을 보는 것보다 환자의 움직임과 일상생활을 지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시설이 환자 친화적이라는 점에 새삼스레 놀랐는데, 환자를 중심으로 두는 시설이 아주 제도화되어 잘 안착했다는 점에서 그랬었다. 이걸 하려면 병원 의료진과 운영자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고될 것 같은데… 하는 질문에, 어제의 말씀이 생각났다. 사회적 의료는 분명한 지향점이며, 의료인이라면 이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주 생각했다. 사회적 의료는 거대하고 비현실적인 것이다. 개인이 감당하기는 크다. 희생을 요구한다. 뛰어난 의료인이어야만 사회적 의료를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나에겐 좀… 어렵지 않을까. 내 역할 밖의 일이야. 결국 난 질환을 가진 환자를 마주해야 하는 의료인이 될 테니까.
그러니까, 나는 그동안 사회적 의료를 너무 거대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한 사람이 자신의 생활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돕는 것, 그 사람에게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는 것 역시 환자의 삶을 중심에 두는 의료의 한 형태였다. 그건 사람이 자신의 일상을 유지하도록 돕는 구체적인 실천이었고, 나가노 중앙케어센터와 후루사토에서 실제로 그런 실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환자를 ‘질환을 가진 사람’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정도는 나의 시선 변화니까, 조금씩 해볼 수 있을지도, 하고 작은 생각이 자라난다.
3. 어린이 빈곤 워크숍
— 빈곤 문제에 맞서는 것은, 재미있어
어린이 빈곤 워크숍에서는 켄와카이 병원 소아과 의사 와다 히로시 선생님의 강연을 들었다. 빈곤층 가족은 먼저 묻지 않으면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의료진이 작은 신호를 살피고 먼저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의료진은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상담과 자원 연계, 자기긍정감 향상, 고립 해소 등을 통해 아이를 돕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빈곤 자체를 줄이기 위해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특히 강연 마지막의 “빈곤 문제에 맞서는 것은 재미있어!”라는 말은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일을 단순한 희생이나 사명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빈곤이 건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개인의 건강을 그 사람의 생활환경과 사회적 조건 속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 자체는 새로운 지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워크숍을 통해 구체적인 상황을 놓고 함께 생각하고 토론하면서, 단순히 이러한 개념을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한 사람의 건강 문제를 그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바라보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는 있지, 그런데 실질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건 달라. 여기서 항상 멈춰왔다. 그런데 예시로 들어주신 쌀 비치하기, 좋은 옷 대여소 만들기, 이런 걸 들으니 소소한 부분에서의 행동이 얼마나 큰 효과를 가져오는지 실감했다. 내가 소소하게 신경쓰면 달라질 수 있구나.
환자의 건강을 바라볼 때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생활할까?”에서 멈추지 않고, “이 사람이 이렇게 생활할 수밖에 없는 환경은 무엇일까?”까지 질문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건 진료하고 치료할 때 내가 말 한두 마디만 덧붙여 말하는 걸로도 알 수 있다.
선생님. 빈곤 문제에 맞서는 게 정말 재밌기만 합니까? 반드시 짚고 넘어갈 점. 와다 선생님께서는 빈곤 문제에 맞서는 게 전혀 안 힘들다고 절대 말하지 않으셨다. 힘들다. 힘들긴 힘든데, 한 사람 한 가족의 삶이 바뀔 때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하셨다. 그걸 들으면서 나는 어차피 안 된다고, 어차피 못 할 거라고, 아무것도 안 바뀔 거라고 결론짓고 팔짱 끼고 보진 않기로 했다.
Ⅲ. 결론
— 천지개벽은 없지만 미래의 나 또는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자리에서 맡은 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 그것이 시스템적으로 안착하여 당연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현재. 그런 현장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한 기회이자 본과 3학년 시점에서 큰 울림이 되었다.
그렇다고 결론을 참 의료인으로서 천지개벽을 겪었다고, 사회적 의료에 완전히 헌신하도록 이 연수가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됐다! 라고 말하진 않겠다.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별로 현실적이지도 않고, 결정적으로 저렇게 말하고 나서 분명히 지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소속을 두고 활동하는 단체의 전체 이름은 “참의료실현” 청년한의사회라서, 나는 참의료실천을 위한 길을 항상 고민해왔다.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건 의외로 쉽다. 그런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 문제를 내가 나의 공간에서 해결하는 일이 제일로 어렵다.
문제를 느끼고, 항의하고, 사회를 바꾸는 일은, 무척 지친다.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이곳에 많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나는 많이 지쳐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가노에서의 4일 동안, 지치지 않고 언제나, 오래, 당연하게 평등한 의료를 해내는 사람들 하나하나에 감명을 받았다. 나가노현에서 만난 분들은 세 번째 단계, 나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구체적인 현장이었다.
물론 모든 일본의 의료기관이 이렇게 빈곤 계급, 노인, 아동, 이와 같은 취약 계급에게 친화적이지는 않을 것이며, 모든 한국의 의료기관이 나의 뿌리 깊은 삐딱함처럼 자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사회적 의료 실천이 “즐겁다” 라고 해 주신 와다 선생님 강연이 인상 깊다.
누가 어떻게 뭘 희생해서 해낼 건데? 라는 앞 질문에 대해서,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한번 해 볼게. 또 지치고 또 널브러져서 또 ‘어차피 안 돼’에 사로잡히더라도, 실제로 하는 사람이 있는 걸 잊지 않을게. 나가노의 현장을 기억할게.’
정도의 답은, 다시 지쳐서 삐딱해져버린 미래의 나 또는 우리에게 쥐어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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