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셉션, 프로이트의 제자들
영화 ‘인셉션’은 의식과 무의식, 꿈의 해석이라는 프로이트적 심리치료와, 삶 자체가 꿈인가 생시인가라는 의문부호가 핵심이다. 줄거리는 이렇게 전개된다.
남의 꿈에 접속해 생각을 훔치는 주인공인 코브가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도망다니다 사이토라는 사람을 만난다. 사이토는 라이벌 기업 후계자의 생각을 바꿔달라는 제안을 한다. 물론 여기에는 그의 죄를 없애준다는 엄청난 보상이 따르게 된다. 드림머신이라는 기계로 연결된 사람들이 꿈을 공유하고, 타인의 꿈을 설계하며, 꿈을 통해 생각을 의식화하는 과정이 블록버스터로 버무려져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줄거리를 관통하는 핵심은 역시 인셉션이다.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읽고, 그것에 진입해 타인의 생각을 변화시키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인셉션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은 후계자인 피셔가 아버지의 금고를 열어 바람개비를 확인하는 장면이다. 금고에는 피셔가 어려워했고 두려워했던 아버지와 자신과의 애정을 증명하는 바람개비가 들어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상속유언이 들어있으리라 예상했던 곳에서 아버지와 자기가 같이 만든 아버지의 애정을 만나면서 아버지와 화해한다. 잊혀진 바람개비의 기억을 통해 스스로에게 무의식의 의식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프로이트 심리치료의 교범에 가깝다.
프로이트, ‘꿈은 무의식에의 왕도’
프로이트의 심리치료는 간단하게 말하면 이렇다. 마음은 크게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고 의식은 ‘현실사회에 적응해서 일상을 살아가는 의식할 수 있는 나’, ‘내가 알고 있는 나’이다. 무의식은 내가 모르는 나이며 ‘근원적이고 뿌리 깊은 연대기적인 나’이다.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에의 왕도’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잠들고 있을 때, 의식의 힘이 가장 느슨해져 있을 때 꿈을 꾼다고 생각했으며, 이성의 지배에서 해제된 무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인셉션의 줄거리는 이런 무의식의 지층을 뚫고 들어가는 과정이다. 꿈 속의 꿈, 그 속의 꿈은 시간의 지층을 열고 들어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프로이트가 제기한 무의식은 ‘어린 시절의 교육에 의해 그 사람의 장래가 결정된다’고 강조하고 마음이나 마음의 병의 원인을 어린 시절로 되돌려서 탐색한다.
이것을 ‘환원주의’라고 말하여 자신의 무의식에 대해서 아는 일을 ‘무의식의 의식화’라 한다. 이 의식화를 통해서 아버지에 대한 공포와 원망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의식화된 자아가 현실에 적응하는 유연한 작용을 하게 되고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으로 마음의 병이 치료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마지막 장면이다. 꿈과 현실의 경계인 팽이가 쓰러질듯 말듯하며 결말을 내리기 때문이다. 현실과 꿈 사이의 경계를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이토라는 일본인을 내세우면서 동양적 사유를 버무린다.
현실에 휩쓸려 영혼을 잠들게 하지마라
꿈 속의 꿈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마지막 종언이다. “이슬로 태어나 이슬로 사라지는 내 운명이로다. 오사카의 영화는 꿈 속에 꿈이던가.” 일본과 조선의 수많은 백성을 전쟁의 고통으로 이끌던 권력욕의 화신치고는 아이러니한 말이다.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수많은 전쟁과 투쟁으로 얻었던 권력이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다는 분명한 깨달음이며 현실과 꿈의 경계가 어디있는지 묻는 허망함이다.
그의 전임자였던 오다 노부나가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만찬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인생은 덧없는 꿈, 태어나서 죽지 않는 자 그 어디 있으랴” 도쿠가와의 대답은 좀 더 현실적이다. “서쪽은 십만억토로 아득하고 먼 세상이지만 이 곳 역시 내가 사는 불국의 나라다.” 일본 전국시대를 풍미한 세 사람 모두 비슷한 철학을 공유한 것이다.
