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前 WHO WPRO 전통의학 고문
- 한국한의학표준연구원장
“제네바의 봄은 ICTM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ICTM Project회의 참석보고
필자는 지난 3월 22일부터 24일까지 제네바의 WHO본부에서 열린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Traditional Medicine (ICTM: 전통의학 국제분류)의 개발을 위한 비공식 전문가회의(Informal Consultation on the ICTM Project Plan)에 참석하였다. ICTM은 필자가 WHO/WPRO(세계보건기구 서태평양지역 사무처)에 근무하던 2005년에 시작한 project였는데, 2015년부터 이용될 ICD-11에 편입되는 것을 목표로 본부의 ICD 담당부서에서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마지막 날, 참석자들의 마무리 발언시간에도 필자가 소회를 피력하였지만, 이제 본부에서 착수할 ICTM은 2005년에 WPRO에서 시작한 것이고, 또 ICTM은 WPRO에서 개발한 International Standard Terminology(IST)가 없었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사업이다. 표준 용어(terminology) 없이 질병분류 (Classification of disease)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갖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IST를 개발하고 이어 ICTM에 착수했던 것은 필자로서 크나큰 보람이자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이 5년 전에 마닐라에서 꾸었던 꿈이 이제 제네바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이번 회의에 WHO직원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전문가로 참석하는 필자의 감회는 색달랐다. 무엇보다도, 예전에는 국제기구에 소속된 公人으로서의 책임감과 공정성 그리고 주어진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서 무한 수준에 가까운 인내가 요구되었지만, 지금은 한 나라를 대표하여 부담 없이 발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3월22일 ICTM은 WHO의 이례적인 프로젝트
첫날 오전의 회의는 말 그대로 비공식적으로 진행되었는데, 개회사나 축사 심지어 의례적인 단체사진 촬영도 없이 참석자간의 소개로부터 시작하였다. ICTM이 2014년 World Health Assembly(WHA: 세계보건총회)를 통과하고 2015년 ICD-11의 한 chapter로 정식 출범할 때까지 앞으로 5년간 같이 지내야 할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물론 이미 참석자들 절반 이상이 구면이지만, 심기일전하여 새로운 분위기로 가는 것이다. 참석자들의 좌석도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은 대로 가서 앉았다.
회의의 주관자인 Dr Ustun(WHO/HQ Coordinator, Classifications, Terminologies, and Standards)의 제안으로 참석자들은 자기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참석자들 사이에 임의로 짝을 지어 그 짝을 소개하였다. 좀 어색하기는 하였지만, 다른 참석자들을 조금이나마 더 심층적으로 알 수 있는 기회였고, 또 어떤 면에서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했다. 필자는 옆자리에 앉은 Dr Syed와 같이 서로를 소개하기로 하였다.
그는 2005년 필자가 WPRO에서 개최한 쓰꾸바회의에 참석했던 SNOMED측의 전문가였다. 파키스탄 출신이지만, 영국에서 의학교육을 받고 영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근년에는 미국의학협회의 의료정보 분야 전문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참석자 소개를 마치고 Dr Ustun은 ICTM Project Plan에 대해 설명하였다. 비록 비공식회의이긴 하지만, 이번 회의는 WHO본부의 HIS/CTS, HDS/TRM과 EMP/QSM의 세 분과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매우 이례적인 프로젝트임을 강조하였다.
그런 다음 참석자들은 수일 전 이메일로 미리 제시되었던 숙제를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참석자 전원은 ICTM과 관련하여 6가지의 질문을 받았고, 그에 대해 10분 이내로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 질문은 ‘1. 전통의학 분야에서 표준용어의 용도는 무엇인가? 2. 전통의학 분야에서 표준질병분류의 용도는 무엇인가? 3. 전통의학 분야에서 어떤 통계자료를 수집해야 하는가? 4. ICTM 프로젝트의 이점은 무엇인가? 5. ICTM 프로젝트와 프로젝트 계획에 대한 귀하의 질문은 무엇인가? 6. ICTM 프로젝트와 그 계획에 대한 귀하의 제안은 무엇인가?’였다. 필자는 참석자 중에서 가장 먼저 발표하였는데, 그 과정에 대한한의사협회에서 발간한 KCD-OM3 책자도 소개하였다. Dr Ustun은 KCD-OM3가 매우 실용적이고 실질적이라고 하였으며, 덧붙여서 양방병명과 한방증명을 병기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렇게 되면 ICTM의 훌륭한 샘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온톨로지에 기초한 질병분류를 만든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전통의학을 WHO-Family of International Classifications(WHO-FIC)에 끼워 넣을 것인가에 대한 주최측의 발표에 이어 토의를 하였다.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Dr Ustun이 ICTM Project Plan에 대해 설명을 하고 전문가들로부터 의견을 들었는데, 주요한 이슈는 계획하고 있는 작업의 실현가능성에 관한 것이었고, 세계의 전통의학 가운데에서는 한국·중국·일본의 전통의학을 우선적으로 할 것임을 확인하였다.
