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으로 풀어보는 한국 한의학 (28)

기사입력 2012.06.12 09:59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a ks url
    B0042012061235991-1.jpg

    김남일 교수(경희대 한의대 의사학교실)

    한말의 학자 黃玹(1855〜1910)이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한말의 역사책인 『梅泉野錄』에 郭鍾錫(1864〜1919)이라는 인물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郭鍾錫의 기억력은 남보다 뛰어나 어떤 사람들은 그를 동의보감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 번만 보면 모두 암송하였으므로 그의 총명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예술을 통달하고 병법도 연구하였다. 그리고 河兼洛이라고 하는 사람은 武人으로 곽종석과 종유하여 항시 곽종석을 도와주었다. 그는 곽종석에게 병법을 배운 후 대원군과 내통하여 강계부사까지 지냈다. 곽종석은 이미 높은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경박한 무리들은 날마다 그의 옆에서 지껄이며 怪術을 가진 사람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싫어하여 태백산에 들어가 수년 동안 지내다가 다시 가야산에 들어가 살았고, 최후에는 거창 산중에 들어가 살았다.”

    곽종석은 1919년 3.1운동 이후에 영남과 호남의 유생들의 연서를 받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호소문을 金昌淑을 통해 파리에 전달한 파리장서사건의 주인공이다. 어려서부터 유교경전을 공부하였고, 도가와 불가의 서적에도 밝았다고 한다. 25세에 李震相의 문인이 된 후로 학문에 전념하였고, 을미사변 이후로는 각국에 일본침략을 규탄하는 글을 보내기도 하였다.
    곽종석 같은 大儒를 ‘동의보감’이라고 호칭한 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첫째, 곽종석 개인의 학문적 성향이다. 비록 그가 한의학에 대해 어떤 연구를 하였는지 구체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어린 시절 도가와 불가의 서적도 연구한 점을 볼 때 학문적으로 상통하는 의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쏟았을 가능성이 높다. 유학자임에도 ‘동의보감’이라는 의서로 그를 별명으로 불렀다는 것은 그가 의학 연구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둘째,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다는 점이 ‘동의보감’이라고 호칭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억력이 뛰어난 능력과 『東醫寶鑑』의 뛰어난 점이 등치된다고 본 당시의 의식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 대해 곽종석 본인도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한 번만 보면 모두 암송하였으므로 그의 총명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곽종석은 ‘동의보감’이라고 호칭될 만큼의 총명한 인물로서 그의 암송 능력은 이 책에 비견될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셋째, 이 시기에 『東醫寶鑑』이라는 의서가 가지고 있었던 학문적 권위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곽종석같은 대학자를 ‘동의보감’이라는 의서의 이름으로 호칭하여도 당시 이에 대해 깊이 동감하고 있다는 점에서 『東醫寶鑑』은 당시 최고의 학문적 경지를 담고 있는 서적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