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숙 교수

기사입력 2011.06.24 09:54

SNS 공유하기

fa tw
  • ba
  • ka ks url
    B0042011062435678-1.jpg

    “전통없는 혁신은 실패하고, 혁신없는 전통은 사라진다”

    1980년대 한국 엄마들에게는 일본산 ‘코끼리 밥통’을 갖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1983년 일명 <코끼리 밥통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주부들의 일본 여행과 싹쓸이 쇼핑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는 노래주부교실 부산지부 회원 17명이 일본 시모노세키로 단체 여행을 한 이후 일본산 전자제품들을 잔뜩 사들고 귀국하게 된 사건으로 아사히 신문은 ‘한국인 손님 때문에 매상고가 늘어난다’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게 되었고 국내 신문사의 한 특파원은 이를 ‘싹쓸이 쇼핑’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를 하게 된 것인데, 이 기사 덕분에 주부들을 비난하는 여론이 들끓으면서 이 사건은 호화 쇼핑 시범케이스에 걸려 관광회사 간부 2명은 구속, 여행자 1명은 입건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 제목이 어찌하여 <코끼리 밥통사건>이냐 하면, 이 17명의 부산 주부들이 공통적으로 구입해온 물건이 바로 코끼리 밥통이었기 때문이다.

    세월은 흘러흘러 2011년 오늘날, 국산 밥통의 점유율은 전체 밥통 시장의 70%에 육박할 정도로 그 품질과 디자인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나 “난 소중하니까”, “난 특별하니까” 의 자칭 VIP 레벨의 고급 엄마들은 여전히 국산이 아닌 외제 밥통에 관심이 꽂혀 있었으니 그게 바로 ‘독일명품가전’이라는 별명을 달고 있는, 브랜드 가치만 7조원인 독일산 휘슬러(Fissler)이다. 휘슬러 CEO인 마커스 캡카(Markus H Kepka·48)의 국내 행보가 주요 일간지 경제란에 실릴 때마다 꼼꼼히 읽곤 했었는데 아무래도 친정집에 있었던 낡은 휘슬러 압력밥솥 때문에 생긴 ‘휘슬러’라는 브랜드에 대한 조건없는, 또 자연스러운 애정 때문이리라.

    휘슬러의 발전에는 60~70년대 독일에서 생활을 시작한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들을 빼놓을 수 없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감자와 소시지를 먹는 독일인들에게 왜 밥을 짓는 압력솥이 필요했겠는가? 휘슬러가 압력솥을 처음 내놓은 것은 1953년. 한국을 겨냥한 솔라(Solar) 시리즈를 내놓기 시작한 것은 1972년. 그 제품이 40년째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다고 하니 이만하면 국산 밥솥보다는 오랜 전통과 역사를 겸비하고 있다는 평가가 과언은 아닐 듯하다.

    한국의 광부와 간호사들은 그렇게 힘들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면서도 돈을 모으고 모아 휘슬러 압력솥을 하나씩 사서 고국에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부치는 것을 큰 낙으로 삼았었다고 한다. 이런 효성 지극한 한국인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휘슬러는 한국을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현재 휘슬러 제품의 점유율은 유럽 50%, 한국 30%에 이를 정도이며 “한국은 휘슬러의 미래다” 라는 슬로건 아래 한국사람들만을 위한 제품도 속속 출시하고 있다고 한다.

    캡카 대표가 생각하는 휘슬러의 자랑거리는 장인정신과 전통을 지키려는 고집인데, 새로운 제품을 내어놓을 때에도 ‘개선’이 아니라 ‘혁신’ 수준이 된 것만 비로소 제품으로 내놓는다고 한다. 최근 캡카 대표가 전통과 혁신에 대한 본인만의 철학을 밝히는 대목에서 큰 감동을 받았는데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바로 “전통없는 혁신은 실패하고, 혁신없는 전통은 사라진다” 는 것이다.

    전통 학문인 한의학을 하는 이 시대의 우리들에게 독일 밥통회사 대표님이 해 주신 말씀이 왜 이다지도 간담을 서늘하게, 콧날을 시큼하게 만드는 것일까? 전통 학문을 하는 우리들은 스마트폰과 다빈치 로봇수술이 대세가 되어 있는 2011년 오늘날 어떤 혁신을 꿈꾸고 있는가? 실패하거나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캡카는 전통과 혁신의 비율은 4 : 6 정도가 제일 이상적이라고 하였는데 요즈음 현대 한의학의 전통과 혁신의 비율은 몇 대 몇 정도일까?

    전통없는 혁신은 실패한단다. 한의학의 영어표기에 ‘traditional’이라는 단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옛 것은 구식탱탱 묵은 주제이고, 비과학적이며, 사라져야 하는 것들이라고 믿는 한의사들도 꽤 있는 것 같다. 실험결과만 믿을 것이며, 모든 한의사들의 썰은 버릴 것이며, 눈에 보이는 현대의학의 생리병리만 믿을 것이라는 전통한의학을 부정하는 학파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캡카의 말을 빌리면 이런 전통을 져버린 퓨전한의학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말이다.

    이번에는 혁신없는 전통을 대입시켜보자. 전통 한의학을 존중하고 부르짖지만 그 모든 개선과 변혁을 거부하고 과거의 박물관 의학에 머물러 있다면 그래서 뼈를 깎는 고통과 변신의 혁신이 없다면 이러한 혁신없는 전통은 사라진단다.

