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東醫寶鑑』 유네스코 기록유산등재에 즈음하여
청산되어야 할 의식의 잔재들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경험들은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긍정적 요소들로 작용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삶을 외골수로 몰고 갈 수도 있다. 『東醫寶鑑』이 경험한 삶도 우리 삶만큼 고통과 슬픔의 질곡이었다. 우리는 이 마당에 왜곡되어 온 『東醫寶鑑』에 대한 잘못된 인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지금이 바로 이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본다.
먼저, 우리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굴레 가운데 하나, 『東醫寶鑑』이 중국책만 베껴 놓은 표절 서적의 대명사로 여기는 인식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게 된 데에는 이 책을 문자로서만 이해하고 그 체계의 독창성과 내용의 창조성 등을 놓치고 바라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단순히 기존 의서를 짜깁기한 것으로 끝났다면 중국, 일본, 베트남 같은 외국에서 이 책을 구하려고 열광한 것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東醫寶鑑』이 추구했던 것은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 의학지식의 카테고리 안에서 새로운 의학체계를 제시하는 것이었지 중국의학을 요리조리 베껴서 표절 의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근대 이전에 『東醫寶鑑』을 중국 의서의 아류로 생각했던 적이 없었음에도 현재 이와 같은 인식이 존재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는 앞으로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필자가 한번 생각해 봄직하다고 보는 것 중의 하나는 일제시대부터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과학의 탈을 쓴 일본의 한방의학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고, 또 다른 것은 오랜 기간 지속된 한의학의 소외로 인한 고전 의서에 대한 불신적 분위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다음으로, 400년이나 된 의서에 왜 아직까지 집착하고 있느냐는 인식이다. 아마도 『東醫寶鑑』이 400년 전의 건강코드에 맞추어진 책이기에 현대에 맞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東醫寶鑑』을 과거의 유산으로만 여기고 400년간의 한의학의 역사를 停滯的 시각에서 바라보는 왜곡된 역사관을 바탕으로 한다. 『東醫寶鑑』이 현대 한의학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된 데에는 400년간의 진화과정을 통해 역사 속에 內在化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東醫寶鑑』은 수없는 건전한 논쟁을 통해 비판되면서 활용도가 높은 새로운 의서들과 신연구 성과에 의해 계속 진화되어 왔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 한의계가 이루어낸 연구 성과는 『東醫寶鑑』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계승을 통한 진화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지 4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의서에 대한 부정을 통한 과학화의 과정으로 이루어낸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400년 전의 『東醫寶鑑』을 극복함으로서 현재의 발전을 이루어서 낼 수 있었다고 본다면 이것은 지난 400년간의 노력을 일거에 부정하고 최근 100여년간의 역사만을 비과학적 한의학을 일소하면서 과학적 한의학을 만들어낸 과거의 청산기로 보는 역사의 왜곡이 되는 것이다. 이 점도 한번 깊이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東醫寶鑑』의 비과학적 요소를 들어 이 책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도 한번 돌아보아야 할 태도이다. 투명인간이 되는 법, 귀신을 만나는 법 등을 예로 들어 『東醫寶鑑』을 비과학적 서적으로 몰면서 이를 확대시켜 한의학을 의학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공중파 프로그램에서 이를 과학적으로 검증한다고 시연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요소들을 검증하여 『東醫寶鑑』의 일부 내용의 비과학성을 밝혀줄지는 몰라도 이러한 태도는 매우 비학술적 태도이다.
『東醫寶鑑』에 대한 인문사회, 문화인류학적 고찰없이 과학이라는 잣대로만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하나의 사실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방면의 학술적 기준이 필요하며 다양한 전문가의 자문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자신의 무지한 단편적 과학론만으로 이와 같은 문화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내용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조상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이 책 이외의 의서에 투명인간이 되는 법, 귀신을 만나는 법 등의 내용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이 책의 넓은 포용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대부분 雜病篇의 雜方門에 등장하며 雜方門을 집필하게 된 것은 전쟁, 기아, 도적 등으로 인해 산 속 깊은 곳에서 생존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 백성들에게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선의 지식을 찾아서 적어놓기 위해서였다.
의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백과사전적으로 의미가 있는 지식들까지 포괄하고자 한 허준의 고심에 초점을 맞추어 볼 일이지 이것을 과학이라는 잣대로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방법들이 기재된 것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이는 것들 중의 하나로 보아야 하는 것이지 이 책의 비과학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문화사적인 측면에서 흥미로운 연구 테마가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