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2년 한의사협회 설립 후 1962년까지의 기록
1962년 한의사협회가 간행한 『會員名簿』
학교 연구실 서가에 끼어있는 1962년 대한한의사협회가 간행한 『서울特別市 各道 會員名簿』를 우연히 빼보게 되었다. 어떤 경위로 이 책을 입수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잘 떠오르지는 않지만 醫史學을 연구하는 업보로 인연이 맺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古書도 아니고 적혀 있는 내용 가운데 이 책에서만 독특한 논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한의학의 현대사를 너무나도 훌륭하게 증언하고 있었다. 마치 소년시절의 성장기를 읽으면서 감동하여 눈물짓는 독자처럼 1952년 한의사협회가 창립되고 10년 남짓 살아가면서 갖은 고초 끝에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소년 한의사협회’의 모습은 희망과 고난이 교차되는 가난한 집 동자의 희망연대기였다.
4쪽에 걸쳐 앞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會勢의 槪要’는 1952년 한의사제도가 만들어진 이후 1962년까지를 정리한 기록이다.
이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일제의 압박 밑에서 위축되었던 한의학은 해방 후 국민의료법이 새로 제정되면서 한의사제도의 탄생을 보게 되고 1952년 9월 25일에 이것이 공포되게 됨으로서 새로운 기운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입법화에 물심양면으로 헌신한 인물은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던 李羽龍, 禹吉龍, 權義壽, 尹武相, 金永洙, 鄭源熹 등을 들수 있다. 국민의료법이 제정됨에 따라 그 법 제53조에 근거하여 1952년 12월16일 한의사협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이것은 한국전쟁 기간 피난시절에 부산에서 이루어졌다. 이 때 초대 한의사협회 임원은 명예회장 金永勳, 회장 李羽龍, 부회장 朴鎬豊(서울), 조충희(충남), 최해종(경북), 이사 박성수(서울), 박재필(경북), 이윤수(충북), 강창호(전북), 권의수(부산), 윤무상(부산), 정원희(부산), 허진(경북) 등이었다.
1953년 서울로 천도하게 됨에 따라 회장 이우룡은 부회장 박호풍, 서울시 회장 박성수, 사무장 김조석 등과 만나서 한의사협회의 사무소도 서울로 옮겨가기로 합의하고 당분간 서울시의 박성수 회장이 중앙회 회장서리를 맡도록 하고 1953년 12월2일에 회무를 인계하였다.
협회가 구성된 후 4년간 총회를 하지 못하다가 1955년 제2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게 되었고, 이 때 2대 회장에 李羽龍이 다시 재선되었다. 이 때 집행진은 회장 이우룡, 부회장 박성수, 전석붕, 최해종, 이사 박재걸(경기), 여원현(경북), 한세정(서울), 안인수(서울), 조명성(서울), 우길룡(경남), 이병행(충남), 이창선(충북), 강창호(전북), 김상덕(강원), 감사 이종해(서울), 신현덕(경북), 박천래(경남) 등이었다.
그러나 사무 집행의 어려움 등으로 인하여 이듬해인 1956년에 정기총회에서 회장 선거를 시행하여 朴性洙를 3대 회장으로 선임하였다. 이 때 집행진은 회장 박성수, 부회장 우길룡, 기타 부회장과 이사는 2대와 동일하였다.
1959년 5월8일에는 제4회 정기총회에서 임원을 개선한다. 이 때 집행진은 회장 박성수, 부회장 전석붕(경기), 우길룡(부산), 정현곤(경북), 이종해(서울), 정경모(서울), 조명성(서울), 박승환(서울), 배원식(서울), 김정제(서울), 신현덕(경북), 여원현(경북), 이용주(서울), 박재걸(경기), 운중원(충북), 박상동(충북), 허섭(경기), 윤성구(전북), 길흥식(강원), 감사에 왕희필, 이종태, 박천래 등이었다. 이날 정기총회에서 협회의 법인화에 대해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통과시키고 같은 해 11월11일에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허가를 얻어 사단법인 대한한의사협회로 조직이 개편되게 되었다.
1952년 한의사협회가 만들어질 당시 한의사 회원은 1656명이었지만 동양의약대학의 졸업생이 속출하게 됨에 따라 1962년에는 30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 1962년 한의사협회가 발간한 회원명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