WPRO에서 만들었던 IST가 한·중·일 세 나라가 제안했던 분량의 교집합이라면, 앞으로 만들어질 ICTM은 훨씬 더 커진 합집합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자면 우선 당장 세 나라 사이에 경쟁이나 갈등은 없겠지만, 전체의 量이 어느 정도가 될 것이며 그럼으로 해서 質이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지는 않을지 염려가 되기도 했다. 6시가 다 되어 회의를 마치고 참석자들은 Dr Ustun의 초청으로 WHO본부 북쪽 마을 Grand Saconnex에 있는 레스토랑 Cafe du Raisen에서 만찬을 하였다.
** 3월23일 전통의학 치료방법 모델 소개
둘째날 오전에는 전통의학의 병명/證명과 intervention (치료방법)을 포함하는 content model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가 있었다.
이번 회의의 준비 과정에 일본 게이오의대의 외과의사인 이마주 박사가 5개월간 제네바본부에 주재하면서 참여하였는데, 그동안 그가 만든 content model을 소개하였다. 물론 그가 발표했던 내용은 한국 한의대의 본과 2학년정도 수준이었지만, 전통의학에 밝지 않은 서양인들에게는 그럴 듯하게 보이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정부 주도로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으며, 그에 비해 열등한 수준의 전통의학을 가지고 있는 일본은 정부와 협회가 혼연일체로 재정 지원을 하면서 이 흐름에서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한 그들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 ICTM 범주는 한·중·일 전통의학으로 제한
계속된 content model에 대한 논의에서, 그 내용이 전통의학의 지식에 적절한지, 혹시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들이 다루어졌다.
Intervention에 대해서는 중국측이 적극적인 반면, 일본측은 매우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마치 과거에 WPRO에서 전통의학의 임상진료지침(Clinical Practice Guideline)을 만들 때 보여 주였던 양국의 반응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에는 한약처방, 침구치료와 수기치료 등이 포함되는데, 관건은 어느 수준까지 다룰 것인가로 보아야 한다.
오후 회의에서는 ICTM의 범주가 한·중·일 3국의 전통의학으로 제한될 것임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였다. 세계적으로 다양한 전통의학이 있지만, 2015년에 출범하는 ICD-11에는 한·중·일 3국만 참여하게 된다. 인도나 아랍의 전통의학이 이 대열에 참여하기에는 아직 기술적으로 성숙되지 못했다고 WHO 전통의학 분야 담당자인 쟝샤오뤠이도 같이 거들었다. 회의 중간에 한국의 KCD-OM3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 요청이 있어서 바로 ppt 슬라이드를 만들어 약 10분에 걸쳐 발표하였다.
Dr Ustun은 2014년에 ICD-11 작업이 끝나며, ICHI(보건치료의 국제분류)도 동시에 진행할 것임을 피력하였는데, 일본의 와다나베 교수는 복잡해서 시간이 걸리는 ICHI 작업은 ICTM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본측은 이에 대해 회의기간 내내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Dr Ustun은 서양의학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지적재산권의 문제도 거론되었으나, 각국의 전문가들이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앞으로 만들어질 ICTM의 컨텐츠는 Stanford대학에서 개발하여 ICD-11의 인터페이스로 정해진 iCAT에 입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회의를 마치고 본부의 영상촬영팀이 와서 참석자 전원에 대한 동영상인터뷰를 하였다. 이 프로젝트의 공식 웹사이트에 띄우고, 5월의 홍콩회의에서도 방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 3월24일 중국은 재정 지원으로 주도권 확보
마지막 날 오전에는 향후 계획과 일정에 대해 논의하였다. 우선 올해 5월 25~29일로 예정된 홍콩회의와 그 전에 준비해야 할 사항에 대해 토의하였다.
홍콩정부는 이 프로젝트를 위해 직접 기금을 내지는 않고 있지만, 매년 한 차례 관련 회의를 개최해 줌으로써 기여하고 있다. 이어 향후 5년간 WHO와 이 프로젝트를 같이 이끌고 갈 advisory group(AG)으로 모두 12명이 선정되었는데, 필자와 금년 6월말이면 WHO에서 완전히 퇴임하는 쟝샤오뤠이를 포함하는 한·중·일 각각 2명씩 배정되었고, 나머지는 ICD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 AG 산하에는 Classification Group(Pattern & Diagnosis)과 Informatics Group(Content와 Informatics의 전문가)의 Technical Advisory Group(TAG)가 있는데 전자는 analogue이고, 후자는 digital 성격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Terminology 전문가는 그 양자를 중재·왕복·교류하는 것이다. 본 회의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ICTM의 주요 당사국인 한국·중국·일본의 대표자들과 추가로 재정적 지원을 약속한 미국과 호주의 대표, 그리고 기술적으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할 질병분류 분야의 세계정상급 전문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번 회의에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세 명씩 참석한 것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필자 혼자만 초청을 받았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 비해 실망스러운 한국정부의 재정 지원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Dr Ustun이 중간 휴식시간에 필자에게 심각하게 호소했었다. 그가 작년 10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관련 책임자들과 대표들을 만났고 그들로부터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그 후로 아무런 책임 있는 답변이나 실행이 없다는 것이다. 일본이나 중국과 같은 수준의 재정 지원이 한국 정부로부터 제공되지 않으면 한국의 전통의학 질병분류는 향후 진행과정에서 탈락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즉 한국 한의학 세계화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후에는 ICD-11를 주관하는 WHO와 전통의학의 표준을 다루려고 하는 ISO/TC215와 ISO/ TC249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필자를 포함해서 참석자의 절반 정도는 ISO(국제표준협회)의 회의에도 관여하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본래 WHO와 ISO는 독립적이고 각기 고유한 범주를 가지고 있지만, 중국측이 전통의학의 표준에 대한 주도권을 WHO에서 가질 수 없게 되자, 이를 ISO쪽으로 들고 가는 바람에 WHO와 ISO가 최근 심각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WHO에는 해당분야에 대한 전문가들이 상근하고 있지만, ISO에는 상근하는 전문가그룹이 없기 때문에 중국 정부가 ISO측에 인력과 재정 지원을 자청하면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전통의학의 국제표준은 WHO와 중국간의 주도권 다툼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으며, WHO 뒤에는 한국과 일본이 포진하고 있는 형국이다. Dr Ustun은 강한 어조로 두 국제기구 사이의 중복이나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은 피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 자리에 있던 중국측 참석자들은 잠시 딴 곳을 응시해야만 했다.