    역으로, 실패하거나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가 되지 않으려면 전통과 혁신의 적절한 조화, 아니 완벽한 황금비율을 이루어 내야만 한다. 실패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을 현대 한의학을 우리는 과연 만들어낼 수 있을까? 가져가야 할 전통은 어디까지이며 가장 신경을 써야 하는 필수적 혁신 항목들은 어느 것들이 있을까?

    이 결론에 공통된 답을 내놓을 수 있도록 페이스북 한의사당 멤버들과 오프라인 번개모임이라도 한 번 가져보고 싶다. 아니면 좀 더 거국적으로 협회 차원에서 ‘한의학의 혁신과 혁명’ 이라는 주제로 공개 포럼이라도 한 번 개최해보면 어떨까? 우리가 짊어지고 가야 하는 전통이라는 어깨봇짐과 어떤 값을 치루더라도 생존을 위한 그야말로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혁신’이라는 열매.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조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필연 실패하거나 사라질 운명일진데, 우리는 과연 어떤 카드를 꺼내야 할까?

    <태양의 서커스>를 본 적 있는가? 캐나다 출신 곡예사 기 라리베르테(Guy Laliberte·52)가 1984년 유랑극단을 꾸리고 창업을 한 것이 바로 <태양의 서커스>이다.

    지난 27년간 전 세계적으로 약 1억명이 이 서커스를 관람했고 지난해 공연 티켓만 1100만장이 팔려나갔으며, 현재 전 세계 각지의 전용극장에서 10여개의 공연이 진행 중이며 지난해 매출액은 9200억원, 본인 재산은 2조7000억원. 세계 최대 서커스를 이끄는 기업가이자 376억원을 내고 우주 여행을 한 괴짜이기도 하다. 1980년대 캐나다에서도 사양길을 걷고 있었던 서커스. 기 라리베르테는 전통 서커스를 고수하는 대신 새로운 길을 택하게 되었는데 공연의 주제를 정하고 스토리를 입히고 새롭게 작곡한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해 예술성을 극대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서커스의 핵심요소인 텐트, 광대, 곡예 단 세 가지만 남기고 관행처럼 굳어졌던 동물들은 과감히 빼는 방식을 택했으며 스타 곡예사 한두명에게만 집중하지 않도록 하면서 전 인원을 요소요소에 배치하여 마치 ‘서커스 공장’에서 찍어서 나오듯 여러 사람이 한 역할을 하더라도 동일한 연기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더니 외면했던 많은 관객들이 돌아오기 시작하였고 싸구려 볼거리로 전락해 있었던 서커스가 고급스러운 종합예술로 다시 한 번 태어나게 된 것이다.

    연 매출 1조원 공연을 총지휘하는 기 라리베르테가 본인의 성공담을 이야기하며 늘 강조하는 교훈 냄새 가득한 문장이 있다. “사양 산업은 없다. 사막에 꽃을 심어라” 가 그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한의계를 떠올려보면 온통 한숨소리 뿐이다. 한의학과 한의업을 사양 산업이라며 한숨을 푹푹 내쉬는 선후배들이 바로 그들이다. 한의학에서 절대로 갖추어야 하는 핵심요소 3가지는 뭘까? 기 라리베르테가 맞다면 한의학이 가지고 있는 기본 틀 세 가지를 빼고는 나머지는 모두 바꾸거나 없애야 할 것들인지도 모를 일이다.

    마커스 캡카가 이야기한 전통과 혁신의 적절한 조화(4:6)만 있다면 기 라리베르테처럼 사양 사업일 수 있는 한의학을 연매출 수 조에 이르는 히트 상품으로 만들어내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는가?

    학부생 시절 한 동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한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우리들 자체가 모순 덩어리.” 달나라로 여행가는 시절에 전통 학문이라는 것을 한다는 자격지심을 품은 슬픈 자조이기도 했다.

    우리 스스로도 이럴진대 그래서 늘 의사협회 나부랭이들한테 공격의 대상이 되는 모양이다. “한의학은 미신이다. 사라져야 한다. 이런 논리 부족과 문제투성이 자체인 한의학을 인정하고 발전시키려는 대한민국이 부끄럽다” 는 한의약육성법을 반대하는 의사협회의 광고문구이다. 개선이 아닌 혁신 수준을 거친 것만 제품으로 내어놓는 전통과 혁신의 황금비율 4 : 6으로 브랜드 가치 7조원 수준을 유지해가고 있는 독일명품 휘슬러의 교훈을 되새겨보자.

    사양 산업은 없으며 사막에 꽃을 심는 심정으로 임하라는 기 라리베르테의 무대뽀 정신 역시 지금 <한의신문>을 읽고 있을 한의사 선후배들 모두가 들이켜야할 ‘응급보약’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칼럼이 인쇄될 즈음에 나는 Toulouse라고 하는 프랑스 남부의 어느 거리를 걷고 있을 것이다. 전통 한의학에 혁신의 옷을 입혀 실패하거나 사라지는 일 없이 날개돋힌 듯 팔려나갈 히트상품 현대 한의학의 내일을 상상하면서 행복한 뿌듯한 조금은 이른 여름휴가를 온몸으로 열렬히 만끽하면서 말이다.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