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지연 원장

기사입력 2010.10.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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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터~ 영어할 줄 알아요?
    개원가 일기

    “Do you speak English?” “아! 네…아주 조금…”
    영어학원이 아니라 진료실에서 들리는 이야기이다.

    우리 병원은 정부의 외국인 복지정책의 일환으로 외국인들에게 무료로 침과 뜸 등의 한방진료를 할 수 있는 곳이라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방진료를 받으러 많이 온다. 진료를 받는 외국인들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일을 한지 오래 되어서 한국말을 곧잘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통역을 해 줄 수 있는 동료 없이는 나와 눈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어야 할 정도로 한국말을 아예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나마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는 초등학교 수준의 영어단어와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이끌어갈 수는 있는데, 약간 영어로 대화가 되는 것 같으면 속사포처럼 영어문장을 쏟아놓아서 초등학교 영어수준을 가진 나로서는 해석하랴 진료하랴 정신이 쏙 빠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외국인들 중에는 무료 진료라는 것을 알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그 사실을 모르고 오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느 날은 영어를 유창하게 하시는 나이든 외국인 한 분이 진료를 받으셨다.

    물론 나는 영어와 몸짓을 함께 써 가며 힘들게 진료를 끝낸 상태였는데 갑자기 그 분이 다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시는 것이었다. 건장한 체격인데다 진료실을 나갔다 갑자기 다시 들어오신 상황이라 간호사들이 막을 겨를조차 없어서 솔직히 많이 놀란 상태였는데, 그 분이 온화한 미소를 보이면서 나에게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미는 것이었다. 놀라기도 하고 이 상황에서 사용할 영어문장이 생각나지 않아서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는 나에게 선생님이 돈을 안 받아서 나갔다 다시 왔고 선생님은 진료를 하면 돈을 받아야 한다면서 손에 지폐를 쥐어주시는 것이었다.

    나는 진료는 무료이니 그냥 가시면 된다고 했지만, 나의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못 알아들으셨는지 똑같은 말씀만 계속 하시고 그냥 가버리셨다. 물론 다음 진료시간에 다시 돈을 돌려드리기는 했지만, 생각해주시는 마음에 감사했다.

    이렇게 병원에서 외국인들을 진료한 경험이 유용할 때가 있는데, 바로 이주여성센터에서 외국인 여성들에게 의료봉사를 할 때이다. 대한여한의사회에서 정기적으로 한국에 있는 외국인 여성들에게 의료봉사를 하고 있어서 나도 가능하면 의료봉사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부분 한국으로 시집을 온 외국 여성들이 아이들과 함께 오는데, 쉼터라는 곳에서 단체로 사람들이 와서 진료를 받기도 한다. 쉼터는 가정폭력으로 상처받은 외국인 여성들이 가정을 떠나 머무는 곳인데 이 곳에서 진료를 받으러 온 사람들 중에는 남편에게 머리를 지속적으로 맞은 후로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사람, 남편에게 맞은 손목이 붓고 틀어져서 아프다고 하거나 맞은 충격으로 잠을 잘 못자고 불안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진료하면서 마음이 더 아프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의료봉사를 하고 있는데, 의료봉사에 처음 오신 한 원장님이 자기는 외국인들 말을 도대체 못 알아듣겠는데 나는 어쩌면 그렇게 잘 알아듣냐고 나에게 물어보셨다. 내가 평소에 외국인들 진료를 해서 처음 오신 한의사분들보다는 잘 알아듣기도 하겠지만 이제는 손짓, 발짓마저 자연스러워졌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 웃음이 나왔다.

    우리 병원에는 외국인 아이들도 많이 오는데 그 중에 검은 피부에 호수처럼 맑고 큰 눈을 가진 자카리아라는 아이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자카리아는 처음 진료실에 들어올 때 엄마치마를 붙잡은 채 엄마 뒤에 숨어서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엄마는 아이가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했는데 아무리 물어봐도 대답도 없고 고개짓도 안하고 계속 그 큰 눈만 깜빡거린채 진료를 받았다.

    그 후에는 만나면 큰 눈을 깜빡이며 반갑다고 눈인사는 하는데 이상하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은 대기실에서 한 남자 아이가 너무 재미있게 웃으며 엄마에게 얘기를 하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봤더니 자카리아가 유창한 한국말로 엄마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워낙 진료를 받을 때 말이 없는 아이라 이 정도로 한국말을 잘 하는지 몰랐던 나는 너무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서운한 마음과 함께 낯선 나라의 사람들에게 마음을 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일인가 하는 생각에 측은한 마음도 생겼다. 그 후로도 자카리아와 나의 침묵 진료는 계속 되었는데 만난지 수개월이 지난 어느 날 진료가 끝나고 나갔던 자카리아가 엄마와 함께 다시 들어오더니 “감사합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처음 말을 뗀 아이를 본 엄마처럼 자카리아에게 달려가서 꼭 안아버렸다. 지금은 엄마, 아빠와 함께 방글라데시로 돌아갔는데 마지막 진료를 받는 날은 고맙게도 “안녕히 계세요”라고 인사를 해주었다. 자카리아야~ 잘 지내고 있지?

    병원에서 외국인들과 만나면서 고된 업무와 낯선 나라에서의 생활에 힘겨워 하는 외국인들에게 측은지심이 생기기도 하고, 이제는 친해져서 서툰 한국말로 나에게 남편 흉을 볼 정도로 정이 든 사람들도 생겼다.

    병원에서 무료진료를 받은 외국인들 중에는 진료를 받은 후에 진료실 앞에서 기다렸다가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다. 내가 의료봉사를 한 게 아니라서 미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무료진료를 통해서 한국에 대해 좋은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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