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자만이 희망이다
2011년 9월14일부터 12월27일까지 경향신문에는 <신영복의 변방을 찾아서>라는 기획기사가 8번 다뤄졌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님께서 찾으신 변방은 해남 송지초등 서정분교,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박달재, 홍명희 문학비–생가, 오대산 상원사, 전주 이세종 열사 추모비 – 김개남 장군 추모비, 서울특별시 시장실, 봉하마을이다. 서울특별시 시장실이 변방 탐방지에 끼여있는 것은 좀 의아하지만 나머지 장소는 모두 소위 말하는 ‘시골’이다. 신 교수님은 변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철학을 갖고 계신다.
“지리적·공간적 의미에서 변방은 변두리, 주변부를 뜻합니다. 하지만 저는 담론 지형에서의 변방, 즉 주류 담론이 아닌 비판적·대안적 담론이라는 의미로 변방의 뜻을 설명하고 싶어요. 우리 시대의 변방인 농촌은, 분교들은 주류 담론과 근대적 가치에서 소외된 곳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곳에서 우리가 잃고 있는 것을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심부의 시각으로 변방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변방에서 우리 사회 중심부를 바라보고 고민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지요.” 즉, 변방을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는 곳으로 정의하고 계시는데, 과연 변방이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새해는 늘 ‘희망’이라는 단어와 닮아있다. 새해에는 새 부대에 새 술 담듯 그렇게 새 꿈들을 차곡차곡 채워가고 이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꿈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부산대로 이직 후 4년째가 시작되었다. ‘경남 양산시 물금읍 범어리’라는 주소는 참으로 낯설었다. 가족관계증명서 떼려고 들렀던 물금읍사무소 간판을 보고 “아, 나는 시골로 내려왔구나”하고 묘한 기분이 들었던 날도 있었다. 그날따라 모래바람은 세차게도 불었다. 신영복 교수님의 변방예찬론을 그 당시 읽었더라면 “난 희망의 변방, 양산에 살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을텐데..... 시골에 살고 있다는 이 알 수 없는 열등감은 양산-서울 왕복 교통비의 무게만큼 가끔 혹은 자주 나를 무겁게 짓누른다.
2012년 1월27일 금요일 사은회가 예정되어 있었던 그날,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1기생들의 한의사 국가고시 전원 합격 소식을 들었다. 다른 전공으로 다양한 직장생활을 활발하게 하다가 다시 한의사의 꿈을 꾸고 뒤늦게 입학한 학생들의 간절함 때문인지 국시 합격 소식에 유난히 기뻐하고 설레어 하고 있었다. 2000년 1월 말, 한의사 국가고시 합격 소식을 들었던 13년 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지금 내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부산대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금 이 많은 후배들에게 ‘희망’을 보여주고 있는가? 나는 어떤 교수인가? 어떤 존재인가?’ 낯 간지러운 질문들을 내게 던져 보았다.
그러다가 ‘변방에 있는 전문가로서 같은 분야의 수많은 후배들에게 희망을 보여준 사람들 중에는 누가 있을까?’를 생각해보니 ‘사물놀이’라는 장르를 만든 김덕수 선생에 떠올랐다. 김덕수 선생을 포함한 네 명의 젊은 국악인이 장구, 꽹과리, 징, 북으로 이뤄진 연주그룹으로 처음 ‘사물놀이’를 창설한 것이 1978년. 35년이 지난 지금, ‘사물놀이’는 단순한 연주형태의 명칭으로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한국 전통음악을 대표하는 일반명사로 진화했으며 한국 내에 전문연주 단체만 300개, 아마추어 단체는 2000여개에 달할 만큼 대중화된 상태라고 한다. 사물놀이가 생긴 이래 4500여회의 공연을 했다고 하니 1년에 130여회의 공연을 한 셈이다. 김덕수 선생의 지론 중 하나가 바로 ‘전통과 현대의 접목’인데 그는 처음 사물놀이를 만들었을 때에는 한국적인 민속 악기인 꽹과리, 징, 북, 장구가 무시당하는 현실에 대한 오기심만 가득 찼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물놀이’를 완성해가며 시대도 변해가고 사람들의 귀도, 감성도 달라졌기 때문에 그에 따른 다양한 변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탈춤, 농악장단, 무속장단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오케스트라와 같이 협연을 할 수 있는 협주곡 혹은 군악대와의 협연곡까지 끊임없이 만들어야 했고 그 결과 사물놀이는 현재도 끊임없이 진화 중이고 부르는 데는 갈수록 많아진다는 자부심을 갖고 계시는 것 같기도 하다.
