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기기와 AI 혁명 시대, 진정한 의사의 가치는 ‘기본 진료’를 통해 질병의 사전 확률을 정교하게 추정하는 데 있다
이제원 원장
대구광역시 비엠한방내과한의원
[편집자주]
본란에서는 한방내과(순환신경내과) 전문의 이제원 원장으로부터 한의사가 전공하는 내과학에 대해 들어본다. 이 원장은 한의학이 질환의 내면을 탐구하고 생명 활동의 조화를 돕는 데 탁월하다면서, 객관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약물 의존을 줄이고 환자의 근본적인 건강 회복을 이끄는 일차의료 주치의로서의 생생한 임상 기록을 공유해 나갈 예정이다.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는 “의학은 불확실성의 과학이자 확률의 예술이다”고 했다. 이 '확률의 예술'을 관통하는 수학적 원리 중 하나가 바로 18세기 토머스 베이즈(Thomas Bayes)가 제시한 '베이즈 정리'다.
베이즈 정리는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을 때 기존의 확률을 갱신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임상 진료에서 의사는 환자의 병력과 증상, 신체검진 등을 종합하여 질병에 대한 '사전 확률(Pre-test Probability)'을 추정한다. 이후 혈액 검사나 영상 검사 등 진단 검사를 통해 객관적으로 얻은 새로운 증거가 기존의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우도비(Likelihood Ratio)’를 통해 평가하여, 질병의 가능성을 '사후 확률(Post-test Probability)'로 업데이트하는 것이다. 즉, 진단기기는 스스로 답을 내는 마법 지팡이가 아니며, 검사의 의미와 결과가 갖는 임상적 가치는 검사 시행 전 임상적으로 추정한 사전 확률과 함께 해석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유튜브와 AI로 검색해 보니, 제 증상이 이상근 증후군과 비슷한 것 같아요.” 좌측 둔부와 다리로 이어지는 극심한 방사통으로 내원한 58세 외국인 남성 환자가 진료실에 들어서며 건넨 첫마디였다. 그는 이미 인터넷 검색을 통해 스스로 병명을 확신하고 있었다.
환자의 병력을 자세히 청취하며 임상 추론을 시작했다. 환자는 평소 업무 중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 허리 통증이 잦았으며, 높낮이 조절 책상을 사용할 정도로 허리 상태 관리를 위해 노력해 왔다.
내원 한 달 전, 공항에서 수화물을 들던 중 급성 요통으로 증상이 시작됐다. 이후 중국과 튀르키예를 오가는 장시간 비행은 증상을 더 악화시켰다. 튀르키예 현지 병원에서는 척추 질환을 의심하여 비스테로이드성 소염진통제(NSAIDs)와 근육이완제를 처방했고, 이후 일시적인 통증 경감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바쁜 일정 때문에 예약된 CT 검사는 시행하지 못했다. 허리 중앙부에서 시작된 통증은 점차 좌측 엉덩이와 허벅지 뒤편으로 퍼져 나갔다. 환자는 진통제와 온찜질을 통해 증상을 조절했을 뿐, 추가 진료를 통한 검사나 치료를 받지 못했다. 이렇게 약 3주 동안의 해외 일정을 마친 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본원에 내원했다.
병력 청취를 통해 추정한 사전 확률을 정교하게 평가하기 위해 신체 및 신경학적 검사를 시행했다. 좌측 하지직거상검사(SLRT)에서 수동으로 45도까지 거상했을 때 기존의 좌측 둔부 및 하지 방사통이 뚜렷하게 재현됐다. 반면, 이상근의 문제를 확인하기 위한 각종 유발 검사(Active piriformis, Beatty, FAIR Test 등)는 모두 음성이었고, 오직 Pace test에서만 미약한 양성(trace) 반응이 관찰됐다.
병력과 신체검진을 통해 수집된 데이터를 종합한 결과, 환자의 증상은 이상근 증후군보다는 제5 요추-제1 천추(L5-S1) 분절의 추간판 돌출에 의한 S1 신경근 병증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했다. 이에 다음 단계로 현대 과학의 도구인 진단 의료기기를 활용해 임상적으로 추정한 ‘사전 확률’에 검사 결과를 반영하여 ‘사후 확률’로 업데이트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감별 진단을 위해 영상의학과에 요추 자기공명영상(L-spine MRI) 검사를 의뢰했다. 진료의뢰서에는 '요추 통증에 대한 MRI 검사 요망’이라고 간단하게 적는 대신 ‘L5-S1 분절의 추간판 탈출증(HIVD)이 강력히 의심되나, 환자가 우려하는 이상근에 의한 좌골신경 자극(piriformis syndrome)의 가능성도 감별하기 위해 대좌골절흔(Greater sciatic notch) 주변의 이상근 및 좌골신경 주행을 확인해 달라’고 명시했다. 임상의가 명확한 임상적 의문과 감별진단을 제시할수록 영상의학과 전문의 역시 해당 부위를 중심으로 영상을 보다 집중적으로 판독할 수 있기 때문이다.
