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있는 의심

기사입력 2013.10.2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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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수 진 한의사, 정신분석가 www.psychoanalystdrrhi.com
    - 8+1한의원(서교점) 원장, 이수진 정신분석 심리치료 연구원장, Member of NAAP

    “의심은 소통의 출발점입니다.” 최근 상영문제로 논란을 일으킨 영화의 말미에 한 철학자가 말한다.

    아이가 부모에게 “나는 어디에서 태어났어요?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요?”하고 묻는데 아빠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고 일축해버리면 그것으로 아이와 아빠가 나눌 수 있는 수많은 대화의 가능성은 그 순간에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엄마가 “아니야. 넌 엄마, 아빠 사이에서 났지”하고 아이의 의심을 받아들여서 반응을 해준다면 그 때 아이의 일방적 의심은 확장된 인식으로 변형 가능해지고 아이와 부모 사이의 소통의 길이 열린다는 이야기였다.

    사실 기대치 않았던 놀라운 멘트였다. 이 대목이 유독 마음에 남았던 이유는 ‘의심’이란 것이 나와 나 아닌 편을 ‘분리’하는데 쓰이는 것이 아닌, 나와 남이 소통해서 제3의 영역을 창조하는데 기여하는 중요한 재료인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었다.

    대개 우리는 ‘의심’이란 것을 어두움의 색채와 연관 짓는다. 그래서 피하고, 병리화하기도 한다. 편집증이니 망상이니 하는 말들을 선택해서 ‘의심’을 정상이 아닌 것으로 우리 삶에서 멀리 두고자 한다.

    그러나 위의 철학자가 말하고 있는 의미로서의 의심은 어떠한가?
    우리는 하루하루의 삶에서 직면하게 되는 분노, 우울, 허무 등의 강력한 감정이나 인격 깊숙이 배여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장악하는 태도들에 대해 의심해 볼 수 있는가?
    ‘내가 왜 이러는 걸까?’하고 말이다.

    정신분석이란 건 그런 의심에서 출발하였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신체적 증상이 신체적 이유에서만 오지 않을 수 있음을 의심했다. 정신적 이유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 그 의심을 품고 당대의 뛰어난 신경의학자들과 배우고 연구했다. 그러한 결과로 의식에서 멀어진 채로 마음 깊이 억눌린 갈등이 증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통찰이 가능했다. 그 억눌린 갈등과 연관된 감정들을 말하게 함으로서 증상을 다스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talking cure”라는 정신분석적 개념이 생겨났다.

    융 역시 환자들이 겪는 정신적 증상이나 고통에 대해 그 이유를 질문했다. 그가 오랜 경험 속에 발견한 것은 신경증이란 그 고통 이면의 의미를 인식하고 인생의 보다 초월적 영역을 이해할 수 있는가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위니캇이라는 분석가 역시 이러한 의심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생생하게, 나로서 살아있는 경험을 하며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정신적 건강의 관건이 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우리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의심을 품어볼 기회를 허용한다면 어떨까?
    ‘도대체 왜 이렇게 우울하지? 오늘 있었던 그 일 때문인가? 그게 왜 이렇게 날 힘들게 하는 거지?’, ‘내가 채 모르는 부분이 있나? 나 자신에 대해서?’하고 말이다.

    물론 현대사회는 매우 바쁘고 복잡하며 심적으로 건조하다. 그래서 우리 안의 그 무엇에도 정신의 물을 주고 키워가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매일의 상황과 일어나는 감정들이 강력할수록 우리는 그것들에 오히려 사로잡혀서 생각이나 감정을 충분히 소화할 심리적 공간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자신의 건강한 의심을 품고 자라게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깊이 훈련된 사람과 나눌 수 있다면 그러한 과정은 제3의 보다 넓은 인식을 가져오고 그 인식은 우리의 증상이나 고통을 변화시킬 수 있다.

    내가 아는 이 중에 참으로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 하나 있다. 화의 양상이 폭발적이고 사람을 굉장히 무안하게 하는 터라 사실 그 사람에 대해 어떤 배려와 질문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내가 내 특성상 ‘내가 뭔가 이 사람을 언짢게 하였나? 그게 아니면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한테 하듯 이렇게 하나? 이 사람은 어릴 때 환경이 어땠던 걸까?’하고 질문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 사람에 대한 짜증과 분노로 가차 없이 그 사람을 ‘분노통제가 안 되는 가까이 해선 안 될 사람’ 정도로 판단해 버렸을 것이다. 대신 그 사람을 오랫동안 알았던 사람들이 간간히 던지는 말들을 조합하면서 모은 정보로 차근히 생각해 보았다. 어릴 때부터 화를 잘 내었던 사람이다. 타고난 예민함도 있었겠지만 어릴 적 이 아이에겐 아이의 짜증이나 화 앞에 어쩔 줄 모르는 어머니가 있었던 것이다. 엄마는 자신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아이가 화를 내는 것처럼 어찌할 줄 모르고 저자세가 되었다. 아이가 불평하는 바를 해소해주려고 모든 걸 다 했다는 것이다. 아이가 자신의 감정을 소화하지 못해 엄마에게 퍼부을 때, 엄마가 아이의 감당치 못하는 부분을 정서적으로 소화해서 적절히 돌려주되 아이의 표현에 적절한 경계를 형성해주는 것은 참 중요하다. 화를 이해하고 풀어주되, 건강한 공격성으로 적절히 버텨주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감정을 감당해줄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위태로운 경험을 계속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적절하게 관계를 통해 조절되지 않은 과도한 자기애를 갖게 되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정서적 무능과 일방적 관계맺음을 이후 인생의 다른 사람들과도 반복하면서 자신의 왜곡된 믿음을 더욱 확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 사람의 문제가 다 엄마 탓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의 생애에 가장 첫 번째로 만나는 중요한 대상인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정신에 각인된 것이 이후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지닐 지는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또한 우리 인격의 바탕을 이루게 된 내용들에 인식은 현재의 이 사람이 과거의 각인된 패턴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되기에 중요한 것이다. 이 사람이 내 환자가 아니었으므로 내 마음 속에서만 의심과 질문, 생각을 발전시킬 뿐이었지만 그래도 내가 이 사람의 분노에 파괴적인 상처를 입지 않고 내 마음에서 이 사람이라는 존재를 굳이 끊어내야 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에서는 참 감사한 일이었다. 이 분이 만일 좋은 치료자를 만나 이러한 인식을 가져보게 된다면, 확신컨대, 분명 삶이 분노에만 갇히지 않을 수 있다는 새로운 경험을 치료자와의 관계 속에서 해보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렇듯 우리가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품는 의미 있는 의심은 참된 우리 자신들의 목소리와 소통의 문을 여는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 마음에 대해 갖는 의심이 우리가 과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인식을 열고 인격 깊이 배여 고통을 반복해서 만들어내는 영역에 회복을 가져올 수 있다면 그 의심은 해 볼만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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