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열 교수의 노자이야기 46

기사입력 2009.12.1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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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可以爲天下母.
    吾不知其名, 字之曰道, 强爲之名曰大, 大曰逝, 逝曰遠, 遠曰反.

    막 섞여 있어서 뒤범벅인 그런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건 천지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다. 여기서 ‘물(物)’은 ‘도(道)’를 말하는 것이요, ‘혼(混)’은 ‘혼돈(混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잡다하거나 무질서한 것이 아닌 모든 것의 분리되지 않은 근원(The undiffe rentiated)이다. 그럼 그건 어떤 상태인가? 고요하고 쓸쓸하다. ‘적(寂)’은 소리가 없는 것을 뜻하고, ‘요(寥)’는 형체가 없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것은 홀로 우뚝 서서 바뀌지를 않고(獨立而不改), 두루두루 행하여 위태롭지 않다(周行而不殆). ‘독립이불개(獨立而不改)’에서 ‘독립(獨立)’은 홀로 선다는 것, ‘불개(不改)’는 영구불변, ‘주행이불태(周行而不殆)’에서 ‘주행(周行)’은 널리 보급되는 것, ‘불태(不殆)’는 위험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립이불개(獨立而不改)’는 도의 절대성을 설명한 것이고, ‘주행이불태(周行而不殆)’는 도의 보편성을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천하 만물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나는 천지가 생겨나기 전부터 있었던 그 ‘물건’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吾不知其名)”고 하였다. 그걸 문자로 표현하자면 ‘도(道)’라 하는데(字之曰道), 그것을 굳이 이름 지어 부른다면 크다고나 할까(强爲之名曰大). 크다고 하는 것은 끝없이 뻗어간다는 것이요(大曰逝), 또 끝없이 뻗어간다는 것은 멀리멀리 나가는 것(逝曰遠)이요, 멀리멀리 나가는 것은 되돌아오는 것(遠曰反)이다. 왜 그러냐하면 아무리 절대적이고, 전일적이고, 아무리 뻗어 나가도 무소부재 하므로 결국 그 자체 안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확대(evolution)와 축소(involution)의 순환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노자가 여기서 강조하려는 것은 도의 정적 존재성(static being)이 아니라 역동적 생성(dynamic beco ming)이다. 『신심명(信心銘)』 말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극소동대(極小同大)하여 망절경계(忘絶境界)하고 극대동소(極大同小)하여 불현변표(不見邊表)니라.

    지극히 작은 것은 큰 것과 같아서 상대적인 모든 경계가 끊어지고, 지극히 큰 것은 작은 것과 같아서 그 끝과 겉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작아도 아주 작으면 큰 것과 같고, 커도 아주 크면 작은 것과 같다. 극대니 극소니 할 때 그것이 그냥 우리 감각으로 크다 작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뭐라고 표현할 수 없도록 무한하게 작은 것은 결국 큰 것과 같고, 아주 뭐라고 표현할 수 없도록 무한하게 큰 것은 결국 작은 것과 같다. 쉽게 말해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감각을 느낄 수 없는 그것이 진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감각 그 자체를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으로 해결책을 삼을 수도 없다. 색(色)을 떠나서는 공(空)도 없으니까.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에 보면 “만일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고 하거나 소리로써 나를 구하려면 이 사람은 그릇된 도를 행하는 자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고 했다. 부처를 감각의 대상에서 찾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오가해(五家解)』를 엮은 함허당(涵虛堂)이 여기에 설의(說議)를 붙여, 부처는 색(色)과 성(聲)에 있지 않고 또한 색과 성을 떠나 있지도 않으니 색과 성으로써 부처를 구해도 볼 수 없거니와 색과 성을 떠나서 부처를 구해도 또한 볼 수 없다(佛不在色 , 亦不離色 , 卽色 求佛, 亦不得見, 離色 求佛, 亦不得見, 離色聲求佛, 亦不得見)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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