MRI 판독 결과는 나의 임상 추론을 뒷받침했다.(그림 1) T2 강조 축상면 및 시상면 영상에서 L5-S1 좌측 중심성 추간판 돌출과 이에 동반된 좌측 제1 천추(S1) 신경근의 경도 압박 소견이 관찰됐다. 반면, 환자가 스스로 의심했던 이상근은 관상면 영상에서 좌우 대칭적인 형태를 보였으며, 비정상적인 신호강도도 관찰되지 않았다. 판독상 이상근은 특이 소견이 없는 것으로 평가됐다.
그림 1. 요추 및 골반 자기공명영상(MRI) 소견
(A) 제5요추-제1천추(L5-S1) 분절의 추간판 돌출(disc protrusion)을 보여주는 T2 강조 시상면 영상(T2-weighted sagittal image, 화살표).
(B) 좌측 제1천추 신경근의 경도 압박(mild compression of the left S1 nerve root)을 동반한 좌측 중심성 추간판 돌출(left central disc protrusion)을 보여주는 L5-S1 분절의 T2 강조 축상면 영상(T2-weighted axial image, 화살촉).
(C) 좌우 대칭적인 형태와 비정상적인 신호강도가 관찰되지 않는 양측 이상근(bilateral piriformis muscles)을 보여주는 T2 강조 관상면 영상(T2-weighted coronal image).
환자가 스스로 의심했던 이상근 증후군은 병력, 신체검진 및 영상검사 결과를 종합한 결과, 주요 감별진단에서 우선순위가 낮아졌다. 확인된 영상의학적 소견과 이를 종합한 임상적 판단을 환자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침구 치료, 약침 치료, 한약 치료 등을 집중적으로 시행했다.
“함께 일하는 동료도 수개월 동안 허리 통증이 지속되고 해서, 이곳을 소개해 주었어요.” 치료가 진행되며 환자의 방사통은 점차 호전됐고, 자신의 증상이 왜 발생했는지와 현재 상태를 명확히 이해한 환자는 치료 과정에 강한 신뢰를 보였다.
바야흐로 AI 혁명의 시대다. 앞으로 더 많은 환자가 AI의 힘을 빌려 자신의 증상을 해석하고 질병을 추정한 뒤 진료실 문을 두드릴 것이다. 의학에서 진단은 흔히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비유된다. 파편화된 증상 몇 가지를 인터넷 검색창에 넣으면 AI는 그럴듯한 병명들을 나열해 주지만, 이는 코끼리의 코나 꼬리만을 만지고 전체를 판단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의사의 임상 추론은 이러한 파편들을 모아 질병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의 상당 부분은 첨단 진단기기가 아닌, 환자의 이야기를 듣는 병력 청취와 의사가 직접 시행하는 신체검진이라는 '기본 진료'에서 완성된다. 특히, 환자의 이야기를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거기에 다시 질문을 던지며, 직접 신체를 진찰하고, 서로 다른 가능성을 비교하여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일은 여전히 의사의 핵심적인 역할이다.
초음파, X-ray, CT, MRI와 같은 진단기기나 혈액검사와 같은 진단검사의 결과만으로 임상적 의미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검사 결과가 갖는 임상적 의미는 임상의가 문진과 신체검진을 통해 추정한 '사전 확률'과 함께 해석될 때 비로소 제대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AI가 수많은 가능성을 제시하는 시대일수록, 그 가능성 가운데 무엇이 실제 환자에게 중요한지를 판단하는 '기본 진료'의 가치는 오히려 커질 것이다.
전체론적 관점(整體觀念)을 바탕으로 환자의 증상 하나에만 매몰되지 않고 생활습관, 병력, 신체 전반의 변화를 함께 살피는 한의학적 진료는 AI 시대에 더욱 중요한 임상 추론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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