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8년 『朝鮮醫學界』가 전하는 悲報 李峻奎 선생의 서거
1918년 간행된 『朝鮮醫學界』제4호에는 고종시대에 御醫로 활동했던 李峻奎(1852~1918) 선생의 서거를 추모하는 글이 게재되어 있다. 洪鍾哲(1852~1919)에 의해 쓰여진 이 글은 당시까지 한의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던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쓰여졌다. 李峻奎는 함경도 북청군 출생으로 학문적으로 뛰어나 御醫로 천거되어 조선말 고종년간에 궁중에서 조선의 의술의 중심에서 의학연구에 매진한 인물이었다. 그는 高宗의 명에 따라 『醫方撮要』라는 책을 편찬하게 되는데, 이 책은 조선 최후의 官撰醫書라는 데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洪鍾哲은 다음과 같이 애도하고 있다.
“오호라 바람이 옮기고 불이 겁박하여 일순간에 만가지가 변화하니 천지간에 어떤 인물도 모두 질그릇 만드는 모래로 돌아가나니 물결의 번갈아 옴이라. 사는 것도 족히 기뻐할 것이 아니고 죽는 것도 족히 슬퍼할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 한 웅큼의 눈물도 족히 한없는 슬픔을 쓸 수 없고 여러번 쓴 문장도 족히 무궁한 감정을 서술하지 못한다. 총괄컨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도 가하고 문장을 쓰지 않는 것도 또한 가하다. 그러나 공과 나는 나이가 같다. 그 우의에 있어서는 형제와 같다. 지금 같이 열어서 동업하고 있다. 장례식이 지나도 마치 침과 먼지가 서로 상응하는 것 같고 메뚜기와 노래기가 서로 의지하는 것 같아서 현악기의 가운데가 끊어지고 황대가 마침내 광막해지고 구름을 지나는 기러기가 짝을 잃은 모양이로다. 밭가는 부부가 짝없이 혼자 서있는 모양으로 아홉 이랑의 들을 경작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공께서 서거하셨으니 내가 어찌 눈물을 흘리지 않을 것인가. 또한 어찌 글을 쓰지 않을 것인가. 공께서는 평소에는 건강하게 걸음을 걸으셨고 달게 음식을 잘 드셨고 병도 적으셔서 내가 일찍이 오래사실 것으로 내다보았고 공도 스스로 오래살 것으로 생각했었다. 조물주의 장난으로 이렇게 순식간에 돌아가게 될 것을 알았겠는가. 오호라 슬프다. 온화하고 순수한 용모와 간결한 거동을 가진 그를 다시 세상에게 보지 못하게 되었다.…”(필자의 번역)
이 글을 쓴 洪鍾哲은 李峻奎와 같은 나이로서 1908년에 公認醫學講習所라는 한의학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한의학교육에 투신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 교육기관에서 1919년 타계할 때까지 한의학교육을 위해 헌신했다.
李峻奎는 洪鍾哲의 글에 따르면 함경도 북청군 출신으로 뛰어난 의학능력으로 고종에 의해 어의로 발탁되었는데, 청빈한 성품으로 인해 남평, 여주 등의 군수로 제수된 경력도 있었고 궁중에서는 관직이 侍從院副卿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합방 후에는 和平堂主人인 李應善이 經營하는 朝鮮病院의 院長으로 활동하면서 뛰어난 의술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다.
李峻奎의 성품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구한말 御醫의 신분으로 나라의 폐망과 함께 궁중에서 퇴출되어 서울 장안에서 한의원에서 활동하고 일제의 폭압적 정치를 목도한 그는 당시 시대가 낳은 불운한 한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