국악의 세계화에 기여했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도 김덕수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계화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있는데 요즈음의 세계화는 필요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발상이 될 수도 있다. 서구적인 틀과 잣대 속에 우리 것을 넣다 보면 잃는 것이 더 많은 경우도 있다. 59년 서울대에 국악과가 생기고 서양의 음악과 기초적 이론에 우리 것을 맞춰 나가는 이론화 작업이 진행되면서 많은 것을 잃게 된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음은 흔드는 것, 즉 연속성과 자연스러운 떨림을 생명으로 하는데 분절의 음을 기본으로 하는 건반악기에 맞춘다는 것은 우리 음악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35년 전 국악계에 김덕수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사물놀이는 어떤 사물놀이였을까? 깨어있는 한 지성이 실천하는 한 행동가가 뜻을 모으고 사람을 모으고 일을 저지른 결과는 오싹할 정도의 차이를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언젠가 한 TV 프로그램 인터뷰에 나오셔서도 김덕수 선생은 후배들 걱정을 입이 닳도록 하셨던 기억이 난다. “남사당패, 국악패거리 소리 들으며 멸시당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싫었고 우리도 양악 하는 오케스트라처럼 전 세계 공연도 다니고 상설 공연도 해서 월급도 받고 자식들도 키우고 그렇게 살고 싶다. 우리 후배들 그렇게 밥벌이 하며 살 수 있는 밥그릇 만들어주고 싶다.” 그 꿈, 그 오기스런 열정을 잃지 않았기에 지금 현재 김덕수는 국악계, 사물놀이 분야에서만큼은 거인 대접을 받고 계시는 것 같다. 후배들에게 밥벌이의 희망과 꿈을 보여주었으니까 말이다.
다시 돌아와 나의 변방, 양산생활을 되돌아 본다. 신영복 교수님께서 아무리 변방을 예찬하셔도 양산은 양산이고, 김덕수 선생님께서 사물놀이로 전 세계를 주유하셔도 나는 김덕수 선생님이 아닌 한의사 신미숙이다. 내가 후배들에게 제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희망은 과연 무엇일까? 임상 한의사로서 내가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환자이다.
생각해보면 하루 종일 예약환자를 기다리고 환자를 맞이하고 환자를 상담하고 환자를 치료하고 또 그들의 징징거림을 참아내고 아픈 곳을 만져주고 치료해주고 다독거려주고 위로해주고 가는 길을 배웅하고 인사하고 하는 진찰과 치료의 전 과정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이런 힘든 진료를 잘 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치료결과에 대해서 논문으로 리포트를 잘 해내는 것이 임상교수의 몫이고 의무이기는 하다. 그 업무 역시 진행 중이고 보다 더 가시적으로 성과를 내야 하는 대내외적 임무에 자다가도 가끔 가위에 눌리곤 한다. 그러나 사실, 논문작업보다 내게 보람을 주는 일은 환자들의 좋은 치료결과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들의 진정한 주치의가 되어가는 과정, 그 자체는 너무나도 가슴 벅차다.
원인 불명의 하지마비로 지팡이를 짚고 오셨던 50대 후반의 중년 여성, 퇴행성 관절염과 척추관 협착증으로 펭귄보행을 하느라 신발 바깥쪽이 다 닳아 없어졌던 70대 할머니, 회전근개 파열로 수술을 안 하고 3년째 버티고 계신 만성 어깨통증 30대 후반 주부, 숲해설가로 전국의 숲을 누비느라 돌보지 못했던 발목 통증으로 왕고생 중이었던 30대 중반 주부, 추간판 디스크파열로 수술 적응증임에도 불구하고 삼엄한 직장 분위기 때문에 수술도 치료도 받지 못하고 내내 울며 출근해야 했던 20대 후반 직장여성. 이 많은 환자들이 한의학적 치료만으로 완치에 가까운 호전을 보여주셨다. 환자만이 희망이다! 이런 한분 한분과 이별기념 인증샷을 올해도 꾸준히 찍어갈 것이고 이 많은 임상례는 고스란히 부산대 한의전 학생들과 나눌 것이다. 변방이 희망으로 바뀌는 주문, 환자만이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