醫史學으로 읽는 近現代 韓醫學 65

기사입력 2009.07.2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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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인터넷 매체에 떠 있는 알렌에 관한 글로 인하여 한의사 사회는 격량에 휩싸였다. 특히 그와 관계된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과 관련한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논란이 더욱 거세지고 있다.

    논란이 된 것은 그 글의 제목과 갑신정변이 일어난 그날 밤 알렌과 알렌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조선인들에 대한 사항이다. 이 사건에 왜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가는 한번 되짚어 볼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먼저 밝힐 것은 이 글을 쓰는 필자는 알렌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기에 정확한 판단이 요구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보다 깊은 연구가 진행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고 필자가 한번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을 제시하여 관심있는 독자들과 정보를 공유해 볼까 한다.

    일전에 필자가 의사학으로 읽는 근현대 한의학 7, 8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알렌이 그 다음날 일기에 언급한 한의사와 관련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멜렌도로프 집에 당도해 보니 중상자의 상태는 피범벅이 된 끔찍한 상태였다. 나의 당당한(영웅적인) 치료에 대해 敵意를 품고 있는(반대하는) 14人의 조선인 의사들(漢醫)이 옆에서 지켜보았다.(I found the patient in a horrible condition all blood and gore and attened by fourteen Corean doctors who made great objection to my heroic measures.)”

    본인은 작년에 이 글을 쓰면서 몇가지 의견을 제시했는데, 알렌이 14인이라는 사람 숫자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가 장소의 크기를 헤아려 14인의 조선인을 불러들여 참관하도록 말하였기 때문이고 옆에 서있었던 한의사(이것은 순전히 알렌이 보았을 때 한의사)가 알렌의 치료에 대해 동의하는 태도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 중의 하나로 조선 전통의 외과술의 잣대로 보아 알렌의 의술이 뛰어나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한 것이 기억난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한번 고찰해볼 문제가 몇가지 있다고 본다. 이것들은 깊이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사안들이다.

    첫째, 이 때 알렌을 둘러싸고 서 있었던 14인의 조선인이 과연 알렌의 말대로 한의사들이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이들이 한의사들이었다는 것은 순전히 알렌의 개인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수많은 한의사들이 어떻게 기별을 받고 독일공관까지 너도나도 뛰어와서 민영익을 기다렸겠는가하는 의문이다. 이런 숫자라면 서울 장안에서 활동한 이름있는 한의사들이 모조리 불려왔다는 것인데 도무지 말이 안 된다. 통신체계도 전혀 구비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 정도 규모의 한의사들이 모였다면 이 때 이 자리에 있었던 한의사 중 이름이 있었던 인물이 다른 자료에라도 어딘가에 한명 정도는 언급될만한데 전혀 그런 기록이 안 보인다. 아마도 알렌이 자신의 치료술을 과장하기 위해서 주위에 모인 조선인들을 한의사라고 일방적으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떤 연구자의 글에 “부상당한 민영익을 두고 한의사들은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고, 결국 서양의사 알렌에게 왕진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지나친 억측이다. 『알렌의 일기』를 살펴보면 이런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그 연구자의 개인적인 판단이라고 보인다.

    둘째, 알렌 한사람의 능력으로 한의학이 서양의학에 굴복하게 되어 제중원 설립이 가능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사항에 대해서는 앞으로 보다 깊은 논의가 있어야 하겠지만, 민영익과 고종이 한의학을 부정하고 서양의학만 추종하였다고 볼만한 근거가 없다는 점을 들고 싶다. 만약 민영익과 고종이 그러하다면 당시 활동했던 한의사들이 이러한 사실에 위기를 느끼고 제중원의 설립에 반대했을 것임에도 1885년 1월27일자 『알렌의 일기』에는 한의사들이 제중원의 설립안에 찬성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민영익)를 비롯하여 모든 조선 친구들, 심지어 조선 한의사들까지도 나의 병원건설안에 찬동했다.”(김원모,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 출판국, 1991, 51쪽) 그리고 고종과 민영익은 한의학을 말살하려는 정책을 펼친 바가 한번도 없다.

    셋째, 민영익을 살린 것이 오직 알렌의 치료술뿐인가는 것이다.
    오히려 민영익이 복용한 한약 때문에 완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알렌의 한약에 대한 불신은 그의 일기 1월11일자에 나온다. “민영익은 한약 복용을 금지하는 내 처방을 무시하고 그의 친구가 주는 고려인삼을 복용했기 때문에 병세가 악화되었다.”(『알렌의 일기』, 47쪽) 이것은 알렌이 한의학에 대해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알렌이 보기에 민영익의 치료가 더딘 것은 그가 한약을 복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한약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양의사의 멘트가 나오는 드라마 뉴하트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같은 해에 2월12일자 『알렌의 일기』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오늘 나는 놀랍게도 민영익의 상처가 아물었다가 또 다시 상처가 부르트고 재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같이 상처가 악화된 주원인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부인들의 병간호가 주원인인 것 같았다.” 이것은 민영익의 치료가 더딘 것이 한약 때문이 아니라 부인들의 잘못된 병간호(알렌이 어떤 의미를 전달하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치료술을 과장하고 치료효과가 더딘 것의 구실을 찾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로 인한다고 알렌 스스로 자인하는 기록이다.
    당시 한의학에 대한 편견은 당시 서양인들의 기록 여기저기에 나온다. “조선 사람들은 병이 악마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국 의사에게 자리를 빼앗긴 본토 의사의 악의에 찬 선동이 민중에 끼치는 영향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가증스러운 것이다”(알렌, 『조선견문기』), “한국의 민간 의료는 미신적인 요소가 많다. 한국인들은 모든 병은 악한 별이 진노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믿는다.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친척이 냉수로 목욕하고 자정에 별을 향해 빌어야 한다”(W. Kobelt. 이지은의 『왜곡된 한국, 외로운 한국』에서 재인용), “원주민 의사들이 행하는 미신과 무당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러한 어려움이 생기지만, 우리 의사들(서양의사)의 능력과 선행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서 양약에 대한 반대와 미신은 사라질 것이다”(G.W. 길모어, 『서울풍물지』). 판단은 독자 스스로에게 맡긴다.

    넷째, 조선의 한의사들이 알렌 정도의 봉합술을 구사하지 못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자료가 많이 수집되어 있으므로 앞으로 본격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으로 본다.

    한마디만 한다면 고려시대 『鄕藥救急方』에서부터 봉합술에 대한 기록이 나오며 『鄕藥集成方』, 『醫方類聚』,『東醫寶鑑』, 『增補山林經濟』 등 수많은 서적에서 봉합술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한의학에서 옛날부터 사용되었던 봉합술이 전승되어 오다가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그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다면, 한의사들이 옛 것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고전 봉합술을 현대화시켜 활용해도 의료법상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도 성립된다.

    이것은 (알렌의 봉합술이) “전에 종기나 째던 한의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르게 해부학 지식을 이용한 치료법을 시행했던 것, 인체 구조를 정확하게 이해한 이러한 외과 치료는 당시 사람은 상상도 못했던 의술이었다”라는 문제의 글 때문만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한의학의 외과술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한의학의 외과술 특히 봉합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집중적으로 다시 한번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지면 관계상 다음을 기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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