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규 교수

기사입력 2010.11.19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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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원장의 어머님께…

    어머님! 잘 지내십니까?
    학부모님으로 뵙고 편하게 호칭하던 습관이 되어 이렇게 안부를 여쭈어봅니다.
    P원장도 한의원 경영은 잘 하고 있고, 며느리도 전공을 살려 바쁘게 지내고 있는지요? P원장을 만난 지도 꽤나 오래되어, 어머님께서 어떻게 지내시는지 안부를 제대로 여쭙지 못하여 궁금하던 차에 이렇게 편지를 드려봅니다.

    추억 속의 아련한 열정으로 기억나는 어머님!

    어머님을 처음 뵌 날이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한약분쟁(1993~1996)’중이었으니 족히 15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학생들은 부당한 사태에 유급을 각오하며 항의의 뜻으로 방학선포를 하고 등교하지 않았기에 유급시한을 얼마 남기지 않은 시점이었고, 학교측은 교육부의 압력에 못 이겨 학부모를 학교로 소환(?)하여 부속병원 본과 2학년 강의실로 모셔놓고 학생들의 학교 복귀를 부탁드리게 되었고, 몇 번의 회의 끝에 학생들의 유급을 불안해하는 부모님들과 학생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부모님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던 참담한 강의실에서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식들의 유급에 대한 걱정으로 시작한 모임이, 어느 순간 학생들의 이기적 행동을 젊은 양심에 따른 행동으로 바꾸고, 만학도로 한의대에 입학한 학생들의 다양한 사회 경험을 활용하기 위한 ‘나사(나이 많은 사람 혹은 나아가는 사람 등의 설이 있었는데)’를 결성하게 자극하였고, 교육부 눈치만 보던 한의대가 설치된 11개 대학 총장들이 교육부장관을 찾아 가도록 하고, 대학별로 활동하던 교수들이 전국한의대 교수비대위를 만들어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이어가게끔 만드는 ‘전국한의과대학 학부모협의회’라는 조직의 중심에 계셨던 어머님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집에서 며칠 동안 물에 불려 곱게 만든 율무죽을 나누어 주셨던 학부모님과 함께 전국의 한의대 교수들이 농성하는 명동성당 입구의 비닐천막으로 찾아오셔서, 더운 여름에 까맣게 타버린 얼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격려와 동지(^^)애를 나누셨던 열정이 기억납니다.

    ‘민족의학’의 가슴 아픈 역사에 눈 뜬 이후에는 아버님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빠져있던 이기적인 한의사를 찾아다니며 훈계하고, 무자격자들의 꾐에 빠져 불법의료에 가담하던 철없는 한의사를 달래기도 하고, 동료 학부모들의 비난을 각오하며 공부밖에 모르는 범생이 학생들에게는 동기간 우애를 일깨우며, 한의학 홍보를 위한 의료봉사에 한 여름 땡볕 아래서 점심을 준비하는 도우미를 자청하시고, 시위가 한창인 현장에서는 최루 가스에 눈물콧물이 범벅이 되고 기침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젊은 경찰도 달래고 학생도 달래며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대구백화점 앞, 검찰청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눈물로 호소하며 시위하는 어머님의 모습을 보는 시민들은 똑똑한 자식들 유급 때문에 지나치게 앞장서는 치맛바람으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저는 어머님을 비롯한 열성적인 어머님들의 자식사랑은 자기새끼만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나라 한의학에 대한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늘 고마움과 죄송스러운 마음이 교차하였고, 민족의학의 무한한 가능성에 가슴 아파하는 마음에 보답하지 못하는 교수로서 마음이 편치 않았답니다.

    학생들의 유급을 막기 위하여 전국의 학부모들과 함께 버스를 대절하여 서울집회에 참여하면서 경찰 정보과 형사를 따돌리고 한강철교 난간에 올라 절규하고, 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서 구치소에 잡혀 들어가서도 ‘한의학 수호’를 외치면서 당당하셨던 배짱이 그리워집니다.

    한의전 구경 한번 시켜드리고 싶은 어머님!

    저는 2008년 9월 부산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에 부임하였답니다. 벌써 2년이 넘었네요. 연고도 없는 양산과의 인연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기에, 갑작스레 옮기고 아직까지 익숙하지는 않답니다. 애들 교육 때문에 저 혼자 머무는 숙소에서 밤늦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어떠한 인연으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날이 있답니다.

