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일 교수의 儒醫列傳 151

기사입력 2010.08.31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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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종의 건강을 위해 내의원도제조로 봉사한 儒醫

    김창집은 조선시대 붕당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한 많은 삶을 살았던 지식인이었다.

    경종 2년 거제도로 유배된 후 사사되어 최후를 맞게 된 불운한 인물이었다.
    1684년에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후로 정언·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1689년 기사환국 때에는 아버지가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사되어 장례를 치르고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706년에는 우의정에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벼슬이 오르게 되었다. 1717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고, 숙종이 죽은 뒤 경종이 즉위한 후에도 영의정으로 정사를 돌받다. 그러나 이 시기 당쟁에 휘말려 결국 신임사화가 일어나 거제도에 위리안치돼 이듬해 성주에서 사사되고 말았다.

    김창집은 경종년간에 내의원도제조(內醫院都提調)로 궁중의 의약 관련 업무를 관장한다. 『승정원일기』의 경종원년(1720년)의 기록에 나오는 내의원도제조인 김창집의 활동은 놀랍다.

    6월20일에는 경종이 口渴의 증상이 심하여 우려할 정도로 물을 많이 마시고 있었기에 覆盆子茶의 복용을 권유하고 있고, 8월13일에는 경종이 자신의 몸에 대해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고 있자 충언을 하면서 경종의 脚部酸疼에 三里穴에 뜸을 떠서 치료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10월1일에는 경종의 질병과 인원왕후의 병세를 논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인원황후는 여름 초부터 더위를 먹어서 加味生脈散을 복용하도록 하였고, 경종은 이 무렵 두통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기에 養血淸火湯合小調中湯을 처방하고 있다.

    비록 반대파가 득세하는 시기에 내의원도제조를 하고 있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임금의 질환의 치료를 위해 봉사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김창집의 ‘후자경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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