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석굴암 가는길
뉘라 인생을 일러 흐르는 물에 비유했던가.
깊은밤, 홀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린 시간의 아득한 저편을 바라보노라면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나도 모르게 흥건히 가슴에 젖어든다.
정녕 흘러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고, 내 곁을 스쳐간 아름다운 추억은 기억 속에서만 곱게곱게 채색될 뿐이던가?
문득 일상에서 탈출하고픈 생각에 차를 몰아 불국사로 향했다. 길 양편으로 늘어선 가로수에서는 만추(晩秋)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노랗게 물든 은행잎들이 우수수 낙엽처럼 흩날린다.
문득 부처님 나라 불국(佛國)으로 향하는 내 마음과 공손수(公孫樹:은행나무)라는 말이 묘하게 하나로 겹쳐져 옴을 느낀다.
공손수는 은행나무의 또 다른 별칭이다. 할아버지가 그 나무를 심어 손자 대(代)에 이르러서야 열매를 따먹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들 나무는 10년 앞을 내다보고 심고, 인재를 교육할 때는 100년 앞을 내다본다 하여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할 때 비유하여 쓰이기도 한다.
구름 한 점 없이 옥같이 파아란 하늘에 노랗게 물든 저 색깔의 대비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색깔이 하나로 섞이고, 청초히 해맑은 느낌이라는 느낌의 전부를 다 모은 듯한 저 모양은 얼마만한 감동적 아름다움이더냐.
돌아보건대 자연의 저 경건하기조차 한 신비로운 ‘조화’를 보고 배워 나는 어떤 모양의 ‘공손수’가 되어 훗날 내 가정과 지역(地域)을 위한 열매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주차장에는 울긋불긋 화려한 등산복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활짝 웃음을 머금고 있다.
나는 석굴암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느 모롱이 펑퍼짐한 곳을 지나자니 갈대가 무리를 지어 서있는 게 보였다. 그들은 마치 주변 어디에 오고 있을 일행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노숙히 은발을 흩날리며 바람을 안고 서있는 것이었다.
아, 저 자그마한 갈대 하나에 감춰진 조물주의 위대한 손이여… 저들은 이 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나면 봄볕 속에 다시 여기에 모여 와서 저렇게 일행을 기다리는 일을 반복할 것이리라.
가뿐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오르니 탁 펼쳐진 눈앞의 정경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보라! 동해는 껑충 뛰어올라 중천(中天)에 걸리고 그린 듯한 통통배는 하얀 구름을 끌고 힘겹게 대양으로 나가고 있나니. 파도는 은빛으로 반짝이며 출렁이고 풍덩! 한 끝을 바다에 떨어뜨린 산맥은 황급히 엉덩이를 육지 쪽으로 내빼고 있다. 이렇듯 하릴없는 해안 정경이 손에 잡힐 듯 정겹다.
발 밑으로는 함월산(含月山) 자락이 꿈틀꿈틀 땅심을 받아 뱀밭, 범실, 노루목, 어일로 향하고, 만산연봉은 붉게 타며 한껏 이 가을의 정취를 발산하고 있다.
이렇듯 오늘 여기 이 시간의 자연은 그윽히 환상적인 음율로 비발디의 ‘사계(四季)’ 중의 ‘가을’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의 가슴에는 한껏 물든 단풍잎 하나 인장인듯 붉게 붉게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