다시 홍콩회의를 위한 각국에서의 준비내용에 대해 토의를 하였다. 필자는 홍콩회의에 대만의 전문가들을 참석시키는 것이 어떠한가라고 질문하였다. 그랬더니 쟝샤오뤠이는 WHO 사무총장도 올해의 WHA에 대만대표의 참석을 허락하였기 때문에 ICTM의 홍콩회의에도 대만의 전문가가 참석할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Dr Ustun은 재정 지원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참가국의 협조를 강조하면서 회의의 종료를 선언하였다.
WHO 전통의학 분야의 최근 상황을 보자면, 과거 필자가 누렸던 재량권이나 영향력은 이미 WPRO를 떠났고, 대부분 본부가 주도하는 양상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우리나라도 WPRO에만 공을 들이기보다는 제네바쪽으로 전문가를 파견하는 등 방향 전환을 하여야 한다. 중국이 WHO에 파견하거나 근무시키는 전문가들의 개인 자질이나 역량이 부족하지만, 국가적으로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으며, 일본은 정부가 한 발짝 뒤에 있는 대신 일본동양의학회를 중심으로 전력투구하고 있다. 그 사이의 한국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우선 WHO와 같은 국제기구에 대하여는 보건복지부의 한의약정책관실이 주도하고 협회가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 앞으로 개인에게 임기응변으로 의존하는 방식은 지양하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WHO는 개인이나 단체보다는 정부를 우선적으로 상대하기 때문이다.
** 2013년 ICOM… WHO 협력 얻어내기 쉽지 않아
이런 회의에 참석하다 보면, 회의의 주제와는 다른 다양한 이슈들이 참석자들 사이에서 오고 간다. 같이 참석했던 WPRO의 전통의학자문관인 Dr Samdan은 필자에게 경희대학교 동서의학연구소의 협력센터 재지정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좀 더 적극적인 협력활동을 주문하는 메시지이다.
또 지난 2월말 일본 치바에서 열렸던 제15차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에서 겪었던 불만을 토로하였다. 대회 전에는 그토록 집요하게 WHO 후원이라는 타이틀을 요구해놓고, 막상 WPRO의 책임자들이 참석한 자리에는 겨우 30~40명의 대회 참가자들만이 회의장의 자리를 채웠다고 한다.
또 별다른 예우도 없이 푸대접한 것에 대해 신영수 WPRO 사무처장 대신 참석했던 Dr Bekedam이 매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었다고 하소연하였다.
그래서 지금 상황으로는 한국에서 2013년에 열릴 제16차 국제동양의학학술대회에서 WHO의 협력을 얻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선임자로서 그가 지금 어떤 상황에 있고, 또 무슨 고민과 거래를 생각하고 있는지를 손바닥처럼 환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WHO 서점에서 IST가 스테디 셀러로 자리잡아
이번 회의는 WHO 본부의 세 부서가 공동으로 참여하고 그 가운데 Dr Ustun의 부서가 대표하고 있다. 전통의학 부서에서는 작년에 퇴임하고 올 6월말까지 연장근무하고 있는 쟝샤오뤠이가 참석하였다.
현재 20년 가까이 WHO에 근무해오고 있으며, 별 다른 업적이 없고 종종 Lancet 등 국제지에서 비판과 구설수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녀는 WPRO에서의 IST 출판과 배포를 적극적으로 방해하였었다. 그러나 이번 회의 기간 중에 들렀던 WHO본부 서점에 IST가 어엿이 steady seller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필자에게는 커다란 기쁨이고 보람이었다. 세월이 가면 옥석은 가려진다.
언제나 어김없이 겨울을 넘어 돌아오는 봄은 제네바의 언덕너머로 다가왔다. 우리 한의학을 본격적으로 국제무대에 세우게 할 ICTM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