    문득, 어머님의 안부가 궁금하여 옛일을 돌이켜 보면서 우리 한의전도 한약분쟁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약분쟁 당시 한의계에서 정부에 요구하였던 복지부내 ‘한의약정책관실’ 설치, ‘한약사’ 및 ‘한약학과’ 신설, 국립 ‘한의학연구소’ 건립, ‘공중보건의’ 및 ‘군의관’ 확대, ‘국립대 한의대’ 설립 등 수많은 일들이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서울대 한의대는 아니지만, 부산대학교에 한의학전문대학원이 2008년에 설립됨으로써,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동제의학교(同濟醫學校)’가 강제로 문을 닫은 지 100년만에 한의학 고등교육기관이 국립대학에 부활한 셈이랍니다. 이 역사적인 장소에서 한약분쟁의 생생한 현장을 학생들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4년의 분쟁기간 동안 학생들 특히 학생회와 고락을 같이 하면서 ‘국민건강권 및 민족의학 수호’라는 구호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며 학부모들에게 한의대 명예학생의 자격을 줘야한다는 농담을 할 정도로 자연스레 투쟁으로 다져진 한의대 학생다워졌던 여러 부모님들이 생각납니다.

    물론 직접 나서지 않으시면서 묵묵히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우리 한의학을 든든하게 지원하셨던 직접 뵙지 못한 부모님들의 인연도 생각하게 됩니다. 7년만에 한의대를 졸업한 당시의 학생들이 이제는 한의원의 원장이 되었을텐데, 부모님들은 자녀들 덕을 좀 보고 계시는 지, 아니면 여전히 경쟁이 치열한 의료시장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자식들 걱정만 하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때 열정적으로 만났던 부모님들끼리 요즈음도 간간히 소식을 전하고 계시는지요?

    한약분쟁이 끝난 이후로도 학부모협의회는 각 대학의 열악한 교육환경 개선을 위하여 대학에 건의하는 노력도 마다 않으셨고, 대한한의사협회 회관 건립에도 동참하여 성금을 전달한 기사도 보았답니다.

    한의학이 제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초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자들이 많아야 한다며 장학금도 전달하고, 정치적 역량을 키워야 한다며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비롯하여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 선거까지 염두에 두고 정당에 가입하여 정치활동까지 이어간 부모님들께는 존경과 함께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일단락 지으셨겠지요? 하지만, 마음 속 깊이 새겨진 우리 한의학에 대한 애정은 여전하실 것이며, 단순한 열정이 아니라 먼 훗날을 위한 염원으로 남아 있으시리라 짐작합니다.

    조카뻘 되는 젊은 교수를 자식처럼 아껴주셨던 어머님!

    돌이켜 보면, 그 당시 저는 조교생활을 막 끝내고 모교의 전임강사로 발령을 받은 지 1년밖에 안된 신참교수였는데 한의예과 학과장을 맡았던 해입니다. 93년 3월5일 삼성산 겨울의 찬바람이 다 물러가지 않은 추운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막 마친 신입생들을 모아놓은 예과 2학년 강의실에서 한약분쟁에 대한 ‘강방’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한의예과 학과장을 93년부터 2년동안 맡으면서, 공부할 사람은 학자가 되어 한의학을 발전시키고, 데모할 사람은 데모를 통하여 한의학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학생들을 설득하느라 재단편(?) 어용교수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였답니다.

    한의예과 학과장을 마치면 연구실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완결되지 않은 문제들로 인하여 95년부터 다시 시작된 분쟁에서는 본과 학과장을 맡아 96년까지 학생 지도에 나섰답니다. 그 와중에 태어난 딸아이와 아들이 벌써 고2, 중2가 되었으니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느낍니다. 그러고 보니 저뿐 아니라,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는 하지 않고 데모만 하는 철부지로 알고 걱정하였던 어머님의 아들이 이제는 벌써 중년이 되고 한의계의 중견이 되었으니 세월의 무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한약분쟁의 인연으로 끝나지 않고 학생들과 마찰로 갈등이 생겼을 때 가슴 아파하시며 저에 대한 지난 이야기로 학생회를 설득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송구스러움이 가득하였답니다.

    돌이켜 보면 학창시절 롤 모델이 되는 교수상도 제대로 없는 상태에서 단지 후배들은 중국책으로 공부하지 않고 한글로 번역된 교재로 공부하면 중의학을 뛰어 넘을 수 있겠다는 단순한 동기 때문에 대학에 남아서 교수다운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는 생각을 할 때면 지난 시간들에 미안함만 가득합니다. 빚도 제대로 갚지 못한 채 훌쩍 떠나온 모교의 후배교수들이나 제자들께는 더 큰 보답을 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채무를 지고 있답니다.

    서울에서 지내다 P원장이 대구에 한의원을 개원할 때 개원기념패를 전하러 들렀던 한의원도 여전한지 궁금합니다. 훌쩍 떠나오느라 전화도 드리지 못하고 낯선 곳에 적응하느라 변변히 안부도 여쭙지 못한 미안함을 면해보고자 편지를 드립니다.

    아련한 기억만으로 불쑥 글 드리는 과정에 비록 예의를 제대로 못 갖추었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리라 믿으며, 당시의 한의학에 대한 열정을 추억하며 늦가을 단풍의 빨간 아름다움을 마음으로 전해 봅니다.고맙습니다.

    금정산의 울긋불긋한 단풍이 내려다 보이는 양산캠퍼스 연구실에서 권영규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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