채근담은 관념적이지만 관조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고요한 밤, 종소리가 꿈 속의 꿈을 깨라고 부른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불교적 관점이다. 불교에서 일체가 고요한 가운데서 마음의 바탕을 깨우치면 삶이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키는 것이다.
꿈에서 울다가 일어나면 그만큼 허망한 것은 없다. 삶이 꿈이므로 깨어서 나를 관찰하는 것이 깨달음의 말 그 자체이다. 부처라는 말도 바로 대각자 즉, 크게 깨어있는 자일 뿐인 것이다. 기독교의 가르침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이다. 현실은 꿈에 불과하므로 깨어서 현실에 휩쓸려 영혼을 잠들게 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헤르만 헷세의 소설 싯다르타의 삶을 보는 관점은 좀 더 현실적인 해석이다. 싯다르타는 자신의 영혼을 왜가리와 들개의 몸속, 짐승, 돌속으로 들어가 머물러 보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은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나고 죽는 삶이 꿈 속의 꿈처럼 전개되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인셉션에서 보여주는 심리학적인 줄거리는 꿈에 대한 동서양의 관점 차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서양은 몸과 마음이 구별되어 나타난다고 보고 꿈을 무의식이라 보며 마음 그 자체로 분석한다. 한의학의 해석은 어떨까? 음양은 이렇게 분석한다. 낮은 양으로 음인 육체가 깨어나고 밤은 음이므로 양인 영혼이 깨어나 자유롭게 활동한다고 정의한다. 낮에 깨어난 의식은 영혼이 맑은 하늘 끝이라면 구름이 드리워진 것이라 의미를 부여한다.
꿈에 대한 한의학적 관점은 몸과 마음이 일치하며 혼백이 사물과 작용하여 생긴다라고 생각한다. 혼백을 설명하면 이렇다. 혼은 간에서 만들어지고 백은 폐에서 만들어지는 정신의 일부다.
혼백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음양의 관점으로 설명해야 한다. 하늘은 양이고 땅은 음이다. 인간은 땅과 하늘이 합해서 만든 음양의 혼합체다. 인간의 육신은 흙의 일부로 땅이며 음이다. 정신은 빛나는 태양으로 양이다. 죽으면 육체는 고향인 땅으로 돌아가 썩고 정신은 고향인 하늘로 돌아간다. 정신은 영혼으로 대표되며 영(靈)은 양이며 혼은 음이다. 영도 묶어지는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이 영을 엮어주는 실체가 혼이라는 것이다. 육체도 육신은 모두 유기물의 합성체이며 하나의 모습을 이루어 엮어주는 실체가 바로 백(魄)이다. 백은 넋이며 땅에 묻혀서 조화의 에너지를 발한다. 사람이 죽으면 옷을 들고 지붕에 올라가 하늘을 보며 초혼제를 하는 것도 바로 혼이 하늘로 가기에 부르는 것이다.
오장육부 신체적 허실이 꿈을 좌우
‘동의보감’은 꿈의 해석에서 이런 몸과 마음의 입장을 대변한다. “간의 기운이 실하면 성내는 꿈을 꾸고 간기가 허하면 버섯이나 산의 풀이 보인다…”라고 하여 오장육부라는 신체적 허실이 꿈을 좌우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몽유병이나 정신질환에 많이 쓰이는 약은 용골과 모려라는 약이다. 이 조문을 보면 그 해석은 더욱 심신일치의 관점을 보여준다. 心, 神, 慮 모두는 돌아가고 의지해야할 집이 있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정(精)이다. 정을 만들고 보존하는 약이 바로 용골과 모려라고 말했다. 정은 육체에서 사용하는 에너지가 고도로 집적된 물질이다. 이런 점을 보면 정신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육체는 서로 소통하면서 조화할 따름이라는 생각은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